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5 15:47:3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3년 1월 5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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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비행기의 혼’으로 날아오른 별”라는 제목으로 한 장군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비행기의 혼’으로 날아오른 별

장군은 2015년 10월 지병으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언론에서는 일제히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내용의 추모 기사를 실었다. 실은 장군의 혼령이 그가 사랑하던 비행기를 타고 ‘하늘의 별’로 올라갔다는 표현을 써야 했다는 후문이다.

필자가 취재차로 장군을 마지막으로 지척에서 만난 것은 10년 전 그의 저택에서였다.

하늘에서 날던 장군은 흥미롭게도 그의 집을 땅에 꼭 붙여 놓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높은 아파트가 아니라 ‘땅 집’으로 일컫는 단층집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육군과 공군에는 소장, 중장, 상장 등 금별을 달고 있는 조선족 군인이 10여명 된다. 와중에 일개 군구(軍區)가 아닌 현역 군종(軍種)의 부사령관으로 있은 장성은 중장 이영태(李永泰)가 유일하다. 그는 부사령관으로 11년 있으면서 공군 지도부 3기를 겪었다.

베이징 도심의 공군 아파트단지에 이르렀을 때 이영태의 비서인 대좌가 나와서 마중을 했다.

취재에 허락된 시간은 불과 1시간 반 정도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글로 만들어 전한다.

이영태는 1930년대 중반 그가 나서 자란 고향 요녕성(遼寧省)을 떠나 길림성(吉林省) 통화(通化) 지역으로 이주했다.

“살림이 어려워서 혹시나 해서 다른 고장으로 자리를 뜬 거지요.” 이영태의 어린 기억에 담긴 그 나날들은 너무 고달팠다.

이주한 얼마 후 이영태의 집에 갑자기 화재가 났다. 달구지에 실어온 가장집물은 일조일석에 한 무지의 잿더미로 되었다. 온 집안이 바깥에 나앉게 되었다. 이역의 고달프고 힘든 생활에 기탁했던 한 올의 희망마저 재로 되고 있었다.

그때가 1939년의 추운 겨울이었다. 이영태가 10대의 나이에 금방 접어들던 때였다.

“소학교를 중퇴하고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으니까요.”

이영태는 학교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3년 만에 부득불 책가방을 내려놓았다. 지인의 소개를 받아 통화현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아침이면 별을 이고 일어나 복도와 사무실 청소를 했고, 이어 하루 종일 의사와 간호사의 잔심부름을 했다. 밤늦게 일이 끝나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옷을 벗을 새도 없이 곤드라지곤 했다.

그래도 욕지거리와 손찌검은 그림자처럼 그의 왜소한 몸을 졸졸 따라다녔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지친 몸을 끌고 가까스로 침실에 돌아간 이영태는 곧바로 죽은 듯 잠의 나락에 빠졌다. 갑자기 꿈의 세계에 벼락이 지동치고 있었다. 실은 문짝이 떨어지도록 울리는 문을 걷어차는 소리였다.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리고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짝 하고 뺨을 치는 소리와 함께 눈에 번개가 일어났다.

“이 자식, 귀가 멀었느냐? 일부러 늦장을 부리긴?”

일본인 의사였다. 심부름을 시킬 일이 있어서 찾아왔는데, 잠에 곯아떨어진 이영태가 문을 늦게 열었던 것이다. 어린 이영태는 땅에 떨어진 정신을 한참 만에 겨우 주어서 올릴 수 있었다. 정말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치하에서 사는 서러움을 어린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8.15’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이영태는 동북민주연군에 가입했다. 병원 경력을 갖고 있던 이영태는 요동군구 위생부에 전근되었다. 이영태는 동북에서 전투가 제일 치열하고 어렵던 시기 군구의 표창을 수차례나 받았다. 그는 어느덧 어린 청소부로부터 전쟁의 시련을 겪은 직업군인으로 되고 있었다.

1949년 8월, 중국 공군학교가 육군 부대에서 비행사를 모집했다. 이영태는 신체검사와 문화시험을 통과하고 항공제4학교에 입학했다. 공화국 제1진의 예비 비행사로 된 것이다.

마치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뒤미처 이상한 별명이 이영태의 뒤를 따라왔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비행기의 혼을 타고 났나 봐!”

항공학교는 이름처럼 하늘의 ‘천서(天書)’를 읽는 학교였다. 공기동력, 비행원리, 비행기의 구조, 기상학, 통신학… 소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이영태에게 하나하나 모두가 난해한 ‘천서’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실 항공학교에서 미래의 공군의 선두주자는 이때부터 본색을 드러낸다.

이영태는 항공학교에서 언제나 제일 먼저 일어나서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드는 학원생이었다. 일부 학원생은 그의 뒤를 따르다가 나중에 하나 같이 손을 들었다.

“이 사람은 비행기를 몰기 전에 비행기에 미쳤다니까.”

항공학교에서 이영태는 대장과 공산당 지부 서기를 담임했다. 졸업할 때 이영태는 1등공과 2등공을 각기 1차씩 기입했다. 항공학교가 양성한 비행사 가운데서 그는 단연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이에 따라 항공학교에서는 학제를 대폭 줄였다. 예정된 비행사의 비행시간 1백 시간도 62시간으로 줄었다. 그해 10월 이영태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제4사단의 12연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51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은 ‘항미원조(항미원조抗美援朝)’에 투입되며 미구에 중국 공군 사상 첫 공중전을 기록한다.

이때 중국 공군 비행사는 평균 비행시간이 겨우 2백시간 정도였고 또 제트기의 비행시간은 20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애송이 비행사의 ‘적수’는 2차 세계대전의 세계를 겪었고 또 ‘세계 공군의 강군’이라고 불리는 미국 공군의 베테랑 비행사였다.

1951년 9월 25일, 이날은 이영태의 군 경력에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된다.

“그날 처음으로 공중전에 참가했지요.” 이영태는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회억하고 있었다.

그날 미군은 112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출격시켰고, 중국의 ‘지원군’은 16대의 제트전투기를 발진시켰다는 후문이다. 이영태가 제일 먼저 전투기 중대를 인솔하여 미군의 F-84 폭격기를 공격했다.

조선전쟁 때 투입된 전투기는 제1세대 전투기로 대표적인 기종은 소련제 MIG-15와 미국제 F-86 제트전투기였다. 이 전투기는 모두 근거리 격투를 작전방식으로 삼고 있었고 비행사의 비행기술이 격투의 관건이었다.

이날의 공중전에서 이영태의 전투기는 맨 먼저 날개가 명중되었다. 기계부분도 망가져 포가 ‘벙어리’로 되었다. 또 4대의 F-86 전투기가 그를 목표물로 삼아 날아왔다. 이영태의 일대기를 적은 글들은 모두 이영태의 전투기가 선후로 8대의 F-86 전투기에 의해 포위되고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영태의 전투기는 드디어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인터뷰 도중에 필자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 “비행기가 폭발될 위험이 있었겠는데요, 왜서 뛰어내리지 않았지요?”

이영태는 별로 생각지 않고 대답을 잇고 있었다. “아직 조종이 가능했는데요, 뛰어내리다니 말도 안 되지요. 또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영태는 파손된 비행기의 기수를 아군 비행장으로 돌렸다. 미군 전투기의 포위와 공격을 뚫고 돌아오는 그 길에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계속되었다. 드디어 비행기는 아군 비행장에 조마조마하게 바퀴를 내렸다.

정비사들은 비행기를 점검하고 나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적 그 자체였다.

비행기 몸체와 날개, 엔진, 고리날개, 기름통, 바퀴 부분 등 곳곳에 30여 발이 격중되어 무려 56곳이 파손되었다. 조종실 덮개에도 큰 ‘바람’ 구멍이 생겨 있었다. 문자 그대로 만신창이었다.

첫 공중전에서 상대의 전투기를 격추하지 못했지만 비행기가 격상된 후 이영태가 보인 초인간적인 기질과 뛰어난 비행술은 주변의 갈채를 받았다. ‘공중탱크’라는 이 별명은 이때부터 이영태의 또 다른 이름으로 되었다.

진짜 ‘공중탱크’였다. 그 후 이영태는 F-86 전투기 4대를 격추하는 ‘탱크’의 본색을 드러낸다. 이로 하여 중국과 북한 공군연합사령부와 정치부로부터 1등공을 받으며 북한 정부에서 수여한 2급 독립훈장과 3급 국기훈장을 수여받았다.

남정북전(南征北戰) 40년의 발자취

1953년 7월, 조선전쟁의 포성이 마침내 멈췄다. 그때부터 장장 40여 년 동안 이영태는 공군부대를 따라 남정북전하면서 중국 대륙의 곳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공군 고위급 장령으로 있을 때 이영태는 늘 오지의 변방과 섬에 있는 공군부대를 찾아보았다. 1982년, 이영태는 ‘세계의 지붕’ 티베트에 시찰을 갔으며, 세계적으로 해발고가 제일 높은 칸바레의 레이더 관측소에 올라갔다. 이때 이영태는 64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관측소의 군인들을 위해 특별히 텔레비전 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구석구석 배려했다. 오로지 하늘 아래 흰 눈을 이웃하여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군인들은 그들의 수장에게 감격해마지 않았다.

그동안 이영태가 작전비행, 전쟁준비연습과 훈련, 특별전용기 관리 등 여러 과업을 수행한 경과를 여기서 글로 일일이 적을 수 없는 유감이 있다.

그러나 조선전쟁 초기의 대대장으로부터 연대장, 사단장, 부군단장, 군구 공군 부사령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부사령관으로 이어지는 상승 그래프에서 이영태의 화려한 작전수행 과정과 결과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지 않을지 한다.

1959년 10월 1일, 공화국 창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첫 열병식(閱兵式)에 공군의 전투기가 ‘사열 대열’을 지어 천안문 위에 일제히 떴다. 이때 공중 ‘사열 대열’을 만든 25대의 MIG-19 제트전투기는 이영태가 직접 지휘, 훈련했다. 1984년 공화국 창립 3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두 번째 열병식에도 이영태가 공군 사열대오의 지도조장을 담임했다.

“그날 기후조건이 좋지 않아서 가시도가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전투기는 예정된 시간에 순조롭게 천안문을 날아 지났지요.”

마치 며칠 전 집안에서 생긴 일상사를 이야기 하 듯 평온한 어조였다.

MIG-19 제트기는 당시 1.3마흐의 비행속도를 기록한 초음속 전투기이다. 1초에 음속 340m를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비행 대열이 사분오열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현재로선 비행 성능이나 통신설비가 발달하여 부족한 점을 많이 보완할 수 있었지만 실은 그때 그 시절까지 비행기 군체의 동일한 시간대의 동일한 공중구역 동시 비행은 넘기 어려운 하나의 과제로 되고 있었다.

1980년대, 국가의 사업 중점은 경제건설에 옮겨갔다. 이영태도 항공차원에서 나라의 경제건설을 지원했다. 1986년, 이영태는 해당 부문을 협조하여 중국연합항공회사를 세워 중국의 민간항공 발전에 기여를 했다.

1993년 12월, 이영태는 48년간의 군인생활을 마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이라는 직무에서 새로운 정치 여정을 시작했다. 푸른 하늘을 날던 마음은 새로운 ‘전투기’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제8기,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워원회 위원으로 있으면서 이영태는 선후로 20여개의 의안을 내놓았다. 그의 제안으로 ‘중국민용항공법’이 수정, 보충되기도 했다.

두 번째 고향 통화는 이영태의 마음 속 한 귀퉁이에서 떠난 적 없었다. 통화는 푸른 하늘에 날아예는 한 대의 ‘전투기였다.

이영태는 고향에 조선전쟁 기념물인 제트전투기를 보내 역사현장을 만들도록 했다. 통화현의 일부 중학교와 소학교의 어려운 사정을 접하자 거액의 기부금을 알선하기도 했다. 2004년, 통화현 조선족노인협회가 설립될 때 이영태는 또 협회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명예회장을 맡았다.

“사회를 위해서 힘이 닿는 일들을 하고자 합니다. (기회가 되면) 지역사회에 더 많이 내려가서 조사하고 실제 문제를 해당 부문에 반영하고자 합니다.”

[간 주]

네, 이영태 장군은 은퇴한 후 하늘에서 내려온 ‘별’로 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비행기의 혼’으로 날아오른 별”라는 제목으로 한 장군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명나라 때의 불교전적인 《신승전神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의 동생이 (신라) 본국에서 새로 왕이 되었으며, (왕은) 그 자리가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내 죽이고자 했다.”고 합니다. 신라 왕의 암살 명부에 오른 이 승려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신라 왕의 암살 명부에 오른 승려의 이름은 무엇이겠습니까.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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