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8 09:59:24 출처:cri
편집:李仙玉

[후직 편-4] 영원한 농관

4. 영원한 농관

그 때 중화대지의 동쪽과 남쪽에는 큰 물이 지고 북쪽과 서쪽에는 가뭄이 들어 우가 몇 년째 물을 다스리는 중이었다후직이 여전히 농사를 가르치며 황하(黃河)의 하류에 이르니 홍수가 바다로 흘러 들도록 도처에서 물길을 파고 있었다.

우가 후직에게 말했다.

여기는 물이 많아서 벼를 심는 것이 좋은데 물이 많은 곳에서도 잘 자라고 가뭄이 들어도 소출이 좋은 종자를 찾아보게.”

물도 싫어하지 않고 가뭄에도 잘 자라는 종자를 찾으라니그런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후직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몸은 벌써 움직여 홍수지대와 가뭄지대의 모든 곡물을 돌아보며 우량 종자를 찾아 몸소 재배하면서 논밭 관리의 기술을 도출해냈다곧 재해지역의 농업생산이 빨리 회복되어 백성들이 배를 곯는 현상이 사라졌다.

후에 순임금이 남방을 시찰하다가 구의산(九疑山)에서 병사했다만 백성은 우를 천자로 추앙했고 후직은 여전히 농관으로 곳곳을 다니며 농사를 가르쳤다.

가뭄이 심한 서북지역에서 후직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위하(渭河기슭에서 경작지를 개발했다오랜 가뭄으로 땅이 척박해 사람의 힘으로 개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모든 일에 행동이 먼저인 후직은 당연하게 사람들과 함께 개간의 시범을 보였다위하의 물로 땅을 적셨음에도 척박한 땅은 여전히 굳어 밭을 갈기가 쉽지 않았다.

후직은 비록 몸집이 우람하고 힘이 장사여도 나이도 있고 오랫동안 너무 에너지를 쏟은 탓에 노고가 쌓여 반백의 나이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노쇠해 보였고 몸도 예전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사람들이 무리하지 말라고 권고해도 후직은 여전히 몸소 밭에 나가서 밤낮으로 일했다그리고 무더운 어느 여름날 오후 기아와 갈증에 지친 후직은 밭에서 쓰러졌다.

사람들이 후직에게 미음을 떠먹이고 있는데 후직의 손자인 숙균이 소를 타고 달려왔다그는 소 잔등에서 내리자 큰 소리로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일어나세요할아버지가 밭을 가느라 힘들어 쓰러지신걸 알아요그래서 제가 소가 밭을 갈 수 있게 훈련시켰어요이제 소가 대신할 테니 모두 밭 가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돼요.”

숙균의 말이 끝나자 신기하게 후직이 눈을 뜨더니 기대감으로 넘친 눈길로 손자를 바라보았다숙균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소에게 쟁기를 메워 밭을 갈기 시작했다과연 소가 쟁기를 끌고 지나가자 밭고랑이 줄지어 나타났다소 한 마리가 농부 백 명 맞잡이였다소가 밭을 가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은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람들이 기쁨에 넘쳐 있을 때 후직은 손자의 장한 일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고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후계자의 성과를 보았으니 후직은 시름 놓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이다처음으로 소로 밭을 간 이 숙균은 농업문명의 개척자로 인정된다소로 밭을 갈기 시작하면서 농업생산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고 노동의 효율성도 전에 없이 높아졌다그리고 이 농업생산의 모델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현재도 중국의 적지 않은 곳에서는 여전히 소로 밭을 갈고 있다따라서 후직의 이 손자는 중국인들로부터 밭의 신으로 인정된다.

신묘한 출생 스토리를 가진 후직은 삶의 마감도 전기적 색채가 다분하다후직은 오늘날 사천 성도의 벌판인 도광(道廣)벌판에 묻혔는데 그때로부터 이 곳에는 춘하추동 언제나 오곡이 풍성하고 수초가 무성하며 백화가 피어났다또 가을이면 봉황이 온갖 새를 거느리고 나타나 공중에서 춤을 추는 기이한 경관도 나타나 영원한 농관 후직이 죽어서도 이 땅과 함께 함을 보여주었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다후직은 4천 년 전에 오곡의 씨앗을 발견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후직의 최대의 공로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친 것이다후직이 있었기에 농경문명이 중국의 눈부신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