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7 09:10:57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심약 편: 제1회 높은 벼슬에 실망하다

사학과 문학의 통재 심약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학자 심약(沈約)이 쓴 <송서(宋書)>는 중국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하나이다. 그 뒤에도 <송서>를 쓴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상대적으로 완전한 사서는 심약의 <송서> 뿐이다.

심약은 또 제일 첫 사람으로 한문의 ‘사성(四聲)’ 성조를 시(詩) 창작에 도입했다. 이로부터 시가(詩歌)는 아름다운 운율을 가지기 시작했고 심약은 율격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당(唐) 나라 때 시가가 성숙된 운율을 가지게 된 데는 운율의 선구자 심약의 공이 크다.

남당(南唐)의 후주 이욱(李煜)이 쓴 “얼굴이 초췌하고 귀밑머리 하얗게 바랬네”라는 뜻의 시구 “심요반빈소마(沈腰潘鬢消磨)”에서 ‘심요’가 바로 심약의 허리를 말하는데 심약은 스스로 ‘슬픔 다이어트 법’을 만들어 백 일 동안 성공적으로 몸무게를 확 줄였다고 전해진다.

사학과 문학의 통재(通才) 심약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높은 벼슬에 실망하다 

등불 심지가 탁탁 두 세번 튀더니 가물거리던 등불이 꺼졌다. 방안은 순간 끝없는 어둠 속에 빠졌다. 채 읽지 못한 <한서(漢書)>를 손에 든 심약은 어둠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머님께서는 내가 긴긴 밤 책만 읽어 몸에 해로울까 걱정하시어 또 등잔의 기름을 몰래 줄이셨구나. 어둠 속에서는 책은 읽지 못하지만 오히려 더 잘 기억하고 더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님께서는 모르시지. 통독한 문장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잠들지 못하는 이 밤이 몸에는 더 해롭지 않겠는가?”

심약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에 나가 희미한 별빛을 밟으며 홀로 거닐었다. 여위고 긴 그림자가 마당에 비껴 마치 가냘픈 여인의 몸집을 방불케 했다. 그렇다고 심약이 여성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미남자인 그는 다만 날 때부터 우아한 기질을 갖추고 여성 고유의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카시아 나무 주변을 배회하는 그의 사색은 머나먼 과거로 흘러 갔다…

우리 심(沈)씨 가문은 원래 강동(江東)의 명문가였다. 조부는 송(宋) 나라의 정로(征虜) 장군이었고 부친은 회남(淮南) 태수(太守)를 지냈다. 다만 부친은 유훈(劉勛)을 토벌하려는 유준(劉駿)의 거사에 호응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나와 모친은 그 화를 피하고자 고향을 등지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후에 유준이 보위에 오르면서 사면령을 내려 우리는 다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여전히 외로웠고 고생스러웠다. 몰락한 가문의 명성을 다시 회복하려면 밤낮으로 열심히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사람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다고 나를 칭찬하고 날 때부터 왼쪽 눈의 눈망울이 두 개에다 허리에 보라색 점까지 있어 정말로 하늘이 나를 내셨으니 반드시 어딘가 쓸모가 있을 것(天生我才必有用)일 수도 있겠지만 하늘이 노력하지 않는 나에게 기회를 주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밤낮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온갖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오늘날 학문을 쌓고 능력도 닦았으니 이제 세상에 나갈 때가 되었다. 영주(州) 자사(刺史) 채흥종(蔡興宗)이 인재를 아낀다는데 먼저 그를 찾아가서 재능을 펼쳐볼까

세상에 나가려는 마음을 먹은 심약은 이튿날 바로 가족을 거느리고 채흥종을 찾아 영주로 갔다. 채자사는 과연 벌써부터 심약이 비범한 재능을 가진 인물임을 알고 아주 기뻐하며 심약을 안서(安西) 장군부의 외병참군(外兵參軍) 겸 기실(記室)로 임명했다. 채흥종은 형주(荊州) 자사와 정서(征西) 장군이 된 후 심약을 형주에 데려다 정서장군부 기실참군(記室參軍) 겸 궐서(闕西) 현령(縣令)을 맡게 했다.

진정으로 심약을 높이 산 채흥종은 또 늘 자신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채 기실은 품행이 고상하고 학문이 두터우니 너희들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에게서 잘 배우며 그를 한 가족처럼 대해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흥종이 불행히 세상을 떴다. 그리고 강남에는 또 새 왕조가 들어서서 소도(蕭道)가 제(齊) 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다. 동궁(東宮)에서 문서를 관리하던 심약은 해박한 지식과 선비다운 풍모, 뛰어난 웅변능력으로 문혜(文惠) 태자의 높은 평가와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태자는 심약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항상 줄지어 태자를 만나려는 황실성원과 귀족들을 다 물리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약하고만 독대했다.

심약이 태자에게 말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황실성원들과 귀족들을 만나지 않으시면 전하의 명성에 누가 될 것입니다.”

“채기실은 잘 모르시오. 나는 늦잠이 많은데 채기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만 잠자는 것을 잊게 되오. 만약 그런 나를 일찍 일어나게 하려면 채기실이 일찍 입궐해야 할 것이오.”

태자의 대답에 심약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태자는 그 후 더욱 심약을 중용해 태자부의 가령(家令)을 시킨 동시에 조정의 저작랑(著作郞)도 맡게 했으며 그 뒤에는 또 그를 중서랑(中書郞)과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태자의 동생인 경릉왕(竟陵王)도 인재들을 모아 심약은 경릉왕부에서 사귄 난릉(蘭陵)의 소연(蕭衍), 랑야(琅邪)의 왕융(王融), 진군(陳郡)의 사조(謝朓), 남향(南鄕)의 범운(范運), 악안(樂安)의 임방(任昉) 등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라 불렸다. 심약은 또 후에 양무제(梁武帝)가 된 소연(蕭衍)과도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제나라의 황제는 주마등처럼 바뀌어 십여 년 동안 벌써 5명의 황제가 보위에 올랐다. 하지만 심약을 아끼는 문혜태자는 일찍 별세하고 경릉왕도 황제가 되지 못했으며 제명제(齊明帝)의 뒤를 이은 동혼후(東昏侯) 소보권(蕭寶卷)이 보위에 오른 후 온갖 만행을 저질러 조정에 혼잡이 빚어졌다. 당시 심약은 벼슬이 좌위(左衛) 장군에 산기상시(散騎常侍)에 까지 이르렀으나 연로한 모친을 핑계로 조정에 사표를 냈다. 하지만 조정은 심약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관군(冠軍) 장군과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로 승진시켰으며 후에는 또 그를 정로(征虜) 장군과 남청하(南淸河) 태수(太守)로 임명했다.

점점 더 높은 관직을 가졌지만 심약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그는 어둡고 혼란한 조정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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