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구천검)
제2회 오나라 왕의 노복이 되다
부친의 상이 끝난 후 오 왕 부차는 상국 오자서를 대장(大將)으로, 태재(太宰) 백비를 부장(副將)으로 하고 거국적인 힘으로 태호로부터 물길을 통해 기세 드높게 월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오나라 군대가 복수하러 온다는 것을 안 구천은 대군을 모아 싸움에 나섰다. 대부 범려(范蠡)가 말했다.
“오나라 군대는 오 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3년을 준비했습니다. 분노로 무장한 그들의 뜻이 하나로 모였기에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출병하지 말고 수비만 해야 합니다.”
대부(大夫) 문종(文種)이 말했다.
“제가 보기에 머리를 숙여 사죄하고 오나라 군대와 화의해서 오나라 군대가 철군한 후 다시 좋은 방법을 생각함이 좋을 듯합니다.”
월 왕 구천이 범려와 문종의 말을 받았다.
“경들은 한 분은 수비를 주장하고 한 분은 화해를 권하지만 두 가지 모두 상책이 아니오. 오나라는 우리의 숙적이라 그들이 정벌하러 오면 나가서 싸우지 않을 수 없소.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바보 멍청이 인줄 알거요. 나는 그런 월 왕이 되고 싶지 않소.”
말을 마친 구천은 3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초산(椒山)으로 향했다. 첫 전투에서 백여명의 오나라 군사를 사살한 구천은 오나라 군대도 불패의 강병이 아니라고 생각해 승리의 기세에 힘입어 퇴각하는 오나라 군대를 쫓아 갔다가 부차의 대군을 만났다. 뱃머리에 선 부차는 몸소 북을 울리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 때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큰 파도가 일고 그 파도를 따라 오자서와 백비가 큰 배를 타고 공격해왔으며 화살이 비오 듯 날아와 거칠 것 하나 없이 표적물이 된 월나라 군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철군했다. 구천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에 이르니 군사는 5천명밖에 남지 않았고 오 왕은 철통같이 구천과 월나라 군사를 포위했다.
구천이 한탄했다.
“범 대부와 문 대부의 말을 안 들어서 이런 꼴이 되었구나. 설마 오늘 이 회계산이 나의 무덤이란 말인가?”
문종이 구천을 위로했다.
“상(商)나라의 탕(湯)임금은 하대(夏臺)의 감방에 감금되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유리(羐里)에 발이 묶였으며 진(晉)나라의 중이(重耳)는 곽(霍)나라로, 제(齊)나라의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도주했지만 그들은 모두 낙담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패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이번에는 범려가 입을 열었다.
“오 왕을 예의로 대하고 선물을 후하게 준비해서 그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만약 그가 용서하지 않으면 대왕이 볼모로 잡혀 그의 노복이 되셔야 합니다.”
“오 왕이 그래도 받아 주지 않으면 그와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소.”
문종이 구천의 말을 받았다.
“오 나라의 태재 백비는 아주 탐욕스럽다고 들었습니다. 거금으로 그를 매수할 수 있습니다.”
월나라 대부 문종이 많은 보물을 가지고 백비를 찾아가 구천의 항복의사를 부차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했다. 문종이 엄청난 재물과 경국지색의 미인들을 약속했다는 말을 들은 부차는 마음이 동해서 구천의 목숨을 살려 두려고 했다. 이 때 오자서가 말했다.
“우리가 월나라를 정벌하러 온 것은 선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왕을 볼 면목이 있겠습니까? 또 오나라 백성들에게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오자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백비가 입을 열었다.
“월 왕 부부가 오나라에 가서 노예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월나라를 멸한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천의 명을 살려 두어 우 임금의 종사(宗嗣)를 남기는 것은 어진 덕행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월나라도 얻고 어진 덕행의 미명도 가지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아부의 말은 항상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법이다. 백비의 말에 부차는 기쁨에 들떠 말했다.
“우 임금의 자손인 구천이 나의 노복이라! 하하하! 성군의 미명도 가지고, 태재의 말에 일리가 있소. 상국, 그대의 공이 가장 크니 후한 상을 내리겠소.”
화가 난 오자서는 백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화근을 남겼소. 오나라가 언젠가는 당신의 손에 망할 것이오.”
그리고 오자서는 홧김에 자리를 떠나버렸다.
겨우 죽음에서 벗어난 구천 부부는 오나라 선왕인 합려 묘의 한쪽에 지은 돌집에 머물면서 오 왕의 말을 사육했다. 오 왕이 마차를 타고 외출할 때마다 구천은 말고삐를 잡고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오나라 사람들이 그런 구천을 보고 비웃었다.
“봐라. 저 사람이 월나라 왕이다. 얼마나 철면피한지 대왕의 노복이 되었다. 나 같으면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어버리고 말겠다.”
그 말을 들은 구천은 칼로 가슴을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도 듣지 못한 척 머리를 숙이고 두 눈을 내리 깔고 걷기만 했다.
구천이 노복으로 있는 3년 동안 월나라 대부 범려(范蠡)는 아침 저녁으로 구천 부부의 시중을 들며 여전히 군신의 예를 지켰다. 부차가 범려를 불렀다.
“구천은 이미 노복이 되었는데 대부는 어이하여 아직도 그를 따르는 거요? 대부가 월나라를 버리고 오나라에 귀순하면 그대의 죄를 사면하고 벼슬을 내리겠소.”
“망국의 신하가 어찌 벼슬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대왕께 죄를 지었는데 다행히 대왕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고 대왕의 노복이 되게 하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합니다. 어찌 더 이상 바라겠습니까?”
범려의 말에 부차는 그가 계속 구천의 시중을 들도록 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 월나라 군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도록 했다.
월 왕은 매일 말을 먹이고 월 왕의 부인은 마구간을 청소하며 범려는 땔나무를 해다 밥을 짓는데 그들은 낮에도 얼굴에 원망하는 빛이 없고 밤에도 탄식 소리 들리지 않는다는 정보를 들은 부차가 백비에게 말했다.
“월나라 군주와 신하의 기가 다 꺾인 것 같은데 그들을 돌려보내도 되지 않겠소?”
“대왕께서는 정말로 성인의 마음을 지닌 성군이십니다. 구천을 돌려보내면 그는 반드시 감지덕지하여 대왕께 크게 보답할 것입니다.”
“태사(太史)더러 길일을 택해서 그들을 돌려보내게 하라!”
백비가 이 희소식을 구천에게 금방 전하자 오자서가 노기등등해서 입궐했다.
“대왕께 아룁니다. 후세에 교훈이 되는 은(殷)이 멸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일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 하(夏)나라 걸(桀)왕은 상(商)나라 탕(湯)의 목숨을 빼앗지 않았고 상나라 주(紂)왕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감금만 했다가 마지막에 걸왕은 탕왕에 의해 축출되었고 주왕은 문왕에 의해 나라를 잃었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구천을 놓아주신다면 아마도 주왕과 같은 비극이 재연될 것입니다.”
부차는 오자서가 자신을 걸왕에 비하자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을 느껴 3개월 동안 몸져누웠다. 하지만 그는 오자서의 권고를 듣고 구천을 돌려보내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어느 하루, 범려가 구천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오 왕에게 문안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범려는 구천의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구천은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비가 몸소 구천을 안내해서 부차의 병문안을 갔다. 마침 부차가 대변을 본 뒤라 구천은 손으로 배설물을 집어서 한참 살펴보더니 입에 넣어서 맛을 보고 나서 말했다.
“대왕의 대변이 색깔도 노랗고 쓴 맛에 약간 신 맛이 납니다. 대왕의 질환이 곧 완치되실 듯합니다.”
부차가 아주 기뻐하며 대꾸했다.
“구천, 당신은 참으로 어진 자이구려. 대변의 맛으로 과인의 질환을 알아보다니, 태자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오!”
과연 며칠이 지나자 부차의 병이 깔끔히 나았다. 부차가 백비를 불렀다.
“사흘 안에 구천을 돌려보내게.”
이 일을 안 오자서가 또 부차를 찾아가서 절대 구천을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직언했으나 부차가 오자서의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
구천은 3년만에 끝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