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4 13:54:1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3년 1월 1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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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중국 민족이론과 정책 연구의 대표주자 김병호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병호(金炳鎬)는 대학가에 이름난 인물이다. ‘중국 첫 민족이론 학과의 박사 지도교수’, 바이두에서 밝히는 그의 신분이다. 김병호는 중국 민족이론 학과의 대표주자이다. 그는 중앙민족대학의 긍지이요, 전국 민족대학의 영광으로 되고 있다. 참고로 중앙민족대학은 소수민족 고급인재의 요람으로, 중국에서 유일하게 56개 민족 교원과 학생, 직원을 보유하고 있는 대학이다.

중국 국무원 산하에는 특별히 국가민족사무위원회가 설립되어 있다. 중국에서 민족문제의 각별한 비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56개 민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 나라이기 때문에 민족이론과 민족정책 연구는 중국사회를 연구하는데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김병호는 중국 민족이론과 민족정책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주목을 받고 있다.

1970년 초반에 중앙민족대학 졸업을 앞두고 김병호에게 문득 ‘복음’이 내린다. 정치학부가 그에게 뜻하지 않은 제의를 해왔던 것이다.

“깜짝 놀랐죠. 저에게 학교에 교원으로 남을 의향이 없나 하고 묻던데요.”

사실상 김병호는 학업 성적이 남달리 뾰족하지 않았다. 또 수더분하고 말수 적은 성격이었다. 정치학부의 수십 명이나 되는 졸업생 군체(群體)에서 표 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가 늘 도서관에 홀로 있는 모습이 교수들의 눈에 들었다는 후문이다. 남달리 책 읽기를 즐기는 김병호의 고독한 모습에서 앞날의 유명한 학자의 모습을 미리 읽었을까?…

“그때 학교에는 민족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는 젊은 학자가 없었지요.”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앙민족대학은 많은 분야에서 학자와 교수의 단층 현상을 빚고 있었다. 민족이론과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다 노교수이었다. 실제로 그 무렵 후비 역량의 발굴과 훈련은 여러 대학에서 모두 시급한 과제로 나서고 있었다.

김병호는 행운아였다. 그러나 ‘천리마’가 아니었던들 ‘백락’인들 무슨 재주가 있었을지 하는 옛말을 새삼 상기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민족이론과 민족정책 연구는 중앙민족대학에서 역사가 아주 오랬다. 일찍 공화국 창건 초기인 1951년, 정부에서는 대학에 민족이론과 민족정책 과목을 설치하였다. 그때 이 과목은 당연히 민족간부 양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소수민족대학인 중앙민족대학에 먼저 개설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중앙민족대학은 중국의 민족이론과 민족정책 학과를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중앙민족대학에서 1987년 대륙의 대학에서 처음으로 민족이론과 정책 학과를 개설한 것은 놀랍지 않다. 이때 삼십대의 젊은이였지만 벌써 10여 년 동안 민족이론과 정책 교학, 연구에 정진하여온 김병호는 학과 설립에서 주요한 참여자로 활약하며 주요 과목을 직접 설정하고 강의한다. 중앙민족대학의 민족이론 교학과 학과건설의 발전 나아가 중국 민족이론 학과의 발전에 돌출한 기여를 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수년간의 심혈을 기울인 저서 《민족이론 통론》을 내놓는다. 총 46만자의 이 책은 민족 실체론, 발전론, 문제론, 관계론, 민족정책론 등으로 나누어 민족이론과 민족정책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중국 민족이론 분야의 첫 교과서로 되고 있다. 《민족이론 통론》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대뜸 일장 파문을 일으켰다. 학계는 이 통론을 민족이론과 정책 학과가 정식으로 설립된 상징물로 간주, 중국 민족이론과 정책 학과의 이정표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2002년, 김병호는 또 1921~1999년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 발전과정을 자세하게 서술한 또 다른 통론 《중국공산당의 민족강령 및 민족정책 통론》을 공저로 내놓는다. 이 책은 현재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연구하는데서 필수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이 책을 특별히 강택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등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증정하였다.

《민족이론 통론》, 《중국공산당의 민족강령 및 민족정책 통론》, 《중국 민족이론 연구》등 저서들은 중국 학술계의 무인지대를 개척하고 있었다.

김병호는 미구에 중국 국무원으로부터 국가특수공헌 기여자 및 전문가의 칭호를 받고 정부의 특별 장려금을 평생 수령했다. 2003년 7월에는 또 북경시 대학교 명교수로 선정되었으며 8월에는 ‘전국대학교 명교수 100명’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전국대학교 명교수 100명’은 중국 교육부가 공화국 창립 후 처음 선정한 것으로, 현직으로 강단에 서고 있는 정교수 6만여 명 등 무려 70만여 명의 교원들을 상대한 것이다. 그 특점은 저작활동과 논문발표 등 연구 실적이 많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100명 명교수 가운데서 소수민족 명교수는 단 3명뿐으로 알려진다.

“일부 경우에 민족정책과 현실은 서로 맞지 않습니다. 그 현상을 이론적으로 해석하기 힘듭니다.”

김병호는 그동안의 연구에서 봉착했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민족 이론이나 정책으로 볼 때 중국 대륙의 각 민족은 일률로 평등하다. 사실 정부에서도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인 차원에서 모두 평등함을 실시하고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민족이 민족권리를 향수하는 데는 아무래도 일정한 차별이 있었다. 각 민족의 발전수준과 지역차이, 민족적인 차이 때문이다.

“조선족을 보세요. 자기 출판사와 방송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문, 잡지만 해도 여러 개나 되지요.”

그러나 대륙에서 인구가 100만 명 이상 되는 10여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이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민족은 결코 한 둘 뿐만 아니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대등한 대우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민족평등은 대륙의 부동한 지역에서 결국 실현의 차이를 만들고 있는 거지요.”

시간은 그런 차이를 메우는 제일 효과적인 ‘약’이었다. 화제는 이때 김병호의 어린 시절로 이어졌다.

김병호가 살던 마을은 흑룡강성(黑龍江省) 연수현(延壽縣)의 한 시골 마을이었다. 동쪽 동네는 조선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고 서쪽 동네는 한족들이 군락으로 모여 살았다고 한다. 정말이지 누군가 일부러 두 마을의 가운데에 ‘군사 분계선’을 쭉 그어놓은 것 같았다.

조선족 아이들은 십리 밖의 향 소재지에 있는 조선족소학교에 다녔다. 불과 30가구의 조선족 동네였지만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20여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200여 가구 되는 한족동네에서는 향 소재지로 통학하는 아이들은 고작 둘 뿐이었고 또 형제이었다. 조선족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는 길에서 늘 그 한족 형제를 조롱하였다.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엉엉 우는 그들에게서 무언가의 우월감과 쾌감을 느꼈던 같다고 김병호가 회억했다. 물론 그런 즐거움은 번마다 오래가지 못했다. 방과 후이면 한족 형제가 의례히 마을에서 자기 또래들을 한 무리씩 불러 조선족 아이들을 두드려 패겠다고 쫓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때 두 민족의 상호 내왕과 교류가 너무 적었고 또 서로 편견이 가셔지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이라고 김병호가 콕 집어 말하고 있었다.

“대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귀향했을 때는 그런 현상을 눈 씻고 볼 수 없던데요.”

김병호의 눈앞에는 오히려 믿기 어려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두 민족 어린이들이 마을에서 아기자기 어울려 다니고 있었던 것. 그제 날 마을에서 서로 만나면 얼굴을 붉히던 이야기는 옛말로 되고 있었다.

시간은 두 민족, 두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그어졌던 ‘분계선’을 고무지우개처럼 말끔히 지우고 있었다.

어릴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일지 모른다. 산재지역 민족문제는 김병호에게 예나 제나 다름없이 큰 관심사로 되고 있었다.

1980년대 말, 김병호는 중국 동북지역에 산재지역의 민족문제를 조사하러 내려갔다. 김병호는 한 달 동안의 조사과정에 산재지역의 소수민족에게 인구유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나중에 거기에 숨은 많은 문제들을 속속 발견하게 된다.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한 후 사람들은 삶의 터인 고향마을을 떠나 관내로 대거 진출하고 있었다. 공업화 시대에 농경사회에서 도시화로 이전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만 그 ‘진통’은 벌써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친척이나 조부모들에게 맡기고 있었고, 따라서 어린이들의 교육도 문제로 나서고 있었다.

김병호는 조사를 마치고 여관에 돌아오면 일과처럼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그때는 아직 컴퓨터가 없다보니 인구변화 등 통계수치를 일일이 필산(筆算)으로 계산하여야 하였다. 그가 중국 최초로 다룬 인구유동과 사회문제는 이렇게 허술한 여관방에서 논문으로 작성되고 있었다.

인구유동은 나중에 중국에서 민족지역의 언어 유실과 풍속을 소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학자의 우려는 글에 묻어서 행간의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었다. 논문은 중국은 물론 국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뒤미처 한국과 일본에 번역판으로 발표되었다.

“그때 조선족의 새로운 거주지가 환발해만(環渤海灣)에 형성될 것이라고 처음으로 주장했지요.”

이 견해는 오늘날 더는 예측 아닌 현실 상황으로 되고 있다. 발해 주변지역의 하북성(河北省)과 산동성(山東省)의 많은 대도시에서 조선족은 개체가 아닌 군체로 되고 있으며 ‘코리아타운’을 형성하고 있는 현 주소이다.

김병호는 지난 30년 동안의 교수생활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거기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포함한다. 앞으로 중국의 민족이론민족정책과 관련하여 더욱 많은 성과를 이루고 또 제자를 계속 양성하고자 한다고 김병호가 그의 소원을 말하고 있었다.

와중에 김병호는 자신이 ‘민족학자’라는 특수한 신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민족정책은 민족이론과 정책 연구의 일부분이죠. 이 부분의 연구에 많은 정력을 들여서 민족발전에 이로운 민족정책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간 주]

네, 지금까지 중국 민족이론과 정책 연구의 대표주자 김병호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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