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3 15:06:52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왕희지 편: 제4회 불후의 명작을 남기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왕희지)

제4회 불후의 명작을 남기다

왕희지는 일찍 위부인(衛夫人)에게서 서예를 배웠고 노후에는 초서(草書)체의 대가 장지(張芝)와 해서(楷書)체의 비조 종요(鍾繇), 예서(隸書)체의 거장 이사(李斯) 등의 장점을 모아 행서(行書)라는 독특한 풍격의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냈다. 해서 서체와 초서 서체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행서 서체는 글자의 모양이 유연하고 변화무쌍하다. 왕희지의 행서 서체는 “모두를 뛰어 넘고 고금에 유일”한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대가들이 왕희지의 작품에 감탄하고 그의 작품은 천하에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왕희지는 여전히 성실하고 솔직한 성품으로 담백하고 초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

어느 날, 왕희지는 길을 가다가 한 노부인이 육각형의 부채를 파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때는 늦가을이라 부채 가격을 문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부인의 얼굴에 처량함이 묻어 있는 것을 본 왕희지는 문득 측은한 마음이 들어 대필하는 사람에게서 붓과 먹을 빌려가지고 노부인에게 말했다.

“제가 부채에 글을 쓰면 부채 하나에 1백 전(錢)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희지의 말에 노부인은 믿는 듯 마는 듯 하는 눈치였다. 왕희지는 노부인의 부채마다에 다섯 글자씩 쓰고 나서 말했다.

“왕우군이 이 부채에 글을 썼다고만 말하면 됩니다.”

왕희지의 말이 끝나기도 바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노부인에게 1백 전씩 넘기고 부채 하나씩 가져가 노부인은 가지고 있던 부채를 금방 다 팔았다.

노부인이 기쁜 얼굴로 왕희지에게 말했다.

“집에도 부채가 있으니 나리께서 글자를 더 써주시지요!”

그 말에 왕희지는 말 없이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돌려 가버렸다.

이로부터 ‘우군서선(右軍書扇)’은 후세 사람들 회화의 소재가 되어 역대로 많은 화가들이 이와 관련된 그림을 그렸으며 그 중 적지 않은 명화가 나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왕희지의 이런 성품에 왕도(王導)도 감동되어 젊었을 때 벌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소가 무엇 때문에 유만안(劉萬安)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왕도는 그 때 벌써 고상하고 품위 있으며 성실하고 솔직한 성품의 왕희지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을 보아냈던 것이다.

어느 날, 왕희지가 유담(劉惔)의 집에 갔는데 마침 허순(許詢)이 그 집에 와서 기거하고 있었다. 허순이 말했다.

“부마라 확실히 다르오. 침상과 침구는 모두 비단으로 장식되어 아주 산뜻하고 화려하며 또 하루 세 끼 식사도 아주 풍성하고 음식마다 색상이나 향기, 맛이 모두 뛰어나오. 계속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동산(東山)에 은둔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듯 하오.”

공주와 혼인한 유담이 높은 곳에서의 외로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사람의 길흉화복은 그 사람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시오? 물론 나도 계속 이렇게 호강하게 살고 싶으나 이런 복을 평생 받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소?”

그 말에 왕희지가 차분하게 말했다.

“소보(巢父)가 후직(后稷)을 만나고 허유(許由)가 상계(商契)를 만났더라면 그들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오.”

왕희지의 말에 허순과 유담은 모두 부끄러워 얼굴을 숙였다.

그들이 난처해하자 왕희지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허순에게 물었다.

“자네 말해 보시게. 자네가 사안석(謝安石)과 비할 수 있겠소?”

허순이 대답하지 않자 왕희지가 웃으며 말했다.

“안석이 원래는 관리가 될 수 있었는데 그랬다면 만석(萬石)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 걸세.”

안석은 사안(謝安)을 말하고 만석은 사안의 동생 사만(謝萬)을 말한다. 유담이 듣다가 껴들었다.

“지도림(支道林) 고승은 사안은 왕호지(王胡之)보다 뛰어나지만 사만은 왕호지보다 못하다 말했다고 하오. 그러니 왕호지는 만석을 초과하고 안석을 따라 잡으려 하지 않소.”

“그렇다면 일소형은 만석에게 경고해야 하지 않겠소?”

허순의 말에 왕희지가 대꾸했다.

“만석이가 리부랑(吏部郞)을 할 때 내가 서신을 써서 에둘러서 말해주었지. 소양을 높이고 양보하는 미덕을 가지라고 말이오. 후에 그가 예주도독(豫州都督)이 되었을 때도 무릇 일을 넘치게 하지 말고 부하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고 권고했소. 성공여부는 작은 일들이 모여 되는 법이니까. 이번에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북벌(北伐)을 떠나는데 여전히 부하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서 나와 안석은 모두 만석을 걱정하고 있소.”

왕희지의 사람 보는 안목은 아주 비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사만은 부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뭇 사람들의 배반을 유발하고 북벌에서 실패했으며 서인(庶人)으로 전락되었다.

한편 아들들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였던지 왕희지는 자신의 아들들이 왕술(王述)의 아들인 왕탄지(王坦之)보다 못하다고 여겨 늘 아들들을 나무랐다. 하지만 역사는 왕희지의 아들들이 왕술의 아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왕희지의 아들 7명 중 요절한 왕현지(王玄之) 외에 다섯 아들은 아주 출중했으며 그 중 작은 아들 왕헌지(王獻之)의 초서와 해서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사하는 샘플이 되었고 헌지는 인품도 왕희지처럼 좋아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롤모델로 인정되었다.

또 ‘서성(書聖)’이라 불리는 왕희지와 ‘소성(小聖)’이라 불린 왕헌지 부자는 후세 사람들로부터 ‘이왕(二王)’으로도 불리며 서예계의 미담이 되었다. 왕헌지는 또 딸이 안희(安僖) 황후로 책봉되면서 사후에 아주 높은 예우를 받아 시중(侍中)으로 추존되었으며 광록대부(光祿大夫)와 태재(太宰)가 되었고 ‘헌(憲)’자를 시호로 받았다. 딸이 한 나라의 국모가 된 것은 왕헌지가 인생에서 성공한 한 분야이자 왕희지 가문교육의 성공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왕희지에게 왕미지(王微之)라는 아들이 있고 왕미지의 아들은 이름이 왕정지(王桢之)이다. 중국인들은 보통 부자의 이름에 같은 글자를 쓰지 않고 돌림자는 형제들 간에만 쓴다. 그런 의미에서 왕희지와 왕미지, 왕정지는 이름만 보면 조손 3대가 아니라 형제라는 느낌을 준다. 학자 진인각(陳寅恪)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왕씨 가문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신앙하기 때문에 신앙의 표지로 갈 지(之)자를 돌림자로 삼대에 걸쳐 이름에 썼다는 것이다.

왕희지의 생명은 59세에 멈췄다. 조정에서 왕희지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라는 묘호를 추존하려 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끝까지 그 명칭을 받지 않았다.

왕희지의 생명은 스러졌지만 그의 서예작품은 영원한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그의 <난정집서>는 당태종의 소릉에 묻혔지만 전각본인 <난정서>는 여전히 자자손손 전해지며 영원한 매력을 자랑한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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