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풀이: 바 소(所 suǒ),향할 향(向 xiàng), 바람 풍(風 fēng), 쓰러질 미(靡 mǐ).
◎뜻풀이: ①(바람이 불어) 가는 곳마다 초목이 쓰러지다. ②(군대 따위가) 가는 곳마다 적을 무너뜨리다. ③대적할 자가 없다. 무적.
◎출전: 당(唐) 방현령(房玄齡) 등『진서•왕준전(晉書•王濬傳)』
◎유래: 진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즉위하고 나서 강동(江東)의 오(吳)나라를 병탄하려 했다. 그는 왕준(王濬)에게 전함을 만들게 하고 오나라를 진공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왕준이 촉군(蜀郡) 익주(益州)에서 전함을 만들기 시작했다. 왕준이 장강 상류에서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무조각이 물에 떠내려 왔으며 오나라 태수(太守) 오언(吳彦)이 이를 보고는 오왕(吳王) 손호(孫皓)에게 고했다. “진나라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니 반드시 건평(建平)의 주둔군을 증가해야 합니다. 진나라가 건평을 점령하지 못하는 한 장강을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손호는 오언의 제안을 무시하고 향락만 일삼으면서 나라의 안위는 뒷전으로 했다.
7년 후 오나라 정벌 준비를 마친 왕준이 왕에게 출전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오나라 주인인 손호가 황음무도하여 국내에서 원성이 자자하니 이는 오나라를 정벌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제가 만든 배들은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 고장이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의 나이 이미 70에 이르러 어느날 죽을지도 모를 일이오니 폐하께옵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 주시옵소서.”
진무제가 끝내 결심을 내리고 기원 279년 수륙 6군 20여만명을 출동하여 오나라를 공격했다.
왕준이 이끄는 대군이 성도(成都)에서 출발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갔다. 진나라에 대처하기 위해 오나라는 장강의 험준한 곳에 쇠밧줄로 강면을 막았고 한장남짓이 되는 긴 쇠창살을 강물속에 설치해 진나라의 전함들을 파괴하려 했다. 이에 진나라 군사들은 수십개의 큰 참대똇목을 만들어 오나라의 방어선을 뚫었다. 왕준이 대군을 휘솔해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오나라의 여러 요충지들을 차례로 깨뜨리면서 건업(建業) 3산에 다달았다.
기원 280년 왕준이 인솔한 8만 대군이 상륙하여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하였고 결국 오나라 왕 손호가 투항했다. 이때부터 위, 촉, 오의 분열국면이 결속되었다.
오나라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진무제는 왕준에게 “건업을 진공할 때는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왕혼(王渾)의 지휘에 따르라.”고 명했다. 왕준이 건평을 점령한 후 왕혼은 왕준에게 강북에 와서 대책을 의논하자고 했다. 그러나 왕준은 대규모 전단이 순풍을 따라 전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두에 정박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 왕혼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군대를 인솔해 건업을 공격함으로써 큰 전공을 세웠다. 이에 불만과 시기질투를 한 왕혼이 황제에게 상서를 했다. “왕준이 폐하의 영을 어기고 저의 지휘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진무제가 사실의 진상을 알아보지도 않고 왕준을 나무라니 왕준은 억울함을 담아 상소를 올렸다. “신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진공한 이래 가는 곳마다 적을 쓸어버려 그 기세를 당할 자 없었습니다. (소향풍미) 3산에 도착했을 때 왕혼은 장강 북안에 있었고 제가 인솔한 대군은 순풍을 타고 곧바로 건업을 향했기에 왕혼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 임금을 섬기는 일은 예의와 충성을 다 바치며 자기 안위를 돌보지 않아야 하며 임기응변할줄도 알아야 합니다. 나라에 이로운 일이라면 개인의 생사를 고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책임을 회피한다면 이는 개인에게 유리할지는 몰라도 나라에는 불리한 것입니다. 저는 나라를 위한 일에 모든 것을 바칠 것이며 이 한목숨을 잃는다 해도 불사할 것입니다.”
진무제는 왕준의 말에 설득되었고 왕혼 등 사람들이 계속 왕준의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했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왕준을 낙양(洛陽)에 불러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