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8 16:19:16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3년 1월 26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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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그림의 저쪽 세계에서 수행하고 있는 기인(奇人)” 이런 제목으로 한 화백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림의 저쪽 세계에서 수행하고 있는 기인(奇人)

노인의 세계는 고작 2,30평 크기의 작업실이 전부였다. 노인은 날마다 그곳에서 동쪽에 뜨는 해를 맞았고 또 날마다 그곳에서 서쪽에 지는 해를 바랬다. 아니, 언제 해가 뜨는지 또 언제 해가 지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노인은 날마다 눈만 뜨면 선지(宣紙)에 쉼없이 붓을 달렸다. 그림 그리기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노인의 삶의 일상으로 되고 있었다.

작업실에는 말 그대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아아히 높은 히말리아 산이 있었고 천리 고비사막이 있었으며 뉘엿한 황토고원이 있었다. 벽에 줄느런한 거폭의 그림들은 중국의 대표적인 산과 강, 사막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중화강산도(中華江山圖)’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거의 다 궤에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걸어놓을 자리가 너무 부족해서요.”

작품은 내년 말까지 완성될 예정이며 최종 2,000m에 이른다고 한다. 정말이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희대의 작품이었다.

노인의 작업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뉘라고 할 것 없이 거창한 ‘중화강산도’의 앞에서 감탄은 물론 무서운 전률을 느낀다. 미상불 그림의 어마어마한 량도 그렇거니와 전문가들을 놀래는 독특한 그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그림의 주인인 김경모(金京模)는 도를 닦는 수행자처럼 언제나 고요한 모습이다. 실제로 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장장 10년을 하루같이 작업실에서 고독한 수행자로 보냈다고 한다.

어쩌면 진부한 얘기가 아닐지 한다. 성공한 예술인이라면 응당 그러하듯 김경모 역시 그림을 굉장히 즐겼던 그림소년이었다.

김경모의 말을 그대로 빈다면 그때는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담이나 벽, 문짝 등 그림을 그릴만 한 곳이면 곧바로 화판이 되였고 연필이나 분필 지어 숯도 그림을 그리는 붓으로 되였다. 그 시절 그림책에서 접할 수 있었던 군함이며 대포, 병사와 장수 등이 다시 소년의 “화판”에 등장하여 일장 “전투”를 벌였다.

초중에 다닐 무렵 김경모는 동북로신(魯迅)문예학원의 미술반 초선(初選)에 선정되는 기쁨을 부모에게 선물한다. 이 문예학원이 바로 훗날의 유명한 로신미술학원 전신이다. 그런데 식구들은 이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한숨을 톺아야 했다. 면접을 가야 했는데, 도무지 차비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일반 노동자의 월급은 20~30원, 10원이면 쌀을 80근이나 살 수 있었다. 서발 막대기 휘둘러도 거칠게 없는 살림형편에서 차비 10원은 아름찬 액수였다. 나중에 김경모는 고중에 입학한 후 인차 학업을 포기하고 직장을 찾기에 이른다. 그때 학교의 추천으로 흑룡강성(黑龍江省)지질국 산하의 흥안령(興安嶺)지질대대에 배치, 이어 감숙성(甘肅省)지질국 산하의 주천(酒泉)지질탐사대 대원으로 전근되였다.

김경모는 입사한 첫날 웃지 못 할 에피소드를 만든다. 화강석의 이야기가 나오자 오히려 화강석이 뭔가 하고 반문했던 것이다. 기실 화강석은 굳어진 모양이 바위나 산봉우리를 이루고 있어서 평소에 흔하게 볼수 있는 암석이다.

그때부터 김경모는 몇 해 동안 짬만 있으면 표본실에서 광물 기초지식을 닦았다. 휴일에도 고향 하얼빈(哈爾濱)에 돌아가지 않았다. 땀의 결실이 있었다. 썩 뒤의 이야기이지만, 그는 지질탐사대에서 지질학과 관련한 저서를 여러 권 펴낸 몇몇 사람의 하나로 되였다. 그래서 지난 세기 80년대 김경모는 감숙성지질국 제1진 공정사의 명단에 이름 세 글자를 당당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질탐사대에서 김경모가 긍지를 느끼고 있는 성과는 이 일이 아니다. 1955년부터 중국에서는 비밀리에 핵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원자탄을 만들려면 단연 우라늄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따라 지질탐사대의 작업은 우라늄광석을 탐사하는데 주목표를 겨냥하고 있었다.

“극비 작업이라서 탐사대원 1명에 해방군 병사 2명이 근접수행을 했어요.”

그때 탐사작업은 주요하게 지표의 방사성 이상현상을 발견하고 추적수색을 진행하여 진상을 밝히는 것이었다. 솔직히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따분한 작업이였다.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비켜가지 않았다. 김경모가 감숙성 경천현(涇川縣) 일대의 산골에서 사암형(砂巖型) 우라늄광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때 그 고장의 사람들은 우라늄성분이 들어있는 바위로 담을 쌓고 지어 집을 짓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방사성의 영향을 받아 이름 모를 병을 앓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수명이 별로 길지 않았지만 무슨 원인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김경모의 감숙성 최초의 우라늄광석 발견은 지질국을 들썽하게 만들었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서부의 고비사막에 솟아오른 버섯구름의 아래에는 그렇게 그림소년이 하나 서있었다.

1979년, 공화국 창립 30주년에 즈음하여 감숙성 정부는 김경모 개인에게 우라늄광석의 발견 공적을 치하하는 표창장을 내렸다. 감숙성 방송과 신문 등 언론매체는 다투어 김경모의 사적을 실었다.

이때 언론매체는 하나같이 ‘청산의 매’를 제목으로 만들었다. ‘청산의 매’는 그 무렵 김경모가 연변에서 출간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지난 세기 60~70년대 러시아와 중국의 분쟁을 배경으로 지질탐사대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삼고 있다. 《청산의 매》는 초판인쇄가 무려 6천권, 그 시절 조선족문단에서 소문을 놓은 몇몇 소설의 하나로 되었다. 어쨌거나 중국의 산하를 매처럼 넘나든 탐사대원 김경모에게 ‘청산의 매’라는 이름이 적격으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김경모는 예나 제나 다름없이 그냥 선과 색채의 그림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소설의 상상세계도 그의 그림세계의 여정에 잠깐 등장했을 따름이다. 수자와 화학부호의 논리적 세계는 더구나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였다.

“부끄럽지만요, 저는 저의 핸드폰 번호도 제대로 기억을 못해요.”

실제상 그가 지금까지 내놓은 지리학 저서도 그림과 한데 이어져 있다. 1983년 그와 동료가 공저로 지질출판사에서 펴낸 학술저서는 《야외지질스케치(野外地質素描)》이며 1984년 과학출판사에서 출판한 그의 학술저서는 《그림으로 읽는 지모유형(地貌類型圖說)》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땅이 어떤 모습인지 그림으로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가지각색의 지모(地貌)는 모두 그에게 얻기 힘든 그림 소재로 되였다. 김경모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화첩을 펼쳐들었다. 황토고원 그리고 고원을 흘러 지나는 황하, 구렁이처럼 산마루를 기어가는 장성… 차창 밖을 스쳐 지나는 경물 모두가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았다. 어느덧 김경모의 그림재간은 동네방네 파다히 전했다. 그때 그 시절 주천지역의 최대의 모택동 화상(畵像)도 김경모의 작품이었다.

놀랍게도 김경모는 그림세계에서 스승이 없는 독학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그림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일부러 미술전시회에 참석한적 있다. 아내가 살고 있는 요녕성(遼寧省) 무순시(撫順)시에 전근했던 지난 세기 80년대의 일이였다.

“저의 작품이 전시회의 1등과 2등, 3등을 석권한 겁니다. 그때부터 그림에 자신감을 얻었고 더는 전시회에 출품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전시회에 출품한 그림은 유화였고 훗날 그리기 시작한 ‘중화강산도’는 수묵화였다. 수묵화는 김경모가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시도한 화법이다. 그는 여러가지 착상을 시험하던 끝에 2000년도에 비로소 자신만의 풍격을 찾게 되였다. 그는 이번에는 수묵화 작품의 완성도와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북경 ‘인밀일보 신주서화원(神州書畵院)’을 찾았다. 그러자 서화원의 원장이 직접 특약화가 초청장을 들고 김경모를 찾아왔더라고 한다.

이때부터 김경모는 작업실에 ‘은둔’하고 오로지 ‘중화강산도’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중화강산도’는 단시간의 완성이 절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이 때문에 잡념이 섞이면 잘 그릴수 없습니다. 물욕에 젖으면 마음이 들뜨니까요.”

어쩌면 “은둔자”의 신분으로 될 운명이 아닐지 한다. 김경모는 어찌어찌하여 일명 당안(檔案)이라고 하는 개인의 인사 기록부마저 분실했다고 한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김경모는 오갈 데 없는 사람으로 되였다. 이때 그의 마음에 버팀목으로 된 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결국 그림소년으로부터 지질학자, 소설가, 정부관원 등 과정을 거친 후 순수한 화백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마냥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월급이나 연금보장이 없는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구경꾼가운데서 제가 시작한 ‘중화강산도’를 보고 지원자가 나서더군요.”

김경모가 작업실을 차린 송장(宋庄)은 북경 동쪽 근교의 통주(通州)에 위치한 유명한 화백마을이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거개 예술인이거나 예술에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며 통상 예술작품 감상수준이 상당히 높다. 와중에 김경모의 그림을 보고나서 지원자로 나선 사람들이 무려 100명으로 헤아리고 있단다. 그들은 십시일반으로 지금까지 김경모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작업실 임대료의 대여, 선지와 물감의 제공은 물론 김경모가 입고 있는 옷도 지원자들이 산 것이라고 한다. 또 김경모의 건강을 염려하여 무료검진을 다녀간 의사도 있었다.

“저분이 남들의 승인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요.” 아내 안진영은 인터뷰 도중에 이렇게 그간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냈다.

“인제야 저분이 하고 있는 작업의 의미를 알 것 같구요. 함께 보람을 느낍니다.”

솔직히 안진영은 그림세계에 파묻혀 살고 있는 남편이 때때로 야속스럽기도 했단다. 그런 남편 때문에 안진영은 결혼 후 장장 40년 동안 거의 혼자서 가정을 꾸려야 했던 것이다. 실로 성공한 남편의 뒤에는 아내가 서있다는 속담을 상기하게 했다.

김경모는 두루마리 그림 ‘중화강산도’를 완성하는 대로 전부 사회에 기부할 예정이다. 일부 전문인 지원자들은 벌써 ‘중화강산도’를 영구전시하기 위한 문화광장의 설계와 기획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김경모의 그림 작업은 이로써 끝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반도의 대표적인 풍경을 하나로 집대성한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 백두산과 금강산, 한라산 등 명산을 포함, 최종 80m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간 주]

네, 반도의 3천리 강산이 인제 대형 화폭으로 재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기인(奇人)의 그림세계의 여행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림의 저쪽 세계에서 수행하고 있는 기인(奇人)” 이런 제목으로 한 화백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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