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0 08:49:49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조충지 편: 제1회 역법 <대명력>의 모든 것

(사진설명: 조충지의 석상)

수학의 귀재 조충지

조충지(祖沖之)는 아랍의 수학자보다 천 년 앞서 벌써 작은 막대기 하나로 원주율(圓周率) 수치를 소수점 아래 일곱 자리까지 계산했다. 최초로 원주율을 계산한 조충지는 원주율의 아버지라 불린다.

조충지가 만든 <대명력(大明歷)>은 당시 가장 앞서가는 역법이었다. 하지만 완고한 보수파들의 반대로 조충지는 자신의 심혈로 만들어진 <대명력>의 시행을 평생 보지 못했다.

고대 중국의 유명한 과학자인 조충지는 수학과 천문, 역법, 기계 등 분야에서 뛰어난 기여를 했다. 위대한 과학자 조충지를 기리기 위해 달의 한 산을 ‘조충지 산’으로 명명했고 넓은 우주에는 ‘조충지 별’이 떠서 영원토록 이 세상을 밝힌다.

수학의 귀재 조충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역법 <대명력>의 모든 것

남조(南朝) 때 송(宋) 나라의 정권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으나 송나라의 밤 하늘은 높고 달빛은 밝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조정은 조충지의 <대명력> 채용 여부와 관련해 변론을 벌이게 된다. 당시 조충지는 조정에서 공부참군(公府參軍)이라는 작은 벼슬을 했고 그의 적수는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보수파의 두목 대법흥(戴法興)이었다.

조충지는 아들 조환(祖暅)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정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늘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조충지를 보고 조환이 물었다.

“아버님, 내일 대법흥을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조충지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법을 아는 조정의 다른 대신들은 설득할 자신이 있으나 대법흥은 설득하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역법을 알지 못하는데다 내가 설명한다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일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권신이라 황제는 그의 말을 듣고 대신들은 그를 두려워하니 심히 걱정되는구나.”

“저도 이제 어리지 않아요. 아버님, 이제 저에게 역법 지식을 전수해주세요. 그래야 후에 제가 아버님을 도와드리지요.”

“그래, 맞는 말이다. 이제 너에게 전수해야겠다. 후에 정말로 네가 <대명력>의 시행을 이끌지 아냐.”

조충지는 이렇게 말하면서 조환을 품에 안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사용한 역법은 음력(陰曆)이다. 월력(月曆)이라고도 하지. 왜냐하면 달이 태음(太陰)이니깐. 태음력은 하늘의 달이 찼다가 기우는 것에 근거해 제정한 역법이다. 달이 한 번 찼다가 기울면 한 달이고 열 두 달을 1년으로 정한다.”

“간단하네요. 그런데 왜 모두들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데요?”

“천문현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고 원래 복잡하다. 그것은 달이 찼다가 기우는 것으로 제정한 열 두 달이 354일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양이 한 번 운행하는 일자, 즉 동지(冬至)일로부터 그 다음 동지일까지의 1년은 365에 4분의 1일이다. 그러니 월력의 열 두 달은 사실 1년이 안 되는 것이지. 옛 사람들은 윤달의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9년 동안 7개의 윤년(閏年)을 두는데 윤년에는 하나의 윤달이 든다. 다시 말하면 윤년에는 열 세 달이 들어 즉 19년 중 7년에 윤달이 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지금까지 천 년이 넘도록 사용하지만 면밀하고 정확하지 못하다. 동진(東晉) 후반에 북량(北凉)의 조비(趙䨾)가 <원시력(元始曆)>을 만들어 600년 동안 221개의 윤달을 만들었다. 이 역법은 좀 더 진보하고 더 정확하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채용하는 <원가력(元嘉曆)>은 아직도 19년 중 7개 윤달이 드는 옛 역법을 쓰니 <원시력>보다도 뒤떨어지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원시력>보다 더 정확한 <대명력>을 만든 것이다.”

“아버님께서 제정하신 <대명력>은 어떻게 정확한가요?”

“천문관측과 수치계산에 근거하여 19년 중 7개 윤달이 들면 일(日)수가 지나치게 많아 200년에 하루가 많아지고 600년 중 221개의 윤달이 드는 조비의 역법에 의하면 일수가 또 좀 적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내가 제정한 <대명력>은 391년에 144개 윤달을 두는 새로운 역법이다. 상당히 정밀한 역법이지.”

“이렇게 정밀한 <대명력>을 반드시 채용해야겠네요.”

“<대명력>은 이 부분에서만 앞서 가는 것이 아니다. 더 앞서가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역법에 세차(歲差)를 도입한 것이다.”

조환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세차가 무엇이에요? 어떻게 발견하셨는데요?”

“천문관측과 수치계산을 통해 태양이 한 해에 한 바퀴를 돈 후 항상 그 전해의 동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차이는 미세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면 1도씩 차이가 나는데 이런 현상을 세차라고 말한다. 물론 세차는 내가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전한(前漢)의 등평(鄧平)과 후한(後漢)의 유흠(劉歆), 가규(賈逵)도 모두 이런 현상을 관측했지. 동진(東晉)의 우희(虞喜)는 첫 사람으로 세차를 역법에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동지가 50년에 1도씩 뒤로 밀려난다는 것을 계산했다. <원가력>을 제정한 하승천(何承天)은 사실 세차의 존재를 알며 세차가 100년에 1도씩 차이 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원가력>에 세차를 응용하지 않았다. 나는 세차가 45년 11개월에 1도씩 뒤로 밀린다는 것을 계산했다. 그래서 이 세차를 <대명력>에 도입했다.”

“아버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조충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명력>에는 또 새로운 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교점월(交點月)에 근거해 일식과 월식의 시간을 계산한 것인데 이 역시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이 정확하다.”

조환이 또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교점월은 또 무엇이에요?”

“우리는 태양의 운행궤도를 황도(黃道)라고 부르고 달의 운행궤도를 백도(白道)라고 부른다. 교점월은 바로 연속 두 번 황도와 백도의 교차점을 지나는 전후 간격을 말한다. 교점월의 시간은 추산할 수 있는데 내가 계산한 교점월의 일수는 27.212223일이다…”

<대명력>의 내용을 손금 보듯 하는 조충지는 강물이 흐르듯 새로운 부분을 설명해 나갔다. 그러다가 아들이 졸려서 하품을 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말을 그치고 조환을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이튿날 조충지는 조정에서 대법흥과 치열한 변론을 벌였다. 대법흥은 고서에 나온 성인과 현인들을 내걸고 조충지의 <대명력>을 눌렀다.

“동지(冬至)의 태양이 언제나 정해진 위치에 이른다는 것은 고대 성인과 선현들이 계산해낸 것으로 억만년이 지나도 개변될 수 없소. 그런데 조대인이 동지점이 해마다 조금씩 옮겨진다고 하면 이건 하늘의 이치를 모함하고 성인을 배반한 것이 아니겠소?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대역무도의 죄라 할 수 있소! 19년 중에 7개의 윤달이 든다는 현재의 역법은 고대의 선현들이 제정한 것으로 영원히 개변할 수 없소. 조대인 같이 견문이 짧고 무지한 속인이 무슨 자격으로 선현의 역법을 고치겠소?”

대법흥의 무지와 망령을 우습게 여긴 조충지가 떳떳하게 말했다.

“동지점의 변화는 내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선인들이 벌써 이를 기록했습니다. 나는 다만 몸소 태양을 관측하면서 선인의 관점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무릇 사실을 보아야지 과거만 믿고 현재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몇 년 동안 나는 동지 전후의 며칠 동안 정오의 해 그림자 길이가 변한다는 것을 관측하고 동지의 일자와 시각을 정확하게 계산했습니다. 사실은 19년 중에 7개의 윤달이 든다는 것이 정확하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낡은 역법이 정확하지 않아도 영원히 고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설마 영원히 잘못 된 것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명력>이 <원가력>보다 못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십시오. 만약 <대명력>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나는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대명력>의 단점을 알지 못하는 대법흥은 태양운행의 늦고 빠름, 달운행의 늦고 빠름, 해 그림자의 길고 짧음과 같은 일반적인 천문지식을 장황하게 설명했고 그럴 때마다 조충지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자 할 말이 없어진 대법흥은 억지를 부렸다.

“<대명력>이 아무리 좋아도 채용할 수 없소.”

“기존 역법의 단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역법의 장점을 발견했다면 새 것으로 낡은 것을 바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조충지의 설명에 진정으로 승복했지만 대법흥의 권세가 두려워 감히 조충지의 견해를 따르지 못하고 대법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유독 소상지(巢尙之)라는 대신 한 사람이 조충지의 견해를 지지했지만 궁극적으로 <대명력>은 송나라 치하에서 끝내 채용되지 못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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