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8 17:26:28 출처:cri
편집:李仙玉

[창힐 편-1] 한자 창제의 시작


(사진설명: 창힐의 조각상)

한자를 창제한 창힐

역사의 발전여정에서 중국은 문자의 창제로 인해 새끼에 매듭을 지어 사건을 기록하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로부터 몽매한 시대를 벗어나 문명 시대로 진입했으며 중화문화도 그로부터 끊임 없이 존속하고 전승되고 있다.

문자를 창제한 창힐(倉頡)의 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창힐은 사물의 모양에 따라 상형문자를 만들고 후에는 또 회의(會意) 문자를 창조했다. 사실상 후에 사람들이 귀납한 상형과 회의, 지사(指事) 등 ‘육서(六書)’ 문자 창제법을 창힐은 벌써 그 때 기본 장악했던 것이다.

오늘은 한자를 창제한 창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한자 창제의 시작

창힐은 황제(黃帝)의 유능한 보좌였는데 생김이 선천적으로 괴이했다. 전한데 의하면 창힐은 눈이 네 개이고 눈마다 눈망울이 두 개씩 있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창힐의 예지력과 특별히 예리한 시각을 보여준다.

5천년 전에는 문자가 없어 사람들은 새끼에 매듭을 지어 일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길고 짧은 새끼와 상이한 색상의 새끼에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매듭을 지어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예를 들어 사슴 한 마리를 사냥했다면 사슴 모양의 매듭을 하나 지어 기록하고 곰 열 마리를 잡았다면 곰 모양의 매듭을 둥글게 지었다.

당시 창고지기로 있은 창힐은 매일 창고의 입고와 출고 상황을 기록해야 했는데 가끔 틀리게 기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은 창힐의 과오로 부락의 음식물 배분에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황제는 아주 불쾌해서 창힐을 훈계했다. 자존심이 강한 창힐은 자신이 모두에게 폐를 끼쳤고 황제와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없다고 여겨 창고지기를 그만 두고 산에 들어가 사냥꾼의 보좌가 되었다.

어느 날 저녁 보슬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석(石)이라는 사냥꾼이 움집의 앞에 찍힌 산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런데 발자국이 빗물에 씻겨 잘 보이지 않았다. 석이 소리 높이 다른 사냥꾼들을 불렀다.

“모두 나와 보시오! 이게 무슨 산짐승의 발자국이오?”

총명한 대안(大眼)은 사냥팀에서 모든 산짐승의 흔적을 알아 맞추는 능수였다. 그는 아무리 흐릿한 발자국도 무슨 짐승이 남긴 것인지 한 눈에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대안형으로 불리게 되었다. 모두들 대안의 뒤에 둘러서서 짐승의 발자국을 판단하는 능력을 배우는데 유독 창힐만은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보면서 다른 생각에 잠겼다.

“모든 동물이 남긴 흔적이 서로 다르고 각자 고유의 특색을 유지한다. 그래서 대안형은 그 특징에 따라 무슨 짐승인지 판단한다. 세상 만물은 모두 서로 다른데 왜 사물의 특징에 따라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의 기억을 돕지 못한단 말인가? 그림으로 기록하면 매듭을 지어 기록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을텐데. 핵심은 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보도록 그리는 것이니 이제 대안형과 잘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그날 대안은 흐릿한 그 발자국이 멧돼지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냥꾼들은 대안의 판단에 따라 사과 밭 근처에 함정을 파놓고 멧돼지를 기다렸다. 멧돼지는 호랑이보다도 더 위험한 산짐승이었다. 멧돼지는 사냥꾼을 만나도 무서워하지 않고 사정 없이 달려들어 사냥꾼들은 특히 조심스럽게 멧돼지를 다루었다.

그날도 날이 어두워지자 사냥꾼들은 조심스럽게 함정 주변에 몸을 숨겼다. 과연 몸집이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다가오더니 함정에 빠졌다. 그런데 멧돼지의 배가 유난이 커서 자세히 보니 새끼를 밴 암컷이었다. 사람들은 멧돼지를 산채로 마을로 가지고 와서 우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두어 키웠다. 그렇게 오늘날 6대 가축 중 하나인 돼지가 사육되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에 빠진 창힐은 멧돼지가 새끼를 몇 마리 낳을 것인지 추측하는 흥분한 사람들을 피해서 홀로 자신의 움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매듭으로 사건기록을 대신할 부호를 만들 생각에 골몰했다. 

창힐이 한자 창제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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