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7 09:39:06 출처:cri
편집:李仙玉

[항우 편-1] 봉기의 기반을 닦다

(사진설명: 항우의 동상)

일대의 梟雄 항우

고대 중국의 천재적인 군사가 항우(項羽)는 진(秦)나라에 반항해 회계(會 㮷)봉기를 일으켰고 진나라 멸망 후에는 18개 제후 중 한 명인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승승장구했으나 초한(楚漢)전쟁을 계기로 내리막 길을 걷는다.

항우는 거록(巨鹿)전투에서 소수의 봉기군으로 진나라의 주력부대를 격파해 명성을 날렸으며 그로 인해 당시 제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후보였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자성어 ‘파부침주(破釜沉舟)’와 ‘작벽상관(作壁上觀)’은 모두 이 전쟁에서 기원했다.

그런데 백전백승의 항우가 왜 연전연패의 유방(劉邦)에게 패했을까? 거록전투에서 그렇게 과단성이 있던 항우가 홍문연(鴻門宴)에서는 왜 그토록 우유부단했을까?

일대의 효웅(梟雄) 항우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군수의 목을 베어 봉기의 기반을 닦다

진나라에 반항하는 불길이 점점 더 세차게 타오르고 도처에서 반군의 깃발이 휘날렸다. 난을 피해 오중(吳中)에 있던 항량(項梁)도 기회를 기다렸으나 수중에 아무도 없었다. 항량은 마당에서 검무를 추는 조카 항우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천하무적의 힘을 가진 항우는 간과할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다. 맨손으로 정(鼎)을 들어 올리는 저 기개는 부친의 장수 풍모를 이어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항씨 가문은 원래 초(楚)나라의 귀족이었고 자손들은 대대로 초나라의 장군이었다. 항량의 부친, 즉 항우의 조부 항연(項燕)은 생전에 혁혁한 무공을 세운 유명한 장군이었으나 진나라 왕전(王翦)의 군대에 포위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기에 진나라의 폭정에 반대해 부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은 항량 인생의 전부의 의미가 되었다.

키가 팔척이 넘고 용맹한 항우를 바라보며 항량은 갑자기 과거의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그 해 진시황제(秦始皇帝)가 회계를 순시하면서 오중을 경유했다. 그 때 나와 항우는 관객들의 무리에 끼어 멀리서 엄청난 그 행렬을 구경했다. 항우는 진시황제의 수행행렬이 호호탕탕하고 마차들이 강물이 흐르듯 규모가 크고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저 황제 기세가 대단하네. 우리가 저 황제를 대체할 수 있겠다!

나는 놀라서 급히 항우의 입을 막으며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아무 말이나 하지 마라! 멸족을 당할라!

이 일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항량은 이렇게 생각했다.

“내 조카는 재능이 뛰어나서 오중의 젊은이들은 모두 그에게 탄복하고 그를 두려워한다. 우리 항씨 가문의 피에 맺힌 원수는 항우가 갚을 수 있겠다.”

다음 날 항량은 항우를 데리고 회계 군수(郡守)의 저택을 찾아갔다.

“너는 여기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부르면 그 때 들어오거라.”

항량은 이렇게 항우에게 분부하고 군수를 만나러 들어갔다. 그런데 군수가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황하강의 서쪽에서 모두가 반기를 들었소. 보아하니 진나라는 망할 듯 하오. 선수를 쓰면 상대방을 제압하고 상대방을 기다리면 제압당한다는 말이 있소. 나도 봉기를 일으키고 장군과 환초(桓楚)를 대장으로 모시겠소. 그대 생각은 어떻소?”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환초는 거처를 떠났는데 저의 조카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제가 불러들이지요. 그를 보내서 환초를 찾아오게 하시지요!”

항량의 말에 군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들어오라고 하시오.”

방을 나온 항량은 항우의 귓가에 얼굴을 갖다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군수를 죽이거라.”

삼촌을 따라 방에 들어온 항우는 두말 않고 검을 빼서 단칼에 군수의 목을 베었다.

항량은 군수의 인수(印綏)를 착용하고 군수의 수급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 상황을 본 군수의 부하들이 급히 무기를 들고 벌떼처럼 달려 들었지만 항우가 휘두르는 검에 수십 명이 금방 이리저리 쓰러졌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싸울 용기를 잃고 항복했다.

항량은 회계의 권세가들을 불러 모아놓고 봉기를 선언했다. 이어 오중의 청년들을 모으니 그 수가 8천에 달했다. 항량은 항우 1인의 힘으로 회계군수가 된 것이다. 군수가 된 항량은 항우를 비장(裨將)으로 임명해 민심을 위로하게 했다.

항씨 가문은 자자손손 초나라의 장수들이었고 항연(項燕) 장군의 명성은 더욱 높았다. 따라서 항량이 반기를 들자 초나라의 의병들이 분분히 찾아와 항량의 군대는 단번에 7,8만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이 항량의 봉기군에 가담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패지(沛地)의 군대를 거느린 유방과 범증(范增)이었다. 범증은 나이는 70이 넘었지만 계략에 강했다. 범증이 항량에게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장군을 찾아온 것은 장군이 항연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장군께서 초나라 부흥을 이루리라 믿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초회왕(楚懷王)이 진나라에서 붕어한 일을 가엽게 여기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초회왕의 자손을 초 왕으로 옹립하면 더 큰 호소력과 응집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범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항량은 민간을 떠돌며 양치기를 하던 웅심(熊心), 즉 초회왕의 손자를 찾아 그를 초회왕으로 옹립하고 진영(陳嬰)을 상주국(上柱國)에 임명했으며 우대(盱臺)에 도읍을 정했다. 그리고 자신은 무신군(武信君)이라 자처했다.

짧은 시간에 연전연승을 거두고 삼천군(三川郡)에서 진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이사(李斯)의 장남인 삼천군 군수 이유(李由)를 참형한 항량은 교만에 빠져 진나라 군대를 얕보기 시작했다. 영윤(令尹)인 송의(宋義)가 적을 얕잡아 보지 말라고 권고했으나 항량은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사절로 제(齊)나라에 보냈다.

그 때 항량은 정도(定陶)에서 진나라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송의는 제나라로 가는 도중에 항량을 만나러 정도로 가는 제나라 사절 고릉군(高陵君) 현(顯)을 만났다.

송의가 고릉군을 타일렀다.

“무신군의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가도록 하십시오. 빨리 가면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과연 고릉군은 정도에 이르기 전에 항량이 싸움에서 지고 죽음을 당했다는 전갈을 받았다.

초회왕은 초나라 군대가 정도에서 패한 소식을 듣고 무서워 도읍을 우대로부터 팽성(彭城)으로 옮기고 여신(呂臣)을 사도(司徒)로 하고 여신의 부친 여청(呂靑)을 영윤으로 임명했으며 유방을 무안후(武安侯)에 봉하고 탕군장(砀郡長)으로 삼았다.

숙부가 장한(章邯)에 의해 참살되자 항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반드시 장한을 죽여 피 값을 받으리라 맹세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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