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30 14:34:05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사령운 편: 제1회 정치에 실망한 천재소년

(사진설명: 사령운 동상)

산수시의 비조 사령운

그는 황실의 중용을 받지 못하자 여행으로 기분 전환을 했고 산수를 즐기는 중에 아름다운 산수를 노래한 산수시를 많이 썼다. 그가 바로 산수시(山水詩)의 비조 사령운(謝靈運)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령운은 풍채가 뛰어나고 재능이 넘쳤으며 시대의 흐름을 선도했다. 그는 현학(玄學)이 성행하며 무미건조하고 텅 빈 현언시(玄言詩)가 난무하던 그 시대에 참신하고 아름다우며 자연스럽고 차분한 시구로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써서 산수시라는 새로운 유파를 만들었으며 시의 경지를 크게 넓혔다.

중국 최초의 여행가인 그는 또 중국의 동남 연해를 여행하면서 각지의 풍물을 묘사한 많은 시작을 남겼다. 중국 최초의 등반 애호가인 그는 또 ‘사공극(謝公屐)’이라는 등산화를 발명하기도 했다

산수시의 비조 사령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정치에 실망한 천재소년

비수(淝水)의 전쟁으로 세상에 명성을 날린 강락공(康樂公) 사현(謝玄)이 위독해졌다. 부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분부가 있으시면 얼른 말씀하세요!”

사현이 말했다.

“비수의 전쟁으로 강적을 격파하고 사서에 이름을 남겼으니 나는 이 생에 여한이 없소. 다만…”

말꼬리를 흐리는 사현을 보며 부인이 재촉했다.

“다만 뭐예요? 말씀하세요.”

“당신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 아들 환(瑍)은 이 아비를 닮지 않아 총명하지도 못했고 오래 살지도 못해서 26살에 먼저 저 세상으로 갔소. 하지만 우리 손자인 총명하고 잘 생긴 령운은 아비인 환보다 백 배나 더 강하니 후에 할애비인 나보다도 더 출세할지 모르오.”

부인이 불만스레 말했다.

“령운은 확실히 환보다 잘 생기고 총명해요. 하지만 그가 태어나서 열흘 만에 환이 갔으니 이 손자는 참으로…”

“삶과 죽음은 모두 명이오. 환의 죽음이 령운과 무슨 관계가 있겠소? 령운을 제대로 키우지 못할 것 같아서 일찍부터 전당(錢塘)의 도사(道士) 두명사(杜明師)의 도관(道觀)에 보냈는데 그가 네 살 때 벌써 시와 부를 읊고 행서(行書) 서체의 서예를 쓸 정도로 총명하니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 같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너무 멀리 가셨잖아요.”

“멀리 간 게 아니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령운의 일이오.”

“그럼 빨리 말씀하세요. 제가 미덥지 않으세요?”

“나의 국공(國公) 작위는 우리 장남인 환이 이어 받아야 하는데 지금 그가 먼저 가지 않았소. 다행히 그는 우리에게 손자 넷을 남겼고 그 중 령운이가 넷째이기는 하지만 가장 총명하오. 그래서 향후 나의 작위를 령운이가 이어 받게 할 것이오.”

“그럼 그렇게 폐하께 주청 드리세요.”

“령운은 계속 명사 도사에게 맡겨 양육하게 하오. 명사 도사는 그를 잘 교육할 거요. 그리고 령운이 15살이 되면 그 때 건강(建康)으로 불러 들이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령운이 향후 우리 사씨 가문을 빛낼 것이오. 그러니 반드시 그를 잘 보살피시오.”

말을 마친 사현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사현은 참으로 안목이 있었다! 15살이 되어 건강으로 돌아온 사령운은 붓만 들면 명문장을 쓰는 박식한 천재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강락공의 작위를 이어 받아 사람마다 모두 그를 총애한 탓으로 그는 천재소년인 동시에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는 명문가의 도련님이 되기도 했다.

당숙(堂叔)인 사혼(謝混)이 사령운을 불렀다.

“객(客)아, 관행에 따라 조정은 국공(國公)에게 원외산기시랑 (員外散騎侍郞)이라는 관직을 준다. 사은을 표시하러 내일 나와 함께 조정에 나가자!”

사령운은 어렸을 때부터 전당 두명사의 도관에 맡겨 양육한 관계로 아명이 객이었다. 당숙의 말에 사령운이 펄쩍 뛰었다.

“원외산기시랑이라니요? 그 따위 이름만 있는 한직을 왜 맡아요? 난 안 해요. 안 가요!”

사령운의 재능을 높이 사고 사령운을 예뻐한 사혼은 사령운이 한직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자. 그런데 그래도 무슨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해보거라. 무슨 일을 하고 싶느냐?”

사령운이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래도 문장과 관련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름다운 문장으로는 강동(江東)의 으뜸이 아닙니까?”

사령운의 말에 사혼은 즐겁게 웃었다.

사령운의 재능은 뛰어났지만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먼저 예주(豫州) 자사(刺史) 유의(劉毅)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하지만 곧 유유(劉裕)에 맞선 유의가 패전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의를 지지한 사혼도 살해되었다. 그 바람에 사령운은 건강으로 돌아와서 비서승(秘書丞)이 되었지만 곧 권세가에 밉보여 파면되었다. 그 뒤에 사령운은 송(宋) 왕 유유의 상국종사중랑(相國從事中郞)이 되었는데 홧김에 말버릇이 없는 문지기를 죽인 관계로 면직되었다.

유유가 기존의 정권을 대신해 남조(南朝) 송(宋) 왕조를 세웠다. 역사적으로 남조 송나라의 개국황제 유유를 송무제(宋武帝)라 한다. 서민출신인 유유는 황제가 된 후 명문가들을 진압하기 시작해 사령운의 작위는 강락후(康樂侯)로 강등되고 식읍(食邑)도 2천 가구에서 5백 가구로 줄었다. 하지만 사씨 가문을 꺼리면서도 두려워한 유유는 사혼을 죽여 위엄을 보이는 동시에 사령운을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에 임명해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유가 붕어하고 그의 장남 유의부(劉義符)가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송소제(宋少帝)이다. 소제가 나이가 어린 탓에 송 나라의 권력은 권신의 손에 들어갔고 그 권신을 헐뜯은 사령운은 권신 중 한 명인 서선지(徐羨之)의 눈에 나서 도읍과 멀리 떨어진 영가(永嘉) 태수(太守)로 좌천되었다.

벼슬길을 전전하며 사령운은 정치에 염증을 느껴 더는 세속의 구속을 받지 않고 산수를 즐기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중국 산수시의 비조가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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