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7 16:46:43 출처:cri
편집:金东光

덕고망중(德高望重)

 

◎글자풀이:덕 덕(德 dé),높을 고(高 gāo), 바랄 망(望 wàng), 무거울 중(重 zhòng).

◎뜻풀이: 덕성과 명망이 높다. 

◎출처: 송(宋) 사마광(司馬光) 『사입대소전찰자(辭入對小殿札子)』

◎유래: 부필(富弼)은 자가 언국(彦國)이고 북송(北宋) 낙양(洛陽)사람으로 관직이 재상반열에까지 올랐다. 80년이란 인생에 40년을 관리로 있은 부필의 한생은 파란만장했다.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난 부필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했고 점차 지식이 연박하고 그 거동이 활달했으며 비범한 기개를 보였다. 범중엄(范仲淹)이 부필을 보고는 “정말로 제왕을 보필할 현명한 인재로구나.”하고 감탄했을 정도였다. 허나 그때 부필은 “낙양재인(洛陽才子)”으로 불리우는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부필은 26살에 출사했다. 40여년간 그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으며 외교, 국방, 감찰, 가난구제 등 사무에서 큰 성과를 보였으며 관직도 점점 올라갔다. 부필은 인종(仁宗)과 영종(英宗), 신종(神宗) 3대에 걸쳐 재상직을 맡음으로써 천자가 아끼고 백관이 우러르는 명대신으로 평가받았다. 

인종 경력(慶曆) 2년(1042년)에 북방의 거란국이 국경에 둔병을 하고 남관(南關)의 넓은 땅을 내어줄 것을 송나라에 요구해왔다. 조정이 부필을 적진에 보내 담판을 하도록 했는데 부필은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주장을 펼침으로써 나라의 이익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그는 선후로 두번이나 사신행차를 했다. 첫번째 사신행차를 떠날 때는 딸이 병으로 죽은 때였고 두번째로 길을 떠날 때는 막내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받았으나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가 귀국한 후 조정은 부필의 공이 컸기에 여러 요직을 주려 했으나 그는 모두 사양하였고 취임을 하지 않았다. 

경력 8년(1048년)에 황하의 둑이 터져 홍수가 범람했다. 당시 부필은 조정의 반대파들에 의해 여러가지 비방을 받아 결국 청주(靑州)의 관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허나 홍수재해가 발생하자 부필은 관아와 사저 내어 이재민들을 안치했으며 현지 백성들에게 양곡을 기부할 것을 호소하는 방(榜)을 내 붙이고 관가의 곳간에 있던 전부의 양곡을 여러 재해지역에 보내주니 민간에서는 부필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황제가 사자를 보내 위문하고 부필에게 예부시랑(禮部侍郞) 직을 제수했으나 부필은 이는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며 기어이 사양했다. 

부필은 사람됨이 겸허하고 어질고 상냥했으며 후에 재상이 된 후에도 위세를 부리지 않았다. 수하관리들이나 백성들이 찾아와도 그는 평등한 예로 대했다. 부필은 나이가 들어서는 관직을 내려놓고 오래동안 낙양에 은거해 살았다. 어느날 그가 작은 가마를 타고 외출하다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얼굴을 보려고 했고 이로 하여 장터가 텅텅 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마광(司馬光)은 부필을 “3대를 보좌한 대신이요, 덕성과 명망이 높았다(덕고망중)”고 평가했다. 

원풍(元豊) 6년(1083년) 8월 부필이 낙양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임종에 앞서 신종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작금에 조정에 일신의 이득만을 위하는 소인들이 많아 나라에 해를 끼칠수 있으니 이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를 본 신종이 애통을 금치 못하여 조회를 3일간 나오지 않았고 제문을 지어 문상을 했으며 부필에게 태위(太尉)를 제수하고 익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송철종(宋哲宗)이 보위에 올라서는 직접 부필을 기려 “현충상덕(顯忠尙德)”비를 세웠으며 명재상이고 걸출한 외교가인 부필의 일생을 칭송하는 비문을 짓도록 대학사(大學士) 소동파(蘇東坡)에게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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