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2 14:56:05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사령운 편: 제4회 유배지에서 막을 내린 삶

제4회 유배지에서 막을 내린 삶

회계(會稽) 성의 동쪽에 회종호(回踵湖)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사령운은 그 호수를 밭으로 만들겠다고 조정에 주청을 올려 황제의 윤허를 받았다. 하지만 회계 태수 맹의(孟顗)가 죽기살기로 그 땅을 내주지 않았다. 사령운은 하는 수 없어 시녕(始寧) 현의 휴황호(休崲湖)를 달라고 했으나 맹의는 그곳도 내주지 않았다. 화가 날대로 난 사령운이 욕설을 퍼부었다.

“맹의, 이 위선자야, 다른 사람의 이익은 돌보지도 않고 자신의 사적인 원한만 생각하는 네가 무슨 염불한다고? 이건 공권력을 이용해서 사적인 울분을 푸는 거야!”

이로써 사령운과 맹의 간에는 풀 수 없는 원한이 맺어졌다.

사령운이 맹의가 성불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맹의는 자비심이란 전혀 없이 부도덕한 일을 벌였다. 맹의는 사령운이 역모를 꾀하며 사사로이 군대를 두고 있다는 내용의 소를 조정에 올렸다. 이는 가문을 멸하는 엄청난 죄였다! 그 바람에 안하무인에 제멋대로 살던 사령운도 깜짝 놀랐다. 생명에 직결되는 큰 일이라 사령운은 밤도와 경성으로 올라가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령운이 모함당한 것을 한 황제는 물론 사령운의 죄를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그의 귀향을 금지하고 임천(臨川)의 내사(內史)로 임명했다.

사령운은 이번 벼슬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에 임천에 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벗들과도 생사이별을 하며 고향의 아름다운 산천과도 영원히 헤어지게 될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한 나라가 망하니 장자방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고(韓亡子房奮)

진 나라가 황제를 칭하니 노중련이 부끄럽게 생각하네(秦帝魯連恥)

그들은 모두 조정에서 나오지 않았으나(本自江海人)

그 충성과 의로움에 군자가 감동하네(忠義動君子)

여기서 장자방은 한(韓) 나라를 멸망시킨 진(秦) 나라에 복수하고자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대기하다가 철퇴를 날린 장량(張良)을 말하고 노중련(魯仲連)은 시종 진 나라에 대항한 제(齊) 나라 사람이다. 사령운은 이 시에서 송 나라를 진 나라에 비유하고 자신을 장량과 노중련에 비유하며 복수를 암시한 것이다. 송문제(宋文帝) 유의륭(劉義隆)은 모반시를 중얼거리며 깊은 사색에 빠졌다.

“사령운이라는 이 재자(才子)는 한 때 궁중 잔치에서 그것도 내 앞에서 손님들에게 ‘이 세상의 문학적 재능이 한 섬이라면 조자건(曺子建)이 여덟 말을 차지하고 내가 한 말을 차지하며 다른 사람들이 나머지 한 말을 나눈다’고 뽐냈으니 그는 과연 이 세상 최고의 광사(狂士)로다. 하지만 그는 확실이 재능이 있다. ‘연못가엔 푸릇푸릇 봄 풀이 돋아나고 (池塘生春草) 정원 버드나무에는 새 소리가 달라졌네(園柳變鳴禽)’라고 봄을 노래하고 ‘넓은 벌판의 모래 언덕 한없이 고요하고(野曠沙岸淨) 건듯 들린 하늘에 걸린 가을달 유난이 밝네(天高秋月明)’라고 가을을 묘사했으며 겨울은 ‘달빛은 적설에 내리고(明月照積雪) 북풍은 세차고 스산하도다(朔風劲且哀)’라고 썼으니 이토록 청아하고 수려한 시는 오직 그만이 쓸 수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본성이 오만하고 방자하다. 내가 그에게 벼슬을 주어서 임천으로 내려 보냈는데도 그는 여전히 자유분방하게 산천을 즐긴다. 또 어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을 했는지 관가에 쫓기다 군사를 일으켜 반항해서 하옥되었다. 그랬더니 감히 이런 모반시를 쓰다니. 설마 그는 정말로 장자방(張子房)을 따라 배워 나를 죽이려 했을까? 내가 그를 얼마나 잘 대해 주었는데 어떻게 나를 진시황제에 비유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사람들이 분분이 이 미친 귀족을 참수하라는 주청을 올리지 않겠는가? 아아, 이 명사가 죽으면 우리 황실의 명성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에게 본때를 보이지 않아도 안 된다. 이런 사령운을 그대로 두면 누가 나라의 법을 지키고 누가 이 황제를 안중에 두겠는가? 아아, 유배를 보내자. 그를 먼 곳으로 보내고 조정의 감시하에 두자.”

이렇게 생각한 문제가 대신들에게 말했다.

“사령운은 필경 재자이고 그의 시와 서예는 이 나라의 두 가지 보물이오. 그러니 죽이지는 맙시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이 나섰다.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모죄는 사할 수 없습니다!”

송문제가 팽성왕의 말을 받았다.

“그의 조부 사유도(謝幼度)는 비수(淝水)의 전투에서 불후의 공을 세워 관자(管子)보다도 더 큰 기여를 했소! 공자(孔子)는 ‘관자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산발을 하고 옷의 단추도 왼쪽에 둔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소. 만약 사안석(謝安石)과 사유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오! 사유도의 공이 그의 자손들에게 복이 되게 해야 하오. 사령운의 죽을 죄를 사하고 광주(廣州)로 유배를 보내시오.”

제멋대로 사는 인생은 보통 비참하게 끝나고 죽을 운명이면 어디로 도망가든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사령운이 금방 광주에 도착하니 사령운의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효시하라는 황제의 조서가 내려왔다.

사령운에게 광주 유배를 명하고 나서 송문제는 사령운이 폭도들을 매수하고 무기를 구입해서 삼강구(三江口)에서 탈출할 계획이라는 상소문을 받았다. 이 일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이로써 사령운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무력으로 유배범인을 구출하는 것은 역모와 같기 때문이었다. 또 사령운이 자신의 눈앞에서 죽지 않고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광주에서 죽으면 송문제는 그나마 마음이 편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령운은 한 장의 조서에 의해 광주의 거리에 마지막 피를 뿌렸다.

그 해는 원가(元嘉) 10년, 기원 161년이었고 당시 사령운의 나이는 49살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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