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6 09:43:34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9월 1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세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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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15일은 양력 한해의 25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07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9월 15일은 중국 두부 문화축제의 날입니다. 두부 문화축제는 이전 상업부와 이전 국내무역부, 이전 국가국내무역국, 중국 상회가 각기 안휘성 인민정부와 함께 주재하고 회남시 인민정부가 주관했으며 해협양안의 회남과 대북이 해마다 9월 15일 동시 개최했습니다. 두부 문화축제의 날은 문화와 관광, 경제무역을 일체화한 국제적인 상업관광문화 축제입니다. 두부는 전통적인 양생 식품으로 지금까지 2천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회남은 두부의 제작, 식용 그리고 두부를 기본으로 하는 두부문화에서 인류의 고대 문명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엮었습니다.

9월 15일은 코스타리카의 독립일이고 국경일입니다. 19세기 20년대 라틴미주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코스카타리카는 1821년 9월 15일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도 1821년 9월 15일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1676년 9월 15일 그리니치 천문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영국 런던 교외그리니치에 설립되어 경도의 원점이 되었다

1944년 9월 15일, 미군이 방어선을 뚫고 독일에 진군했습니다.

1981년 9월 15일, 베이징 지하철 제1기 공정이 정식으로 운영에 교부되었습니다.

1991년 9월 15일, 최대의 인조지구위성이 우주에 발사되었습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용문의 동굴에 신라인이 숨어 있었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용문의 동굴에 신라인이 숨어 있었나

옛말에 “잉어가 용문龍門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용문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도심에서 남쪽으로 20여리 상거한다. 기실 용문에 앞서 이궐伊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궐은 대문을 뜻하는 것으로 두 건물 사이에 공간이 있는 형국을 말한다. 낙양 남쪽을 흐르는 강 이하伊河의 동쪽과 서쪽 양쪽의 산이 마주하고 서있는 모양이 흡사 대궐과 같았던 것이다.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등극한 얼마 후 이궐을 용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하의 바로 북쪽에 동도東都 낙양을 짓는다. 이궐은 이때부터 이름 그대로 용문 즉 낙양 남쪽의 천연적인 문호門戶로 되었다. 황성의 정남쪽 성문은 이궐을 향하고 있었으니, 용문을 건너면 곧바로 인간세계의 ‘용’이라고 일컫는 황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옛말이 그른 데 없나 보다. 각도에 따라 보는 색채가 달라지 듯 용문의 남북에서 만나는 세계도 각각이다. 용문의 남쪽에는 황제의 궁실이 아닌 부처의 세계가 있다.

일찍 북위北魏 때부터 용문에 석굴을 만들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용문에 현존하는 굴과 감실은 2천 3백여 개이며 석상은 9만 7천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와중에 제일 큰 불상은 높이가 17m, 제일 작은 불상은 불과 2㎝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거인’과 ‘소인’이 공존하는 대천세계大千世界였다.

그러나 이 불국의 세계에서 신라인이 만든 불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안내소의 예쁘장한 도우미는 신라인 이름의 석굴을 모른다고 말한다.

다행이 천 년 전 반도에서 도래渡來한 신라인은 용문을 소개한 책 《용문백문》에 현신現身하고 있었다. 책의 소개에 따르면 용문에 외국인이 만든 감실은 2개뿐이라고 한다. 신라인이 만든 감실이 서산에 있었고 토화나吐火羅 즉 중아시아 옛 나라의 승려가 만든 불상은 동산에 있었다.

신라감실의 표식물이나 다름없는 진주천珍珠泉은 용문 풍경구의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용문백문》에 따르면 진주천은 물밑의 돌구멍에서 기포가 구슬처럼 솟구쳐 오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샘물이 나오지 않아서 하마터면 진주천을 근처에서 언뜻 스쳐 지날 뻔 했다.

《용문백문》에는 진주천 남쪽 15m 되는 곳에 ‘신라감실’이 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웬 일이지?”하고 잠깐 우두커니 서있었다. 산체에 벌집처럼 숭숭 뚫린 석굴들이 저마다 눈을 크게 뜨고 혼돈세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이 속인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알고보니 진주천 바로 근처에 석굴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돌층계에는 ‘관광객 출입금지’라는 금속물의 패쪽이 세워져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은 10년 전부터 지금

결국 석굴에서 내릴 때 그만 관리인에게 들켜서 눈알이 쑥 빠지도록 한바탕 꾸중을 들어야 했다.

석굴은 눈동자가 없는 확처럼 우묵하게 패어있었다. 높이 약 2m, 너비 1.7m, 깊이가 1.7m라고 《용문백문》이 밝히고 있었다. 석굴의 발치에 ‘제484호 굴, 신라상감新羅像龕’이라고 적은 석판이 있지 않았던들 신라인이 만든 감실이라고 판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여느 감실과 구조가 엇비슷했고 또 그 무슨 석상이라곤 없었다.

그럴지라도 경탄은 이하 기슭의 샘처럼 저절로 흘러나왔다. 천 년 전 신라인이 벌써 이곳에 와서 석굴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했다.

신라상감은 용문의 석굴에서 신라인이 만든 유일한 감실이다. 감실의 문미門楣 위쪽에 ‘신라상감’이라는 예서체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책에 나오는 탁본이 아니라면 그런 글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얼기설기 패인 석벽에는 글자의 획이라곤 알리지 않았다. 잔존한 흔적으로 미뤄 감실에는 석상이 7존 있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부처 석상 하나와 제자 석상 둘, 보살 둘, 역사 둘이었다. 이런 석상은 움직일 수 있는 석상이었으며 따라서 다른 석상보다 더 쉽게 잃어진 것 같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용문 석굴에서 많은 석상은 민국(民國, 1912~1949) 시기에 유실되었으며 정작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학생과 군중들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대륙의 첫 사찰이라고 하는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의 유적도 일부 훼손되었지만 용문 석굴은 이 전대미문의 겁난劫難을 피할 수 있었다.

현재 해외에 유실된 문물 가운데서 70여점의 행방을 찾았지만 신라감실의 석상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고 전한다. 와중에 누군가는 “혹여 신라인이 만든 불상은 일본에 유실된 건 아닐까?”하는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하긴 신라상감 남쪽의 고양동古陽洞의 예불도禮佛圖 조각은 물론이요, 근처의 빈양동賓陽洞 보살의 두상頭像도 모두 일본에 가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신라상감의 석상은 언제 잃어졌는지 그 시기마저 불명한 것으로 《용문백문》에 기록되고 있었다.

아쉬운 일은 그뿐만 아니었다. 토화나의 감실은 “경운景云 원년(710) 승려 보륭寶隆이 만들었다”고 명명백백하게 문자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상감을 만든 주인공은 감실의 소실된 석상처럼 형체를 그리기 힘들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는 아주 활발했으며 양국을 오가는 인원은 아주 많았다. 신라 사절과 승려, 상인, 유학생이 줄을 이었다. 이에 따라 대륙에 전문 신라인을 상대한 숙박소인 신라관新羅館, 신라원新羅院 그리고 신라인들의 집거지인 신라촌新羅村과 신라방新羅坊이 출현했던 것이다.

낙양과 장안은 대륙의 중심이었으며 이에 따라 신라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낙양 용문 석굴의 신라상감은 그들의 중원에 남긴 흔적이었으며 여느 석굴처럼 불교 교리를 선전하고 수행, 예불을 하던 도장이었다.

일각에서는 용문의 많은 석굴이 당나라 때 생겼다는 데 주목, 이 시기 무측천(武側天, 624~705)의 요청에 응해 경전번역 작업을 했던 고승 원측(圓測, 613~696)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원측은 신라의 왕손으로 15세에 당나라에 와서 낙양과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불법을 배웠다. 그의 부도탑浮屠塔은 장안의 흥교사興敎寺에 있지만 입적했을 때 다비茶毘된 장소는 용문 석굴의 맞은쪽에 있는 향산사香山寺 부근의 계곡이다. 신라의 국사國師가 된 고승 무염(無染, 801~888)도 신라상감의 주인공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 역시 신라 왕손 출신이며 낙양에 와서 불법을 수행했다. 고승 무상(無相, 684~726)도 한때 중원을 다녀갔으며 당唐나라 현종玄宗까지 알현한바 있다. 화엄종華嚴宗의 창시자인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 625~702)도 중원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이런 명승을 제외하고 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원에 머물렀거나 다녀갔다. 그리하여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은 그가 장안에서 만났던 호승胡僧을 출신국에 따라 ‘00국승國僧’으로 표기한데 반해 신라 승려만은 ‘제사諸寺’의 신라 승려라고 한데 묶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 승려가 용문의 감실을 만들었다고 콕 집어서 얘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역에서 생활하고 있던 신라인들에게 부처는 둘도 없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대륙의 신라 촌락마다 해와 달처럼 어김없이 출현했던 사찰이 바로 이를 견증한다.

용문의 산체에 출현하는 석상에는 북위부터 여러 조대를 거치는 4백년의 연륜이 조각되어 있었고 이하의 수면에 그림자로 비껴 있었다. 석굴을 만들던 석공들과 석굴에서 수행하던 승려 그리고 석굴에 와서 예불하던 신도들은 모두 이 강물을 길어먹었다. 또 승려들과 신자 그리고 문인들은 이 수로를 따라 용문 석굴에 와서 예불하고 노닐었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지인인 승려 불광佛光과 함께 일엽편주를 타고 석굴의 사찰에 와서 차를 마시고 시를 읊었던 것이다.

산기슭을 따라 단 한 시간 만에 용문의 4백년 세월을 주파했다. 용문을 건너 다시 낙양 시내로 들어가는데 문득 시가 아닌 옛 노래가 머리에 떠올라 가락을 젓고 있었다.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간 주]

네, 반도의 낯익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노래처럼 홀연히 다가올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그 속에서 신라인 석굴의 주인공이 세월의 물결을 헤가르고 당금이라도 눈앞에 떠오를 듯 합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용문의 동굴에 신라인이 숨어 있었나”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 전 총리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 전 총리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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