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0 09:52:24 출처:cri
편집:李仙玉

[공자 편-4] 영원한 스승

(사진설명: 공자의 화상)

4회 영원한 스승 

노나라 군주 애공(哀公)이 사냥하러 대야(大野)에 갔을 때 숙손씨의 가신이 이상한 짐승 한 마리를 잡았다몸은 미록(麋鹿같았고 꼬리는 소와 같았으며 뿌리는 단단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웠다사람들은 그 짐승을 괴물이라 여겨 당장에서 죽였다그리고 그 짐승의 시체를 박학한 공자에게 가지고 가서 보여주며 무슨 짐승이냐고 물었다.

공자가 놀라며 말했다.

이는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麒麟)인데 왜 죽였는가?”

죽은 기린을 보고 기린처럼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를 생각한 공자는 슬픔에 젖어 한탄했다.

나의 인생도 끝이구나.”

공자는 제자들에게 기린을 잘 묻어 주라고 이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요 임금과 순 임금 시대에는 기린과 봉황이 뛰놀았는데(唐虞世兮麟鳳遊)

지금이 그때가 아닌데 무엇을 바랄 손가(今非其時來何求)?

기린이여 기린이여 이 내 마음도 슬픔에 젖네(麟兮麟兮我心憂).

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노나라 군주 은공(隱公때부터 애공이 기린을 사냥한 때까지 242년의 역사를 기록했다이 시기의 역사를 일러 춘추(春秋)’라 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과 위(), (세 가문이 진()나라를 찢었고 그때로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시기를 전국(戰國)’이라 부른다이는 또 역사적으로 동주(東周)시기를 춘추전국(春秋戰國)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공자가 73살 나던 해에도 위나라 세자 부귀는 아들인 출공과 군주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출공은 부귀가 국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람을 보내 성문을 막아 부귀는 척지(戚地)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부귀의 누이인 공희(孔姬)의 아들 공리()가 출공의 집정대부(執政大夫)를 맡고 있었다남편이 별세한 후 공희는 가신인 혼량부(渾良夫)와 사통하면서 동생인 부귀를 만나라고 그를 척지로 보냈다혼량부를 보자 부귀가 말했다.

내가 위나라 들어가서 군주가 되도록 돕는다면 당신에게 대부를 맡기겠습니다.”

혼량부가 부귀의 이 말을 공희에게 전하자 공희는 애인과 동생에게 여장을 하고 몰래 위나라 도읍에 들어오게 한 다음 자신의 방에 숨겼다그리고 위나라 대부이자 자신의 아들인 공리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자 그를 납치해서 부귀를 만나게 했다공희는 공리더러 가신을 집합하게 한 다음 혼량부에게 지휘권을 주게 해서 관아를 습격했다그리고 부귀는 공리를 높은 단에 감금했다출공의 측근이자 위나라 조정을 장악한 공리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지 아니면 출공에게 가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 출공은 이변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수레를 타고 노(나라로 도주했다.

그 때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공리의 가신으로 있었다자로는 성밖에서 공리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인을 구하기 위해 성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성을 나오는 공자의 제자이자 대부인 고시(高柴)를 만났다고시가 자로를 보자 말했다.

성문을 닫았네이제 우리 세상이 아니니 성에 들어가지 말게.”

공대부의 객인데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고시의 말에 이렇게 대답한 자로가 성문밖에 이르니 문지기가 물었다.

군주도 살려고 성을 나가 도주했습니다당신이 이제 성안에 들어가서 뭘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어찌 사람의 밥을 먹고(吃人飯사람의 난을 못 본 척할 수 있겠는가(避人難)? 공대부가 성안에서 납치되었다고 해서 왔네.”

자로가 막 말을 마치는데 마침 성을 나오는 사람이 있어서 그 기회에 자로는 성안으로 들어갔다자로가 성안에 들어가 보니 공리가 높은 단에 감금되어 있었다자로가 외쳤다.

자로가 여기 있습니다공대부께서는 내려오십시오!”

부귀는 자로를 출공의 측근이라고 여겨 무사를 시켜 자로를 제거하게 했다무사 두 사람이 동시에 창을 휘두르자 자로의 갓끈이 끊어지고 자로도 중상을 입었다하지만 자로는 갓끈을 다시 매며 이렇게 말했다.

주례(周禮)에 규정하기를 군자는 죽어도 갓을 벗지 말라 했느니라.”

자로는 갓을 단정히 쓰고 삶을 마감했다.

이 때 공자도 마침 위나라에 있었다부귀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고시는 돌아오고 자로는 죽었다.”

제자들이 물었다.

스승님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고시는 요점을 알아서 자신을 지키지만 자로는 용감해서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공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고시가 달려왔고 이어 위나라의 사자가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새 군주께서 부자를 존경하시어 특별한 음식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공자가 예를 행하고 받아보니 다진 고기였다공자는 뚜껑을 닫고 사자에게 물었다.

자로의 고기인가?”

사자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렇습니다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로의 고기가 아니라면 군주께서 전문 나에게 보내오실 리가 없을 것이네.”

말을 마친 공자는 제자를 시켜 자로의 고기를 땅에 묻게 하고 통곡했다.

자로가 비명에 죽을 것 같아 걱정했는데 과연 그러하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자는 병석에 눕더니 곧 자로를 따라 갔다제자들은 공자를 곡부(曲阜성의 북쪽 사수(泗水)강 기슭에 묻었다.

공자는 인품이 좋고 모든 것을 가엽게 여겼다그는 심지어 도자기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는 것도 잔인하다고 인정해 시작용자(始作俑者), 기무후호(其無後乎)”라는 명언을 남겼다.“처음으로 사람 인형을 만들어 땅에 묻은 사람은 천벌을 받아 후사가 없으리라라는 뜻의 이 말은 나쁜 선례를 만든 사람을 뜻하는 사자성어 시작용자(始作俑者)로도 쓰인다.

주희(朱熹) “하늘이 중니를 내리지 않았더라면(天不生仲尼긴 세월은 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萬古如長夜)”라고 말했다귀족의 교육 독점 현상을 깨고 서민을 망라해 누구든 교육을 받게 했다는 이 한 가지 공덕만 봐도 공자에 대한 주희의 이런 평가는 전혀 지나치지 않는다.

교육자로서 공자는 영원한 스승임이 틀림이 없다.

번역/편집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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