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3 09:47:1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3년 2월 2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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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모택동 주석의 보건주치의 천련필”라는 제목으로 중남해에 있었던 한 유명한 의사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모택동 주석의 보건주치의 천련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천련필(千連弼) 옹은 북경의 305병원의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때가 2005년 여름이니 꼬박 11년 전의 일이다.

중남해(中南海)의 바로 뒤에 위치한 305병원은 한때 국가 지도자들이 전문 이용하던 특수한 병원으로 일찍 1969년에 설립되었다. 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도 임종 전에 이 병원을 사용했다.

천련필 옹은 한때 305병원의 부원장이었다. 세상사(世上事)는 정말 무상(無常)하다. 그가 어찌어찌하여 환자의 신분으로 이 병원에 다시 들어올 줄 누군들 알았으랴!

단독 병동은 10여 평의 크기였지만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 환자인 천련필 옹과 간호인인 아내 둘만 있기에는 너무나 한적한 공간이었다. 위문차로 병동에 들린 기자는 오랜만의 ‘방문객’으로 되고 있었다. 

세정(世情)의 성쇠(盛衰)와 인정의 반복은 그렇게 코를 찌르는 소독수의 냄새와 더불어 병동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날 노인은 정신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제 날 인터뷰를 받으면서 이름은 ‘만년필’이 아니고 ‘천련필’이니 제발 헛갈리지 말라고 농담을 하던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정말 슬펐다. 노인은 벌써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천련필 옹은 국가기밀 소유자이다. 중남해에서 20년 동안 근무하면서 모택동(毛澤東) 주석의 보건주치의로 있었고, 그 때문에 보고 듣고 겪은 많은 일들을 영원히 함구해야 했다.

실제로 지난 세기 90년대 천련필 옹을 처음 만나면서 이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가 기자를 만나는 자체를 꺼려했던 것이다. 지인의 소개와 부탁 때문에 얼결에 취재를 허락했다가 금방 후회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자가 취재를 단념하라고 하면서 일부러 전화를 꺼놓았다. 나중에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지인을 통해 수소문하고 어렵게 찾아갔다. 베이징 도심 구역에 위치한 이 17층 아파트에는 모두 중남해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뜰에 들어선 후 또 엘리베이터 도우미가 ‘불청객’의 신분을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있었다.

천련필 옹은 오랫동안 베이징에 살고 있는 3명의 조선족 사람과만 왕래가 허락되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사람과 취재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기실 모든 게 기우(杞憂)였다. 농담을 즐기는 천련필 옹과 이웃집 할아버지를 만난 듯 금방 대화를 쉽게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천련필 옹은 많은 얘기를 무척 꺼리고 또 아끼고 있었다. 그날 오후 ‘귀동냥’한 이야기는 수면 아래에 많은 것을 감춘 빙산의 일각이었다.

“명태가 아니고, 돌이 많이 나던 산골이었지.” 천련필 옹의 고향 이야기는 농담에 실려 시작되고 있었다.

천련필 옹은 1924년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살던 명천군상가면 연덕동은 ‘명태’가 나지 않고 돌밭만 널린 험한 산골이었다.

“그저 감자와 보리농사로 풀칠을 면할 수 있는 정도였어.”

예로부터 “소 팔아 자식 공부”라는 격언이 있다. 

고학을 작심한 천련필은 현해탄을 건넌다. 그때가 1938년, 겨우 14살이 되던 해였다.

천련필은 일본에서 보습학교와 영어학교를 마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도쿄의과전문학교(지금의 도쿄의학대학)을 지원했다.

“어머니가 인후병으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지. 그래서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그토록 바란 거야.”

종국적으로 대학의 문턱을 넘어섰지만 거기까지 걸음마다 눈물과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천련필은 매일 새벽 3시면 기상해서 우유와 신문 배달에 나섰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은 푼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에는 판판 부족이었다. 더구나 대학입시 공부를 시작한 그는 공부 때문에 부득불 아르바이트 시간도 줄여야 했다.

시험은 눈앞에 박두했고, 아르바이트를 할 여유가 없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피라도 팔아야 했다.

“그런데 ‘조센징(조선인)’이라고 피검사를 할 때 일부러 50g이나 더 뽑는 거야.”

피가 터지도록 울분이 치밀었지만 씹어 삼켜야 했다. 그들과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실은 신문과 우유 배달비 인상을 두고 파업을 벌였다가 결국 일자리면 빼앗긴 그들 ‘조센징’이었다.

나라를 잃은 설음은 이역에서 홀로 떠도는 어린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45년 5월, 천련필은 마침내 도쿄의과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이때 전쟁의 패배를 앞둔 일본은 대규모적인 징벌을 단행하고 있었다. 의술을 배운 20대의 젊은이 천련필은 당연히 징병대상 1호 인물이었다.

“고학 8년으로 바꿔온 의술이 아닌가, 나라를 빼앗은 그놈들에게 고이 갖다 바칠 수는 없었어.”

천련필은 급급히 귀국선에 올랐다. 부산에서 하루 묵고 서울에 올라갔다. 서울시 종로 탑골공원에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정오의 사이렌 소리에 맞춰 시민들이 행하는 묵념(黙念) 의식을 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았어. 일본에서 하지 않는 묵념 의식을 서울에서 보게 된 거야.”

충격적인 일은 또 있었다. 징병 통지서가 그의 뒤를 따라 서울에 도착했던 것이다. 천련필은 곧바로 고향 함경북도로 향발하는 열차를 잡아탔다. 그런데 텅텅 빈 집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은 살길을 찾아 북쪽의 해림(海林)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해림은 이주민들이 집거한 곳이다.

천련필은 해림에서 일본 항복을 맞이했고 그해 11월 동북민주연군에 가입했다.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그때부터 국공내전의 전장에는 천련필의 왜소한 몸이 나타났다. 그는 ‘1급 기술능수’, ‘갑급 사업모범’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었고 불과 몇 년 후 베이징으로 진출할 때는 좌급 군의로 진급하고 있었다.

공화국이 창립된 두 달 후 천련필은 중남해로 소환되었다. 천련필이 전근 명령을 받은 데는 그가 이에 앞서 수행했던 중남해의 방역임무와 무관하지 않았다. 1949년 봄, 베이징에서 을형 유행성 뇌막염이 돌았다. 중남해에서도 다수의 인원이 전염되었다. 와중에 백씨 성의 모택동 주석 비서를 망라하여 5명이나 숨지는 참사가 빚어졌다. 천련필은 중남해 방역작업에 참석,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여러 제안을 내놓았으며 이 제안은 중남해에 수용되어 즉시적으로 효과를 보았다.

그때 중의학을 하는 의사는 많았지만 천련필처럼 서양의학을 전공한 의사는 드물었다.

모택동 주석을 비롯한 중앙 지도자들의 보위사업은 정치보위와 경호를 맡은 무장보위 그리고 건강을 돌보는 보건보위 등 세 가지로 이뤄지고 있었다. 천련필은 보건보위를 책임진 중앙종대 경위연대 위생대(衛生隊)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보건만 아니야, 보건과 경호를 합친 걸 보건보위라고 할까?” 천련필 옹은 이렇게 ‘보건보위’라는 이 낯선 개념을 해석한다.

그때는 물론 상당 기간 중남해에서는 처방전에도 지도자들을 실명으로 밝힐 수 없었다고 한다. 모택동 주석은 101번, 주은래 총리는 107번… 하는 식으로 부호로 적었다. 의사들이 낸 처방전은 최종적으로 천련필 옹을 거쳐야 사용할 수 있었다.

중남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늘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의 특수한 생활환경 때문에 몸에 배인 나쁜 생활습관에서 비롯되었고 또 의사와 약품이 부족하여 미처 치료를 하지 못한 탓으로 병을 길렀던 것이다.

천련필 옹은 의료인원들과 함께 중남해의 환경위생과 음식위생, 개인위생을 관리했다. 중남해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학질, 옴 등 전염병은 드디어 종적을 감췄다.

뒤미처 천련필 옹은 선후하여 중앙경위연대 당위원회 위원, 후근부 부장, 위생과 과장 등 직무를 맡는다. 신뢰가 깊어지는 만큼 과업도 점점 막중했다. 나중에는 모택동 주석과 기타 중앙 지도자들을 상대한 약품 관리를 맡았으며 또 모택동 주석의 건강을 직접 관리할 과업이 늘어났다.

“모(택동)주석의 보건주치의를 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어.” 천련필 옹은 그때 갖고 갔던 호기심을 한마디로 풀어버리고 있었다.

“그분은 큰 병으로 앓는 일이 없었어. 또 특별하거나 까다로운 요구가 없었거든.”

모택동 주석은 장신에 건장한 체구였다. 잠깐, 항간에는 모택동 주석의 키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이 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을 직접 관리한 천련필 옹의 구술이라면 신빙성이 제일 크지 않을지 한다.

“모(택동)주석은 대체로 아주 건강했어. 70세의 고령에도 장강을 헤엄칠 정도였으니까.”

모택동 주석은 술은 전혀 금물이었다고 한다. 외국 지도자를 접대할 때도 과일즙을 마셨다. 대신 담배를 하루에 50대 이상 태우는 지독한 애연가였다. 말년에 기관지 천식과 폐기종으로 고생하게 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택동 주석의 식사메뉴는 끼니마다 잡곡으로 만든 음식 한 가지(一粗), 입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 한 가지(一細), 생선이나 육류로 만든 음식 한 가지(一暈), 야채로 만든 음식 한 가지(一素), 국 한 가지(一湯)이었다고 한다.

입쌀은 북경 옥천산(玉泉山)의 정수(淨水)로 재배한 경서미(京西米)를 먹었는데, 1년에 50㎏짜리 가마니 두 개 정도면 충분했다고 한다. 현미만 먹었으며 씹지 않아도 소화가 잘 되도록 쪄서 먹은 게 약간 특이했다.

“믿기질 않지? 조선인하고 비슷한 음식습관을 갖고 계셨어.” 천련필 옹이 밝히는 비사(秘事) 같은 이야기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개고기 요리가 모택동 주석의 이른바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늙은 개의 고기는 위산의 과도한 분비를 자극한다고 해서 광동(廣東) 일대에서 사육하는 발바리를 선택, 그것도 3,4㎏짜리로 골라서 내장과 머리를 제외한 부분을 쪄서 요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끼니마다 고추를 빼놓지 않고 요리마다 고추를 넣어 매콤한 맛을 즐긴 것도 조선인의 전통적인 음식습관과 비슷했다. 실은 매운 음식을 즐기는 호남(湖南) 사람들의 습관이었다.

모택동 주석은 저녁 7시에 기상하여 세수나 목욕 대신 증기로 소독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집무를 시작했다. 일을 마치면 곧바로 독서를 했다고 한다. 책을 남달리 좋아해서 집무실은 물론 잠을 자는 침대에도 책을 쌓았고 지어 화장실에도 책을 비치했다. 보통 아침 6,7시에 일을 마쳤으며 낮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수면을 취했다.

현란한 광채에 둘려있는 위인은 기실 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중남해에서 천련필 옹은 이 위인의 참모습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1969년, 천련필 옹은 가족을 데리고 한주일 내로 북경을 떠나 지방으로 가라고 하는 전근령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간 천련필 옹은 대륙 중부의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에 있는 해방군 153병원 부원장으로 있었다.

“‘이게 기회가 된 거야. 중남해에 그냥 있었으면 민간 비방을 얻기 힘들어.” 천련필 옹은 소탈하게 웃고 있었다.

권력의 중심인 중남해에서 무상함을 읽었던가. 천련필 옹은 지방 전근을 또 다른 기회로 삼고 있었다. 역고문(易古文)을 읽혔고 동의학 수련을 했으며 비방을 갖고 있는 민간 명의들을 찾아 험한 산발을 탔다.

천련필 옹은 그 한 사람의 작업에 그치지 않았다. 병원 직원들을 데리고 많은 연구대상에서 성과를 냈다. 그의 관여 하에 병원은 그 시절에는 드물게 50여 편의 의학논문을 발표했고 약효가 좋은 유수의 약을 만들어냈다. 은행나무 잎을 주원료로 만든 고혈압 치료약과 목화껍데기로 만든 기관지염 치료약은 국내 약학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끊어진 손가락을 잇는 약도 이때 발견하고 만들어낸 거야.”

대별산(大別山) 지역의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천련필 옹이 직접 발굴한 이 비방 약이었다. 비방 약을 토대로 삼아 정주시 해방군 153병원은 나중에 단지재식과(斷指再植科)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특이한 기술은 현재 153병원의 유명한 ‘상표’로 되어 전국에 소문을 놓고 있다.

1979년, 천련필 옹은 등소평(登小平)의 직접적인 배려를 받아 베이징에 돌아왔다. 중앙 지도자들을 상대한 305병원 부원장으로 안치되었다.

이때 천련필 옹은 일찍 1960년 무렵부터 시작했던 비방 연구에 다시 몰입했다. 와중에 중국 고대의 처방전을 연구, 정리하면서 장수와 관련한 논문 10여 편을 내외 학술지에 발표했다. 1985년 경, ‘비대증의 한방치료’라고 이름을 단 논문이 완성되었다. 후한(後漢) 시대의 《상한론(傷寒論)》 등 고대 의서와 명․청(明․淸) 황제와 황후의 비대증 치료과정을 연구한 성과를 토대로 저술한 논문이었다. 논문은 비대증을 지방 축적과 수분 침체, 내분비 문란으로 나누고 비대증의 발생원인과 그 유형에 따른 치료법을 천명했다.

비대증 치료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성과물인 이 비방은 훗날 한 재미 사업가에 의해 천연효소 식료품으로 개발되어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이 천연요소의 식료품은 장백산 지역의 10여종 약재로 만들어졌는데, 1990년대 160여개 나라가 미국 뉴욕비대증연구센터에 보낸 보건품(保健品) 가운데서 단연 첫 자리를 차지했다. 나중에 미국과 일본, 스페인, 러시아, 독일, 영국 등 60여개 나라에 팔리는 호황을 누렸다.

천련필 옹은 이 비방을 돈 한 푼 받지 않고 연변지역의 모 제약공장에 제공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창턱 위의 화분에 겨끔내기로 자라던 화초가 잠깐 화제에 올랐었다. 기실 화분에 심은 건 관상용 ‘화초’가 아니라 약초였다. 손가락 길이만큼 자랐던 이 약초가 특별히 인상에 남았다. 천련필 옹이 귀중한 난을 다루듯 수건으로 먼지를 조심스레 닦고 있었던 것. 남방 출장을 다녀오는 지인에게 부탁해서 힘들게 얻은 약초라고 했다.

지금 기억하건대 천련필 옹은 이 약초를 ‘약파’라는 의미의 ‘사계총(四季蔥)’이라고 부르고 있은 것 같다.

“이걸 넣어서 조합하려는 비방이 하나 있어. 어서 실험하고 싶은데 빨리 자라줘야 하지.”

[간 주]

네, 그때만은 천련필 옹은 비방을 무수히 만들고 있던 이른바 ‘황궁’의 ‘어의’였으며, 병약한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모택동 주석의 보건주치의 천련필” 이런 제목으로 중남해에 있었던 한 유명한 의사의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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