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2 08:59:33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조충지 편: 제3회 1500여년 전의 원주율

제3회 1500여년 전의 원주율

조충지는 희미한 등불을 빌어 길이가 몇 치밖에 안 되는 막대기를 들고 무언가를 계산했다. 그는 이렇게 수십 년을 하루 같이 매일 원주율을 계산하고 그 계산결과를 기록했다. 그리고 오늘 3.1415962라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조충지는 환호했다. 조충지는 주판도 없이 짧은 막대기 하나로 원주율이 3.1415926과 3.1415927 사이에 있다는 것을 계산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조충지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섰기에 이런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 삼국(三國) 시대의 유휘(劉徽)는 할원술(割圓術)에 근거해 원주율이 3.14라고 계산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휘율(徽率)’이라고 부른다.

조충지는 ‘휘율’과 유휘의 할원술에 근거해 지름 10척의 원을 만들고 그 원을 분할하며 계산했다. 그가 원을 192변형으로 분할해서 얻은 ‘휘율’의 수치가 3.14였다. 조충지는 이런 연구결과를 얻고서도 탐구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분할을 계속해 원을 2만 4천 5백 7십 6변형으로 분할하고 모든 다변형의 한 변의 길이를 계산했으며 마지막에 지름 10척의 원주길이가 3장(丈, 1장=10자) 1자(尺, 1자=10치) 4치(寸, 1치=10푼) 1푼(分, 1푼=10리) 5리(厘, 1리=10호) 9호(毫, 1호=10초) 2초(秒, 1초=10흘) 6홀(忽)에서 3장 1자 4치 1푼 5리 9호 2초 7홀 사이라는 것을 계산해냈다. 다시 말하면 원의 지름이 1일 경우 원주는 3.1415927보다 작고 크다고 해도 1/1000만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충지의 이 정확한 수치는 후에 ‘조율(祖率)’이라 불렸다.

1500여년 전 인류는 몽매하고 어두운 중세기를 살았다. 현대적인 과학기술도 없던 당시 이렇게 정확한 원주율이 과연 쓸모가 있었을까? 답은 물론 ‘쓸모가 있다’이다. 수학 이론 연구는 언제나 과학기술과 생산의 발전보다 앞선다. 수학이론이 선행되지 않으면 인간의 과학기술 진보는 상상하지도 못하며 인류사회도 근본적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수학이 가장 기초적인 자연과학이라고 말한다. 실용성을 지나치게 중시한 중국인들은 학문의 실용적 가치를 너무 중시했고 그렇기에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연구는 그렇게 중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휘와 조충지와 같은 이런 과학이론가들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그들이 참으로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론연구를 놓지 않았으므로.

물론 조율은 고대 중국의 수학이론 수준이 높음을 보여주는 외 당시의 생산실천의 수요도 만족시켰다.

가장 통속적이고 알아듣기 쉬운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조충지는 도량형을 연구할 때 자신이 연구한 이 원주율 성과에 근거해 용기의 용적을 계산했다. 모양이 원추형이고 깊이가 1자인 고대 용기의 일종인  ‘부(釜)’의 용적을 계산하려면 원주율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충지는 그의 정확한 연구를 통해 ‘부(釜)’의 정확한 수치를 계산해냈다.

조충지는 또 조율을 이용해 한(漢) 나라 유흠(劉歆)이 만든 원주체인 ‘율가량(律嘉量)’의 용적을 다시 계산했다. 그것은 유흠의 계산방법과 원주율 수치가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흠은 원주율이 대체로 3과 같다고만 알았기에 그가 계산해낸 용적치는 사실상의 수치와 일부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조충지는 정확한 ‘조율’로 유흠의 용적치를 수정해 사람들의 일상에 편리를 제공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용기를 제조할 때 모두 조충지의 ‘조율’을 채용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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