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2 10:47:38 출처:cri
편집:金东光

부저추신(釜底抽薪)

◎글자풀이: 가마 부(釜 fǔ), 밑 저(底 dǐ), 뽑을 추(抽 chōu), 섶나무 신(薪 xīn).

◎뜻풀이: ①솥 밑에 타고 있는 장작을 꺼내어 끓어오르는 것을 막다.②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다.③발본색원 

◎출전: 북조•북제 (北朝•北齊) 위수(魏收)『위후경판이량조문(爲侯景判移梁朝文)』

◎유래: 기원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었다. 동위의 대권은 대승상 고환(高歡)이 장악했으며 그 수하에는 유력한 조수인 후경(侯景)이라는 자가 있었다. 후경은 3만의 군사만 자기에서 맡겨준다면 장강을 돌파하여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을 사로 잡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에 고환이 10만의 군사를 주면서 하남(河南)을 지키라고 명했다. 

후경은 고환과 작별인사를 하면서 조용히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으니 만일을 방비하기 위해 대승상께서 저에게 서신을 보낼 때에는 작은 점을 찍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진위를 가릴수 있으니 간사한 무리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후경은 고환의 촉망을 받아 왔지만 고환의 아들인 고징(高澄)을 경멸해왔다. 기원 546년에 고환이 중병에 걸렸다. 고징은 후경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 아버지가 죽기 전에 후경의 병권을 몰수하려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의 명의로 후경에서 도성에 돌아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고징은 아버지와 후경간에 밀약이 있는지를 모르고 있던 차라 서신에 작은 점을 찍지 않았다. 

편지를 받아본 후경은 약속한 작은 점이 찍혀 있지 않는지라 의심이 생겼고 구실을 대어 조정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고환이 병으로 죽었으며 후경은 고징의 죽임을 당할가봐 동위에 귀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하남의 13개 주의 땅을 서위에게 바쳤으나 군대는 내주지 않고 기회만을 노렸다. 

고징은 후경이 공공연히 나라를 배반한 것을 알고는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군대를 주어 하남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중서시랑 위수(魏收)에게 후경의 배반죄장을 견책하는 문서를 쓰도록 했다. 문재가 뛰어난 위수는 재빨리 그 문서를 작성했으며 고징은 이를 곳곳에 붙이도록 명했다.

이렇게 되니 후경은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아예 남쪽의 양무제(梁武帝)에게 투항했으며 군대를 파견해 줄것을 양무제에게 청했다. 

고징은 양무제가 군대를 보내 후경을 도와주는 것을 보고는 위수에게 『위후경판이량조문(爲侯景判移梁朝文)』이라는 글을 쓰도록 했다. 글중에는 양나라가 만약 후경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잡아서 바친다면 이는 타는 장작을 꺼내어 끓는 물을 식히고 후환을 송두리채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수 있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양무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예정대로 후경을 돕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이에 모용소종이 인솔한 동위군이 계속 남하하여 후경을 지원하는 양나라군과 접전했으며 그 결과 양나라군이 크게 패했다. 이어 동위군이 그 기세를 몰아 후경의 군대를 공격하니 후경 역시 무너지고 얼마 안되는 군사들을 이끌고 양나라로 도망쳤다. 

그 이듬해 후경이 또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양나라 도성 건강(建康)을 점령했으며 양무제는 분을 이기지 못해 얼마후에 죽고 말았다. 그후 후경은 황제로 자칭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의 손에 죽고 만다. 

후에 위수가 쓴 문서중의 “타는 장작을 꺼내어 끓는 물을 식한다”는 표현은 “부저추신(釜底抽薪)"이라는 고사성어로 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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