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셋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이준(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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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10월 20일은 양력 올해의 293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때까지 인제 72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23년 10월 20일 간행물 ‘중국청년’이 창간되었습니다. ‘중국청년’은 사회주의청년단의 기관 간행물로서 상해에 비밀리에서 탄생했습니다. 중국공산당 조기 청년운동의 걸출한 지도자인 운대영(恽代英)이 이 간행물의 초대 주필을 담임했습니다. ‘중국청년’은 중국공산당이 초기에 창간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연속된 간행물입니다.
10월 20일은 세계 요리사의 날입니다.
2004년 3월, 더블린에서 열린 제31차 세계 요리사 연합 대표대회에서 세계 요리사의 날이 제안되었으며 2004년 10월 정식으로 해마다 10월 20일을 세계 요리사의 날로 정하기로 선포했습니다.
세계 요리사의 날은 주요하게 세계적 범위에서 요리사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한데 목적이 있습니다.
세계 요리사의 날 기간 여러 나라의 ‘명요리’, ‘명연회’를 평가하며 요리사 업종의 최고상인 ‘금솥상’을 수여합니다.
10월 20일은 또 세계 통계의 날입니다.
제64회 유엔총회 제90차 회의는 6월 3일 결의를 통과하고 2010년 10월 20일을 첫 ‘세계 통계의 날’로 정했다. 이 결의는 ‘세계 통계의 날’ 총 주제를 ‘관방 통계의 많은 성과를 경축’하고 직무, 신뢰, 전문정신 등을 핵심가치로 하기로 확정했습니다. 유엔은 이날이면 모든 회원국, 유엔 계통의 여러 기구, 기타 국제와 지역 조직 그리고 비정부기구를 망라한 민간사회를 초청하여 적당한 방식으로 함께 ‘세계 통계의 날’을 경축합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북벌군의 조선인 소대장은 왜서 실종되었을까”라는 제목으로 북벌군에 참가했던 전병균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북벌군의 조선인 소대장은 왜서 실종되었을까
1926년, 중국에는 대륙을 돌풍처럼 휩쓴 전쟁이 일어난다. 대륙 남쪽 광동(廣東)의 국민정부가 국민혁명군을 주력으로 삼아 진행한 통일전쟁이었다. 훗날 이 전쟁은 일명 ‘북벌(北伐) 전쟁’으로 사책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다.
북벌전쟁에는 여타의 전사(戰史)처럼 많은 비사(秘事)가 깃들어 있다. 조선인 군인이 북벌군에 대량 등장한 이야기가 그중의 하나이다.
조선인 전병균은 북벌군에서 보병소대 소대장으로 있었다.
전병균은 황포군관학교의 제6기 학생이었다고 한다. 전병균은 6기생의 신분으로 북벌군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은 진정한 의미에서는 1기부터 7기까지의 학생을 이르는 말이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창시자 손중산(孫中山)이 1924년 5월 광동성(廣東省) 광주시(廣州市) 황포구(黃浦區)의 장흥도(長興島)에 세운 정치군사학교이다. 학교는 국민혁명을 위해 군관을 양성하는데 취지를 두었으며 이런 군관은 나중에 국민정부가 발동한 북벌전쟁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되었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은 국민정부 산하의 군관학교와 국립대학에 조선인의 입학을 허락한다. 이때 교장 판공실의 비서 겸 교관으로 있던 손두환이라고 하는 조선인이 장개석과 직접 교섭하여 조선인의 황포군관학교 입학에 많이 이바지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비롯한 경찰서류에 많이 반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문헌내용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일찍 황포군관학교 제3기부터 입학하기 시작했다. 조선인 학생은 이때부터 1949년의 제22기까지 황포군관학교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마다 다 조선인이 있은 건 아니다. 사학자 최봉춘은 《황포군관학교 동학록(同學彔)》의 기록을 인용, 제3기 5명, 제4기 32명, 제5기 6명, 제6기 1총대와 2총대 11명 등 도합 14기의 다수의 조선인 졸업생 이름이 검색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칭 6기생이라고 하는 전병균의 이름은 《황포군관학교 동학록》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 제6기 1총대(總隊)는 1928년 4월부터 1929년 5월까지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고 2총대는 1926년 10월부터 1929년 2월까지 광주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 가운데서 제6기 학생들의 일부는 북벌군을 따라 대륙 중부의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에 간 후 1927년 설립된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제6기로 재편성되었다.
사학자 최봉춘은 전병균의 자필이력서(1954)에 근거한 그의 추론을 이렇게 피력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전병균은 제6기(제2총대)에서 재학할 당시 소대장 자격으로 북벌전쟁에 투신하고 무한에 도착한 후 무한분교 제6기에 재편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병균은 1927년 7월 중순까지 무한에서 훈련을 받다가 광주로 남하하여 연말의 광주기의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황포군관학교 동학록》에 등록되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 더구나 동학록은 졸업 1년 후 조사하여 편제하는 게 관례였으며, 이런저런 원인으로 상기 명부에 수록되지 못한 학생은 적지 않았다.
실제로 전병균처럼 자칭 제6기 예비생 또는 제4기생이라고 하는 조선인 최정무(崔鼎武)도 그 이름이 명부에 기록되지 않고 있다. 최정무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위에》라는 제하의 실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어찌됐거나 전병균이 북벌전쟁의 과정에서 소대장으로 있었다고 하는 이력서의 서술에 대해 최봉춘은 전적인 수긍을 하고 있었다.
군관학교의 졸업생은 물론 학생들까지 초급 군관의 계급으로 북벌에 투입되었다. 전병균 등 조선인들은 국민혁명군 각 군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비록 구체적인 숫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 조선인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라기보다는 학생병사가 대부분이었다.
와중에 국민혁명군 제4군단 엽정(葉挺)독립연대 제3대대는 대대장이 양림(楊林)이었다.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전 교관이었으며 조선인이었다. 이런 연고로 3대대에는 기타 부대보다 조선인이 더 많이 집결되었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엽정독립연대는 1926년 5월 선견부대로 되어 호남성(湖南省)에 진군했다. 전병균의 북벌참가 시점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것. 이에 따라 전병균의 북벌군 소속부대 명칭에 씌워진 베일을 벗기는 일은 더구나 힘들어지고 있다.
전병균은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의 동명(東明)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을 때 남방의 광주에 곧 군관학교가 설립된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동명학교는 이름 그대로 ‘동쪽을 밝히는 학교’라는 의미로 반일독립 사상을 선전하던 학교였다. 전병균이 동명학교에 이어 교직에 있은 요녕성 신빈현(新賓縣)의 영영촌(英盈村) 소학교 역시 반일독립 단체가 세운 학교였다.
이에 앞서 전병균은 고향인 조선 평안북도의 선천읍 중학교에서 공부할 때 14살의 어린 나이에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경찰의 조사를 피해 도주하다시피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부모와 함께 이삿짐을 내려놓은 요녕성 신빈현에는 조선독립군의 일원인 삼촌의 가족이 이미 전에 이주하여 삶의 새 터전을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병균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황포군관학교의 입학을 작심한 게 아니었다.
이력서에 따르면 전병균은 광주행 경유지인 상해(上海)에서 학우 김득수(金得洙)를 만난다. 김득수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원이었다. 운명처럼 때마침 만난 인물이었다. 전병균은 김득수로부터 광주의 중산(中山)대학에 있는 그의 지인 유상우(劉相禹)를 소개 받았다. 1926년의 《국립중산대학 학생명부》에 따르면 이 무렵 약 50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중산대학 본과와 예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유상우의 주선을 받아 전병균은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양림(楊林)을 만나며 그의 알선으로 시험을 본 후 황포군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그 시기 전병균이나 유상우, 양림처럼 광주에 집결한 조선인은 300여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황포군관학교, 중산대학, 광동군사비행학교의 재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군대에 편입된 조선인이 망라되고 있었다고 최봉춘은 그의 연구결과에 근거하여 밝힌다. 또 조선인은 이보다 훨씬 많은 800여명에 달했다는 설이 있다. 님 웨일즈는 일대기 《아리랑》(1937)에서 주인공인 조선혁명가 김산(金山)의 회억을 인용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미상불 광주는 국민정부의 수부가 소재한 곳으로, 조선인들이 자유와 독립의 길을 모색하고 활동하는 마당으로 되고 있었다. 1926년 말, 국민정부가 대륙 남쪽에서 중부의 무한으로 천도(遷都)하면서 뒤미처 무한 역시 조선인들의 또 하나의 집거지로 거듭나는 것이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은 국민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서적과 숙소, 식비, 복장, 봉급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국민혁명군에 의무적으로 복역해야 했다. 사학자 최봉춘은 그의 연구에 토대하여 이 기간을 몇 달 또는 1년 이내라고 추론하고 있었다. 아무튼 전병균 등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북벌군에 편입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1927년 7월, 국공 분열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문을 닫게 된다. 이때 또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무한 조선인청년회에 의해 제6기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이들 무한분교의 일부 학생은 엽정(葉挺), 하룡(賀龍)의 부대에 편입되고 다른 일부 학생은 장발규(張發奎)부대의 교도(敎導)연대에 편입, 재편성된 후 남하하여 광주에 간다. 교도연대에는 약 100여명의 조선인이 편입되었으며, 전병균도 여기에 포함된 걸로 최봉춘은 분석하고 있었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기의가 발발한다. 광주기의는 남창기의(1927.8)와 추수기의(1927.9)를 이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우파에 반항하여 일으킨 또 한 차례의 반격이었다.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무장력인 교도연대는 기의의 주력군이었다. 전병균은 이력서에 그의 소속 부대가 광주기의의 3박3일의 전투 끝에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때 기의군에 있던 조선인 군인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광주정부는 1964년 광주기의 열사능원에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설립하는데, 이 기념비의 낙관은 당시 기의군의 핵심 지휘관이었던 엽검영(葉劍英)이다. 비문은 150여명의 조선(인)청년들이 광주기의에서 희생되었다고 적고 있다. 교도연대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조선인의 거의 전부 혹은 그 이상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그때 전병균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간신히 끌고 중산대학을 찾아갔다. 그의 광주의 선착지였던 중산대학은 피신지를 찾는 마지막 한 올의 희망으로 되고 있었다.
다행히 학교 수위실(守衛室)의 진(陳)씨 성의 노인이 전병균을 학교의 지하실에 3일 동안 숨겨줬다. 이 고마운 노인은 미리 전부터 면목을 알던 사람인지 또 기의를 동정하던 사람인지를 전병균의 이력서의 짧은 서술에만 의거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아무튼 진씨의 도움으로 전병균은 홍콩으로 가며 이곳에서 여객선을 타고 상해로 향발한다.
이때가 1928년 1월경이었다. 전병균은 상해에서 조선혁명가 여운형(呂運亨)을 만나며 그의 집에 한동안 은신한다. 이 기간 전병균은 여운형과 얼굴을 맞대고 향후의 진로를 논의했다고 이력서에 기술하고 있다.
여운형은 중국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의 지도자로, 공산당 계열의 조선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추천한 요인이다.
전병균의 이 상해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광주기의가 실패한 후 생존한 많은 기의 인원들은 상해 등 지역에 피신했다. 대도시 상해는 엄청난 시멘트의 수림에 각양각색의 인물을 새의 무리처럼 자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전병균은 남만주의 신빈행을 선택했다. 그 무렵 신빈에는 ‘남만청년연맹’, ‘북만청년 총동맹’, ‘국민부’ 등 반일독립단체가 활약하고 있었다. 에피소드라고 할까, 이때 또 하나의 거물이 전병균의 앞에 나타난다. 국민부의 양세봉(梁瑞奉)이 그를 소속 단체에 편입시키고자 찾아왔던 것. 양세봉은 훗날 조선혁명군 사령관을 담임했던 항일명장이다.
전병균은 종국적으로 ‘북만청년 총동맹’에 참가하여 신빈 지부서기를 담임한다. 그러나 얼마 후 우여곡절 끝에 신빈을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10여 년 동안 그는 북쪽의 치치할(齊齊哈爾)과 중북부의 북경, 다시 북쪽의 하얼빈(哈爾賓), 심양(沈陽)과 중부의 서주(徐州) 등 지역을 전전한다. 선후로 차 기사, 병원 도우미, 상회 직원 등으로 있었고 한때는 일본경찰에 의해 감옥생활을 했다.
1945년 광복(8.15)이 나면서 출옥한 전병균은 북경에서 조선인 귀국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중국에는 216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광복 이후 100만여 명이 귀국했다. 또 165만 8천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으며 1945년 광복 이후 약 50만 명이 귀국했다는 다른 집계가 있다.
1947년, 신빈현이 해방된 후 전병균은 신빈현 조선인 교무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된다. 그는 민족교육의 부흥에 앞장을 서서 조선인 군중들과 함께 20개의 조선족소학교를 복구, 창립했다. 공화국이 창건된 이듬해인 1950년 전병균은 신빈현 총공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며 이어 선후로 신빈현 인민위원회 위원과 인민대표, 요녕성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미구에 소설 같은 일은 정말로 현실로 나타난다. 전병균은 북경에서 황포군관학교의 옛 교관, 북벌군의 옛 지휘관과 장장 30년 만의 상봉을 하는 것이다.
1956년, 전병균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택동(毛澤東), 유소기(劉少奇) 등 당과 국가 지도자의 친견을 받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이 장소에서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이었던 주은래(周恩來) 총리를 다시 만났다. 황포군관학교 교관부(敎官部) 주임이었던 이제심(李濟深)도 정부 부주석으로 공화국 국가지도자의 행렬에 서있었다. 북벌군의 유명한 지휘관이었던 하룡(賀龍) 원수도 또 지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옛 교관과 학생, 옛 장령과 하급 군관의 만남의 대화가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걸 떠나서 전병균의 어깨에는 더는 군 계급장이 얹혀 있지 않았다. 전병균은 동북소수민족 참관단 일원의 신분으로 천안문에 올랐으며, 군부대가 아니라 신빈현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개 과장급 직원이었다.
비록 황포군관학교와 북벌군 경력은 단 1, 2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전병균의 일대기에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풍파 때문에 전병균은 지병으로 사망한 1967년까지 애당초 옛날의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꺼려했다고 한다. 결국 전병균은 자식들에게도 전모(全貌)를 그리기 힘든 희미한 인물로 되었다.
[간 주]
네, 많은 역사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고 또 현대사의 많은 명인들이 세월 속에서 더는 찾기 어려운 미스터리의 ‘실종자’로 되고 있습니다.
“북벌군의 조선인 소대장은 왜서 실종되었을까”라는 제목으로 북벌군에 참가했던 전병균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중국의 고전명작 《서유기》는 당승 현장(玄奘, 602~664)의 천축天竺 여행을 모티브로 삼아 명明나라 때 나온 신괴神怪 소설입니다.
실제로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있었는데요, 이 신라 승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실제로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있었는데요, 이 신라 승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준(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