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30 19:47:0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10월 6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첫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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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10월 6일은 양력 올해의 279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86일 다시 말해서 석 달이 채 안 남았습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기억하라, 하나의 시간만이 중요한 것이니 그것인즉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860년 10월 6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했습니다.

1913년 10월 6일, 원세개가 정식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1995년 10월 6일, 천문학자가 태양계 밖의 첫 행성을 발견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을 하루 앞선 10월 5일은 해마다 세계 교원의 날입니다. 세계 교원의 날은 유네스코와 국제노조기구가 공동으로 발표한 ‘교원의 지위에 대한 제안서’를 기념하기 위해 199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1966년 10월 5일, 유네스코와 국제노조기구는 ‘교원지위에 대한 제안서’를 공동 심의하고 통과했습니다. 이로하여 이 주제의 날은 10월 5일로 설정되었습니다.

‘교원지위에 대한 제안서’는 세계적으로 교원 직업에 관한 중요한 문건입니다. 이 문건은 처음으로 ‘교원 사업을 전문직으로 간주해야 한다’것을 제기했습니다. 이로부터 교원 직업은 전문성 직업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가 점차적으로 공감대를 이뤘습니다.

세계 교원의 날은 전 세계 교원들이 교육사업과 인류에 한 기여를 높이 평가하고 감사를 표하며 이와함께 교원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교원을 도와 그들의 자체 권익을 수호를 돕는데 취지를 두고 있습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신라의 사절은 왜서 머리가 떨어졌을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라의 사절은 왜서 머리가 떨어졌을까

결론부터 밝힌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유봉乳峰’이라고 부르지요. 봐요, 모양이 비슷하지 않아요?”

이른 봄의 양산은 산의 누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봉 남쪽의 봉긋한 두 봉우리의 꼭대기에는 탑 모양의 건물이 있었는데, 젖무덤 즉 유봉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별칭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은 의미의 내두산奶頭山이라고 한단다.

유봉은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의 건현乾縣 현성에서 북쪽으로 6㎞ 상거한다. 건현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와 황후 무측천武則天의 합장무덤인 건릉乾陵으로 해서 얻은 이름이다.

건릉은 유봉 북쪽의 주봉에 있으며 ‘산을 능으로 삼는’ 옛날의 건조建造방식으로 인해 산 자체가 거대한 능으로 되고 있다. 마를 건乾은 하늘과 지아비, 황제 등을 뜻하고 있으니 건릉이라는 이름은 결국 고무지우개처럼 양산의 여성스런 참모습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양산은 황후 무측천에 의해 능 자리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고종이 병으로 사망한 후 무측천은 그의 임종 유언에 따라 장안長安 즉 지금의 서안西安 부근에서 음택陰宅의 길지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때 황궁의 유명한 방사方士 이순풍李淳風은 칙지를 받고 진천秦川의 땅을 밟고 다녔다. 진천은 지금의 섬서 북부의 평원지대로 옛 진秦나라의 땅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어느 날, 이순풍은 기이한 돌산을 발견하였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흡사 웬 여인이 흰 구름 아래에 다소곳이 누워있는 양상이었다. 이 여인은 이목구비를 오목조목 다 갖추고 있었다. 젖무덤이 가지런히 솟아있었고 젖꼭지가 있었으며 배꼽까지 있었다. 두 다리의 사이에는 또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순풍은 급급히 주봉에 올라 방위를 잡고 머리핀을 땅에 박아 표식으로 삼았다.

미구에 무측천이 대신을 파견하여 무덤자리를 확인할 때 기괴한 일이 생겼다.

글쎄 머리핀이 면바로 동전 복판의 네모 구멍에 박혀 있더라는 것이다. 가이드의 다소 흥분된 말이다.

방사方士 원천강袁天罡이 이에 앞서 표식으로 동전을 땅에 묻어 놓았다고 한다. 원천강도 실은 이순풍처럼 칙지를 받들고 무덤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밤중에 천체 현상을 살피다가 상서로운 기운이 솟구쳐 북두칠성과 서로 교접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상서로운 기운이 똬리처럼 서린 그곳에 원천강은 일부러 동전을 묻어 놓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건과 곤, 음과 양이 양산에서 절묘한 만남을 하고 있었다.

홍도弘道 원년(683), 건릉 공정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고종 이치가 능에 묻혔다. 건릉공정은 계속되었고 신룡神龍 2년(706)년 중종中宗 이현李顯이 조서를 내려 무측천을 능에 안치했다.

주봉의 건릉으로 향한 신도神道에 들어서기 전에 가이드를 졸라 유봉에 올랐다. 유봉에 오르는 관광객은 우리가 처음이라면서 가이드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언덕 같은 나지막한 산마루에 금세 올라설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 솟아오른 조형물은 봉화대인 줄로 알았는데 실은 흙무지의 옛터에 상상을 동원해서 각색한 망루였다.

솔직히 봉화대라고 해도 반론을 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장안 서쪽의 이 산정에 봉화대가 나타나는 게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나라 초기 돌궐突厥과 전쟁이 이어졌고 또 서역을 두고 토번吐藩과 쟁탈전이 있었으며 나중에는 대식大食과 전투를 벌인다. 대식은 당․송唐․宋시기 아라비아를 이르던 말이다. 정말로 봉화대에 불을 지폈다면 분명 당나라의 쇠패를 알리는 신호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 전쟁 이야기는 결코 유봉이라는 지명처럼 속인俗人의 허망한 상상이 아니었다.

천보(天寶, 742~756) 연간, 당나라 군대는 대식 정벌에 나섰다. 대식은 속국의 20만 군대를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다. 천보 10년(751), 드디어 사상 유명한 전역인 탈라사怛邏斯 전역이 시작되었다. 이 전역에서 실패한 당나라는 궁극적으로 세계 최대 제국의 자리를 대식에 내주게 된다.

이때 대식 연합군에 포로가 된 당나라의 병사 가운데는 제지製紙 장인匠人이 있었다. 탈라사 전역의 실패는 중국 섬유질의 제지술을 서방으로 전파하는 계기로 되는 것이다. “화가 변하여 복으로 된다”는 속담은 이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정말로 억지 구실이 아닐지 한다. 전쟁의 실패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당나라의 야사를 적은 《개원일요開元逸要》의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초기 서역에는 명마가 많이 났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상인이 중원의 종마를 대식에 갖고 가서 명마와 교배, 새끼를 밴 후 다시 갖고 올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을 수용한 안서安西 절도사 고선지高仙芝는 훗날 당나라군의 장령으로 출전한 인물이다. 고선지는 유민의 출신으로 일찍 당나라의 서역 정벌에 크게 기여하고 명성을 떨쳤다.

각설하고, 새끼 말은 성장한 후 과연 몸집이 우람졌으며 모두 전마로 징집되었다. 이에 고선지는 기뻐서 당나라의 준마라는 의미의 ‘당준唐駿’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며 군대에 있던 옛 말들을 거의 모두 폐기했다. 그런데 탈라사 전역에서 ‘당준’은 대식의 전마와 접근하면 곧바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종국적으로 당나라군이 전패한 원인으로 되었다. 페르시아 상인은 대식이 파견한 첩자였던 것이다. 그가 당나라의 종마와 교배시킨 것은 당나귀였으며, 고선지의 ‘당준’은 준마가 아닌 노새였다.

‘당준’이 싣고 온 비운은 이로써 가셔지지 않았다. 4년 후 고선지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했으나 부하의 모함을 받아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그런데 목이 떨어진 이 슬픈 이야기는 신도神道가 끝나는 주작문朱雀門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주작문 밖의 신도 양쪽에는 각기 석상들이 시립侍立하고 있었는데, 웬 영문인지 석상의 머리는 하나같이 전부 댕강 잘려 있었다.

신도 양쪽의 석인石人과 석수石獸 등 석상은 제왕의 생전의 의장대를 상징한다. 그러나 주작문 근처의 석상 군체는 제왕의 의장대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번상蕃像’이나 ‘빈왕상賓王像’이라고 해요. 혹은 ‘61번신상蕃臣像’이라고 하지요.” 가이드의 설명이다.

석상은 신도의 서쪽에 32존이 있었고 또 동쪽에 29존이 있는 등 도합 61존이었다.

당나라 고종의 장례식에는 민족 관원과 이웃나라의 왕자, 사절이 참석했다고 한다. 무측천은 당나라의 위세를 선양하기 위해 그들의 조각상을 진짜 사람의 크기 모양으로 만들어 이처럼 건릉 앞에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석상은 저마다 복색이 다르지만 모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잡는 등 공경한 자태를 하고 있었다. 마치 능 앞 일부러 대열을 지어 황제의 행차를 맞이하고 있는 듯 했다. 당나라는 서방 호인胡人의 경교景敎가 전래될 정도로 상당히 개방된 나라였다. 만국의 사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왔다. 건릉 앞에 시립한 61명 번신 석상은 이국 사절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단면도라고 하겠다.

가이드는 일행이 신라사절의 조각상을 찾자 아주 놀라운 기색을 짓는다. “여기에 신라사절도 있어요?”

석상의 잔등에는 원래 장례식에 참석한 인원의 국별과 관직, 성명이 각기 낱낱이 적혀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로선 ‘토화나왕자지갈달건吐火羅王子持羯達犍’ 등 글의 흔적이 약간이라도 남아있는 석상은 오로지 7존뿐이라고 한다.

비록 서안은 대륙의 오지였지만, 서울이었고 또 실크로드의 대륙 시발점이었다. 이에 따라 반도를 비롯하여 이방의 공식 사절과 구법승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신라는 618년 대륙의 통일왕조로 출현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해마다 외교사절을 파견하고 있었다. 와중에 성덕왕(聖德王, 703~737)은 재위 30여 년 동안 무려 40차나 사절을 당나라에 보낸다. 신라 승려도 사절의 대열에 들어 있었다. 당나라에 온 신라의 일부 구법승들은 또 이런저런 원인으로 황제의 소견召見을 받았으며 당나라와 신라 쌍방의 교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무튼 신라사절이 건릉 61명 번신 석상으로 있을 개연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신도 동쪽의 석상 군체에서 제일 마지막 줄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석상을 신라사절로 보고 있다.

석상은 백의민족이 잘 다루는 활을 들고 있고 또 신라인들의 옷차림에서 나타나는 3겹의 복장을 갖추고 있다. 위층과 중간층, 아래층 등 3겹으로 옷을 입은 방식은 여러 석상의 복장과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이런 복장은 소릉(昭陵, 당태종의 능묘) 주변에서 발견된 진덕(眞德 ?~654) 여왕 좌대의 하반신에도 또렷이 남아있다. 건릉 근처의 장회章懷 태자묘의 벽화 ‘예빈도禮賓圖’에 나오는 신라사절도 이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있다.

아니, 뭔가 잘못 된 것 같다. 신라사절의 신분은 신라왕으로 껑충 승격하고 있었다. 장회 태자묘의 전시실에서 그렇게 버젓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신라사절만 아니라 61명의 번신이 모두 빈왕으로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하가 감히 왕으로 ‘자처’하는 이 불경스러운 행동 때문에 석상의 머리가 잘렸을까?…

통상 관광객들이 맨 처음 지목하는 주범은 번군蕃軍 즉 이방의 군인 8국 연합군이다.

8국 연합군은 1900년 중국 북방의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고자 중국에 침입한 연합 원정군을 이르는 말이다. 연합 원정군은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 등 나라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이때 8국 연합군은 건릉에 시립한 번신의 군상을 보고 화를 버럭 냈다고 한다. 대륙을 휩쓰는 그들의 군위軍威가 낙엽처럼 땅에 뒹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석상의 머리를 일부러 베어버렸다는 것.

사실상 8국 연합군은 서안에 진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희慈禧 태후와 광서光緖 황제 등이 멀리 이곳에 와서 연합군을 도피하고 있었다.

실제로 진범은 인간이 아니, 지진이 빚어낸 끔찍한 재앙이다.

명明나라 가정嘉靖 연간인 1555년 1월 23일, 섬서성 화현華縣 일대에 리히터 규모 8 이상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무려 80여만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한다. 건릉은 화현에서 불과 100㎞ 상거하며 역시 진앙 지대에 위치한다. 이로 하여 건릉도 큰 타격을 입었던 것. 주작문의 석상은 물론 신도 양쪽에 서있는 석인石人과 석수石獸의 일부도 머리가 떨어졌던 것이다.

네, 석상의 머리는 떨어졌지만, 석상과 더불어 건릉에 있었던 이야기는 그냥 사라진 게 아니었습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옛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신라의 사절은 왜서 머리가 떨어졌을까”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먼저 지난달의 퀴즈 답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라방이 있던 ‘그곳’은 또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은래 전 총리의 고향이었습니다.

신라방은 있던 ‘그곳’은 어디일까요.

네,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주은해 전 총리의 고향이었고 신라방이 있었던 ‘그곳’은 대륙연해의 항구도시 회안淮安입니다.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중국의 고전명작 《서유기》는 당승 현장(玄奘, 602~664)의 천축天竺 여행을 모티브로 삼아 명明나라 때 나온 신괴神怪 소설입니다.

실제로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있었는데요, 이 신라 승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실제로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있었는데요, 이 신라 승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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