“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두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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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8일은 양력 한해의 251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14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9월 8일은 국제 문해의 날은 유네스코에 의해 공식 제정된 기념일로, 문맹 퇴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날입니다. 유네스코가1965년 11월 17일 소집된 제14차 대표대회에서 설립되었습니다. 문해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말합니다. 교육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이지만, 문해 능력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9월 8일은 또 세계 저널리스트의 날입니다. 이날은 ‘국제 언론인의 단결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이날을 설립한 것은 전 세계 언론인들이 단결을 강화하고 사업에 노력하며 진지하게 취재하여 진실한 글을 써서 사건이 발생한 진상을 적시적으로 보도하며 나쁜 사람과 나쁜 일을 타격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려는데 취지를 두었습니다.
[간 주]
황금낟알이 물결치는 가을을 두고 중국 길림성 장춘시의 김수금 청취자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간 주 청취자 내신]
하늘이 높아 흰 구름이 두둥실 헤엄치고 귀뚜라미가 귀뚤귀뚤 노래하며 가을 소식을 전합니다. 따사로운 햇살에 오곡이 무르익는 이 가을, 황금낟알이 물결치는 풍작의 가을이 눈앞에 다가옵니다.
중한수교 30주년에 즈음하여 귀 방송국의 ‘중한 수교 30주년 특별기획, 중국과 한국 30년을 지켜보다’라는 프로그램을 잘 청취했습니다. 또 감명이 깊었습니다. 방송은 교육편, 경제편, 공공외교편, 언론편 등으로 임봉해 아나운서와 김민국 선생의 진행으로 풍부한 내용을 흥미 있게 방송했습니다. 양국의 수교, 교류에는 소통이 필요했습니다. 중국 북경외국어대학 이교수는 번역과 통역 인재 양성에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통역을 잘 하려면 언어를 잘 습득해야 할뿐만 아니라 경제 등 측면에서 다양한 문화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30여년간 양국은 경제무역을 자유롭고 활발하게 진행하였습니다. 중한 기업의 발전은 아시아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일조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뒀으며 양국 인민에게 큰 복지를 마련했습니다.
공공외교편을 통해 중한 수교의 전후 상황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 양국은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세번째로 많이 찾는 나라가 중국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한국에는 230개의 공자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양국은 스포츠 교류가 아주 빈번했습니다. 중한 두 나라는 가까운 이웃으로 경제와 문화 등 여러 측면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언론편을 통해서 귀 방송국 아나운서와 기자로 근무한 여러 선생이 양국 교류에서 역할을 발휘하고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태근, 김금철 기자는 특파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중한 수교 후의 발전 상황을 지켜보고 전했습니다. 이밖에 박명국, 김동광 기자도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양국의 여러 측면의 발전 상황을 전했습니다.
중한 수교 30년 특별방송을 통해 더욱 심심하게 느꼈습니다. 중한 양국은 바다를 사이에 둔 영원한 이웃이며 가까운 벗으로서 불가분리의 전략협력 동반자라는 것을.
8월 24일, 습근평 중국 국가주석과 윤석열 한국 대통령은 서로 축하서한을 보내고 양국 수교 30주년을 축하했습니다. 앞으로 양국은 계속 영원한 이웃, 좋은 벗으로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며 더욱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하여 양국 인민의 행복을 증진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2022년 9월 5일
장춘개발구 장춘1자동차그룹 조선족노인협회 김수금 청취자 올림
네, 중한 수교 30주년 특별방송을 듣고 보내온 김수금 청취자의 소감이었습니다.
오곡이 무르익는 가을에 중한 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그동안의 협력과 관계 발전을 회억했습니다. 함께 두 나라의 지속적인 번영과 발전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년 고찰의 뒷골목에서 살던 고려인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년 고찰의 뒷골목에서 살던 고려인들
복건성福建省의 천주泉州는 옛날 엄나무라는 의미의 ‘자동刺桐’으로 더 잘 알려진 고장이다. 엄나무 ‘자동’은 원산지가 인도와 말레이시아로, 당唐나라 때부터 복건성福建省 천주에 옮겨져 번식되었다. 이 ‘자동’을 10세기의 5대10국五代十國부터 골목마다 심었다고 해서 천주는 일명 ‘자동성刺桐城’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옛 이름에서 드러나듯 천주는 일찍부터 인도 등 서토西土를 연결한 대륙 동남 연해의 중심 항구로 되고 있었다.
그런데 반도의 신라인이 대륙 천주의 절도사로 있었다니 여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후당後唐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하는데, ‘천주 절도사’라고 하는 왕봉규(王逢規, 생몰일 미상)도 후당에 사람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는 것이다.
절도사는 당나라 때부터 생긴 군정장관의 관직 이름이다. 실제로 ‘자동’이라는 이 식물을 심도록 명령을 내린 인물이 바로 유종효留從效라고 하는 천주 절도사였다.
당나라 때 외국출신의 사람이 절도사로 있은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한즉 천주의 절도사가 신라인이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구나 당나라에는 신라인이 자치적으로 관리하던 신라소新羅所까지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주의 절도사가 신라인이라는 기록은 중국 문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직함은 실은 해상 호족 왕봉규가 자칭한 ‘명예직’으로, 그가 천주를 통해 후당과 자주 왕래한 까닭이 아닐지 한다.
아무튼 당나라 때 천주에는 외국의 이런 사절을 접대하는 역참이 없었던 것 같다. 관부가 천주에 역참을 설치하고 전문 외국 사절을 접대한 기록은 당나라 후의 북송北宋 말에 비로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때 일부 외국인들은 천주의 남부 일대에 집거하여 ‘번인蕃人’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 ‘번인’은 옛날 중국인들이 이국 사람이나 이족異族을 이르던 말이다. 번인들이 살던 이 골목은 거개 사람들의 단체기억에서 사라지고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남아있다.
고려인들이 살던 동네 ‘고려항高麗巷’은 명․청明․淸 때부터‘규하항奎霞巷’으로 지명이 바뀌어 있다. 규하항은 천주의 서쪽에 위치하는데, 별자리星宿의 규성奎星 방위에 대응하며 아침이면 햇볕이 골목 구석까지 비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규성은 문장을 관할하는 별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옛날 장서각藏書閣에 규성의 이름을 넣는 경우가 많았다. 역대 임금의 글을 모아 보관한 서울 종정사宗正寺에 규장각이라는 현판을 달게 된 데는 그런 의미가 깃들어 있다.
규하항은 현재로선 주택가로 되어 있으며 장서각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번화가의 중화로中華路에 붙어있는 이 골목은 낡은 주택들이 올망졸망 늘어서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기름떡을 팔던 방方씨 성의 아줌마는 그게 뭐가 대수이냐 하는 기색을 짓고 있었다.
“뭐요? 여기가 ‘고려항高麗巷’이 맞는데요…”
방씨의 떡 난전은 골목 어귀에 안내소처럼 버티고 서서 기름 냄새를 물씬물씬 풍기고 있었다. 어쩌면 이 기름 냄새처럼 안쪽의 한산한 골목에서 오래 묵은 책의 냄새를 맡을 것 같았다. 방씨는 그녀가 이 골목에 시집을 온 외지인이라고 하면서 일행의 묻는 말에 머리를 흔들었다.
“저는 잘 몰라요. 저 할아버지랑 물어보세요. 이 골목의 토박이거든요.”
방씨가 턱짓으로 가리키는 저쪽 가게의 문어귀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노인은 황黃씨 성으로 가게의 주인이었다. 그는 한여름의 더위 때문에 아예 윗동을 활 벗어버리고 있었다.
“고려항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네. 이 이름을 부르면 우리 골목에서 살던 사람이지.”
노인은 아직도 규하항보다 고려항이라는 이름이 입에 더 잘 오른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이 한데 몰려 살던 이 골목은 현지인들에게 천년이라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생생한 지명으로 남고 있는 것이다.
문득 골목에서 상투 차림의 누군가 문을 떼고 나와서 수다를 떨고 또 물고기를 요리하는 비린내를 풍길 것 같은 각이 들었다.
잠깐, 골목을 일컫는 거리 항巷은 중국말 독음讀音으로 응당 ‘샹’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노인은 분명히 조선말처럼 ‘항’이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또 노인은 물론 아줌마도 모두 황씨 성과 방씨 성을 거의 같은 독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중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연변 조선족 노인들의 발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규하항’이 실은 ‘고려항’의 민남어閩南語의 독음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민남어는 천주에서 기원한 복건성 지역의 방언이다. 실제로 반도에서 천주에 전래되었다고 하는 ‘고려채’ 역시 민남어의 독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설법이 있다.
양배추는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이다. 이 양배추가 먼저 반도에 전래되었으며 고려 때 다시 해로를 통해 천주 일대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그래서 ‘고려채’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현지인들이 시초에 그 모양에 따라 겹겹이 둘러싼 박이라는 의미의 ‘과라裹蓏’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이 ‘과라’의 민남어 독음이 ‘고려’이기 때문에 ‘고려채’는 곧바로 ‘과라채’의 변음이라고 주장한다.
어찌됐거나 ‘고려채’라는 이 이름이 만들어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천주에는 반도에서 도래渡來한 고려인들은 군체群體로 나타나고 있다. 서쪽의 영춘현永春縣에는 또 고려산高麗山과 고려촌高麗村, 고려무덤이라는 옛 이름이 있다. 영춘현의 임林씨 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임씨 선조는 고려인으로, 남송南宋 시기 난을 피해 천주에서 천입했다고 한다. 임씨의 고려인 선조도 기실 고려인의 동네인 ‘고려항’에서 살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임씨의 선조처럼 바다를 건너온 ‘고려채’의 첫 상륙지 역시 이 고려항이 아닐지 한다.
천리 너머 이역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할 수 있었다. 고려인들에게는 식탁에서 향수를 달랠 ‘고려채’가 있었고 또 지치고 힘든 마음을 기댈 안락처가 있었다. 고려항에서 도보로 3분가량 상거한 북쪽에는 고찰 개원사開元寺가 자리한다. 사찰 뒷골목의 고려항의 위치가 이때 따라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천주 개원사는 당나라 수공垂拱 2년(686)에 지은 사찰로, 해내외에 이름이 있는 명찰이었다. 명승이 많이 배출되었고 또 탑과 석벽 등 유명한 경물이 있었다. 남송南宋 시기의 대학자 주희朱熹는 특별히 개원사에 연구聯句의 시를 쓰고 불국佛國의 옛 사찰 주변은 성인聖人으로 넘친다고 했다.
개원사의 앞 골목은 저녁 무렵인데도 말 그대로 인파가 흥성흥성하고 있었다. 현재 복건성에서 제일 큰 사찰이라더니 명불허전이었다. 물론 인파의 주역은 더는 성인이 아니라 가게와 좌판을 차린 장사꾼들 그리고 유람객이나 신도들이었다. 이에 비해 사찰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사찰의 객당客堂에도 스님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이튿날 다시 찾기로 작심하고 돌아서다가 마침 스님 한분을 만났다. 도신道新이라고 하는 법명의 이 스님은 개원사에 입적한 지 3년 된다고 했다.
“한국 스님이 드문드문 찾아옵니다만, 다른 사찰에 갔다가 들리는 경우이지요.”
도신 스님은 옛날 반도의 승려가 개원사를 찾아왔다면 천주의 개원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천주 개원사에도 일부 외국 승려가 다녀갔지만, 정작 이런 일로 소문난 곳은 복주福州의 개원사라는 것이다.
복주는 복건성의 소재지로 천주에서 북쪽으로 약 200㎞ 상거한다. 해상 실크로드의 지속시간이 제일 오랜 시발점 항구의 하나라고 전한다. 외국 승려가 빈번하게 복주를 드나들었기 때문에 중당中唐 이후 복주 개원사는 정부가 복건 지역에 오는 여러 나라 승려를 접대하는 곳으로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삼국의 승려가 복건에 왔다면 천주가 아닌 복주의 개원사에 행장을 풀었을 법 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동명의 개원사는 대륙의 동서남북 여러 지역에 현존한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개원開元 26년(738) 조서를 내려 전국 각 주와 군에 일련의 사원을 짓고 보수하는데, 이런 사원은 모두 당시의 연호 ‘개원’을 사원의 명칭으로 삼았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개원사는 모두 대륙 불교계의 유명한 사원으로 되고 있다.
복주의 개원사는 현존하는 제일 오랜 사원으로 일찍 황실의 사원이고 종묘였다고 한다.
사찰은 복주의 도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에 둘린 사찰은 별다른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산문부터 벌써 청아한 독경 소리가 날려 왔다. 이날 객당에 앉아있는 스님은 사찰의 감원監院으로 있는 영원靈願 법사였다. 사찰 역사를 숙지하고 있을 법한 그는 옛날 개원사에 인도와 일본 고승이 있었지만 신라 승려의 이름은 들은 적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상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928년 묵화상默和尙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싣고 왔다는 짧은 기록밖에 없다. 이 묵화상은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같은 시대, 같은 사건의 주인공인 승려 홍경洪慶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게 통설이다. 《고려사》는 태조 11년(928) 홍경이 후당後唐으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를 얻어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이르자 태조 왕건王建이 직접 마중을 나와 환영하였다고 전한다. 대장경은 경, 율, 논 삼장이나 여러 고승의 저서 등을 모은 총서를 말한다.
《고려사》가 밝힌 홍경의 출발지는 민부閩府이며, 이에 따르면 홍경은 복주 개원사에 들렸을 수 있다. 민부는 복건의 소재지로 복주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곳집 부府는 원래 정부의 창고 또는 역소役所의 의미이며 당나라 때부터 지방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되었다.
한 번 더 짚어서 홍경 역시 다른 외국 승려처럼 복주 개원사에서 수학했을 개연성이 크다. 개원사는 승려들의 체류지 뿐만 아니라 참학參學의 유명한 도장으로 되고 있었다. 일본 천태종 5조로 된 고승 엔친圓珍도 개원사에서 6년 동안 수학했다고 한다. 그때 복주 개원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수학한 일본 승려는 아주 많았다. 홍경은 생몰일 미상의 승려로 사찰의 옛 기억에는 무명의 승려로 되고 있는 게 아닐지 한다.
아무튼 개원사는 반도의 삼국과 불연佛緣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륙 남부의 광동성廣東省 조주潮州의 동명의 고찰 개원사에는 삼국 승려의 족적이 남아 있다. 사찰 대전의 천년 향로에는“선당禪堂의 향로를 영원히 공봉 하는 삼한三韓 제자 임국조任國祚”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임국조는 당나라 때 조주 개원사에서 수학하던 신라 승려라고 전한다.
그 무렵 복건성 지역에는 서민이나 상인들의 발길도 적지 않게 닿고 있는 듯하다. 현지에서 옛날 ‘신라갈新羅葛’이라고 불렸던 참외는 신라에서 전래된 것으로 전한다. 식물 이름인 신라삼新羅參이나 신라송新羅松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바다 건너 해가 솟아오르는 한반도는 엄연히 ‘해상 실크로드’의 하나의 축으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간 주]
고려인들이 이역의 천주에 나타나고 또 천주에 ‘고려채’라는 야채 이름이 생긴 이유를 안재 알 것 같습니다.
네,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천년 고찰의 뒷골목에서 살던 고려인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전 공화국 주은래 선생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전 공화국 주은래 선생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