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부호묘에서 출토된 청동기)
제4회 영원한 동반자
푸른 소나무 소슬한데 백마가 슬피 울었다. 상 나라 왕궁에는 수심이 가득 어렸다. 온 몸에 핏자국이 낭자한 부호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혈색을 잃은 꽃 같은 얼굴과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입술, 다시는 뜨지 않을 듯 굳게 감긴 두 눈을 지켜보는 무정 왕이 흘리는 눈물이 부호의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부호는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고 무정 왕은 마음 속으로 아내를 부르고 또 불렀다.
“왕후여, 가지 마시오! 나도 그대를 필요로 하고 상 나라도 그대 없인 안 됩니다!”
하지만 무정 왕이 아무리 불러도, 무당이 아무리 굿을 해도 부호는 자신이 지키고 자신이 넓혀온 상 나라를 더는 보지 못하고 영원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평소 부호를 보살피고 지켜온 16명의 호위 병사 전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부호가 가장 아끼던 백마도 슬프게 울며 더는 풀을 먹지 않고 그녀가 가장 귀여워하던 사냥개 두 마리도 애처롭게 울기만 하고 먹이를 거부하더니 모두 부호를 따라갔다.
무정 왕은 부호를 왕릉에 묻지 않고 왕궁의 가든을 부호의 영원한 안식처로 정했으며 부호에게 신(辛)이라는 묘호(廟號)를 하사했다. 그에 후세 사람들은 부호를 모신(母辛)이라 부르게 되었다. 부호는 자신이 생전에 사용했던 모든 생필품과 보물, 무기와 함께 묻혔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16명의 호위병사와 백마, 사냥개도 부호의 지하궁전 옆에 묻혀 영원히 부호를 지키게 되었다. 무정 왕은 가든에 거대한 규모의 능묘를 조성하고 시시로 제사를 지내고 때때로 와서 그녀를 기렸다.
부호묘에서 백 여 점의 옥기가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귀중한 화전(和田) 옥이다. 부호묘 발굴에 의하면 부호는 서구인으로부터 화전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부호의 장례식을 치른 무정 왕의 가슴 속에는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 부호가 귀방족(鬼方族)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삶을 마감한 것을 생각하면서 무정 왕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귀방인은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을 가지고 있어서 귀방이라 불렸다. 과거에는 해마다 보석과 옥을 공물로 진상하다가 그 해에 갑자기 공물을 중단하고 상 나라 사람들의 진입을 금지시켰다. 후에 서구의 야만인들이 귀방족을 패배시키고 화전옥이 나는 곤륜산(崑崙山) 남쪽 산자락을 강점했다.
무정 왕이 몸소 출정에 나섰고 부호가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웠다. 하지만 10킬로그럼에 근접하는 부호의 도끼도 야만인의 완력을 당하지 못해 부호는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무정은 하는 수 없이 아내를 호위해 철수했던 것이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무정 왕은 더 없는 슬픔과 함께 타오르는 분노도 느꼈다.
“왕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복수하지 않는다면 어이 왕이라 할 수 있고 어이 세상 사람들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무정 왕은 복수의 일념으로 야만인과 결전에 나설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리고 출정에 앞서 무정 왕은 부호묘를 찾아 상 나라 군대의 승리와 복수의 성공을 기원했다.
부호의 영령이 멀리 가지 않았고 무정 왕의 명성 또한 높았다. 3개월의 어려운 싸움 끝에 무정 왕은 끝내 야만인을 귀방족의 땅에서 몰아내고 상 나라의 세력 범위를 곤륜산 자락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로부터 화전의 옥은 온 세상에 퍼졌고 옥문관(玉門關)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3200여년 전에 부호는 선후로 20여개의 지역을 정복해 상 나라의 부흥에 기여했으며 오늘날 중국이 넓은 국토를 보유하게 된 것도 부호가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남성 못지 않음을 보여주는 역사가 부호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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