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9 09:31:18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심약 편: 제3회 명시와 사서를 남기다

제3회 명시와 사서를 남기다

안성내사(安成內史) 범수(范岫)가 지병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자 심약은 유난히 슬펐다. 이제 나이가 드니 헤어졌다가 쉽게 다시 만나던 젊었을 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제 헤어지고 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찬 바람이 불고 낙엽이 바람에 날렸다. 심약은 아카시아 나무를 바라보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 해 사조(謝)가 모함을 받아 어명으로 형주(荊州)에서 건강(建康)으로 와서 형주의 동료에게 써준 시 한 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시는 참으로 잘 썼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사강락(謝康樂)의 산수시(山水詩)를 확대 발전시켰기에 산수시가 시단의 한 유파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사조는 특히 시의 서두를 잘 뗀다. 큰 강은 밤낮없이 흘러 가고(大江流日夜) 나그네의 마음은 하염없이 슬퍼지네(客心悲未央)라는 첫 구절은 참으로 정취와 장면이 어울리고 기백도 웅장해서 마치 그의 슬픔이 큰 강처럼 쉬지 않고 밤낮으로 흐르듯 한다. 여러 왕들이 황위를 다투는 중에 무고한 인재가 정치의 소용돌이에 빠졌으니 사조의 슬픔에도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알아준 수왕(隨王)의 은혜를 생각해 시안왕(始安王) 강탁(江)을 옹립하지 않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 해 그는 겨우 36살이었지. 그리고 올해 나는 벌써 72살이 되었다

절친인 사조를 그리며 심약은 마음 속에 차오르는 슬픔을 걷잡을 수 없어 방에 들어서자 붓에 그리움을 실어 시 <상사조(傷謝朓)>, 즉 <사조를 슬퍼하며>를 썼다.

상서 리부랑 사조는 참으로 뛰어난 인재라(吏部信才傑)

문단에 우뚝 서서 그만의 특색을 자랑하네(文峰振奇)

힘 있는 음조 정연한 음률 금석과 같고(調與金石諧)

뛰어난 사색은 바람 따라 구름 위를 나네(思逐風雲上)

그런데 어이 알았으랴 그 순결한 품성이(言凌霜質)

홀연 인간관계에 빠져 사라질 줄을(忽隨人事往)

옥과 같은 소중한 보물 억울하게도(尺璧爾何)

모함으로 옥사하여 저 땅에 묻혔도다(一旦同丘壤)

심약은 사조를 추모하는 시를 쓴 다음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무리 해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또 사조와 함께 ‘영명체(永明體)’라는 새로운 시체(詩體)를 만들던 과거를 돌이켰다…

그 때, 나와 주옹(周)은 사부(辭賦)를 읽을 때 네 가지 성조(聲調)가 있기에 시를 낭송하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높고 낮은 소리와 멈춤의 조화로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옹은 <사성절운(四聲切)>을 써서 네 개의 성조를 평(平)과 상(上), 거(去), 입(入)으로 나누었다.

내가 사조를 찾아갔다.

시를 쓰고 부를 읊을 때 사성(四聲)에 유의해야 하네. 사부 중의 글자는 고저(高低)와 경중(輕重)이 다르니 서로 사이를 두고 써야 하네. 그래야 음절이 풍부하고 조화로워 읊으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높고 낮게 기복을 이루며 듣기 좋아지네.

내 말에 사조가 대답했다.

글자의 뜻도 보고 독음의 조화도 감안해서 쓴 시라야 진정한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네. 우리 후세에 모범을 보입세.

그 때부터 우리는 시를 쓸 때 반복적으로 문장을 다듬어 내용과 음조(音調)의 아름다움을 모두 감안했다. 그렇게 시를 쓰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그렇게 쓴 시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나는 또 시를 쓸 때 반드시 음률을 위해 피해야 하는 여덟 가지 약점을 귀납해 팔병(八病)이라 칭했다. 물론 이런 요구를 지켜가며 시를 쓰기란 아주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이런 요구에 부합하는 좋은 시를 적지 않게 써냈다. 이런 새로운 시는 제무제(齊武帝) 영명(永明) 연간에 나타났기에 영명체라 불린다.

수천 년 동안 시를 쓴 사람들은 모두 네 가지 성조를 발견하지 못했고 시의 성조 문제도 깨닫지 못했다. 오직 나만이 마음 속으로 성조를 깨닫고 성조에 담긴 무궁한 묘미를 누렸다. 나는 내가 연구한 시가의 성률(聲律) 이론을 묶어 <사성보(四聲譜)>라는 저서를 펴냈다. 나는 신의 한 수인 이 책이 반드시 후세의 시가 창작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불교이론에 빠지시어 나의 발견과 연구를 전혀 관심하지 않으신다. 폐하께서는 주옹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그대들은 매일 글자의 성조를 연구하고 시를 씀에 무슨 평상거입(平上去入)을 논하는데 하나 물읍시다. 도대체 사성이란 무엇이오?

주옹이 아뢰었다.

천자성철(天子聖哲)이라는 이 네 글자의 성조가 바로 평상거입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성입니다.

주옹은 참으로 명답을 한 것이다. 주옹은 확실히 사성 연구의 대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명답도 폐하의 취미를 이끌어내지 못해 지금도 폐하께서는 전혀 사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신다. 아아. 우리 왕조는 주옹의 <사성절운>과 나의 <사성보>만 후세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에 빠진 심약은 홰를 치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가 눈부신 햇살이 창살을 뚫고 비쳐 들어오는 바람에 놀라서 잠에서 깼다. 이날 십리정(十里亭)에 가서 범무빈(范懋賓)을 배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범무빈은 안성내사(安成內史) 범수(范岫)의 자(字)이다. 심약은 급히 의관을 바로 하고 문을 나섰다.

심약은 이번 송별에서 그가 지은 시가 후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그의 대표작이고 또 후세의 시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가 바로 <별범안성(別范安成)>, 즉 <범안성과 이별하며>이다.

일평생 젊은 시절에는(平生少年日)

이별해도 앞날 기약하기 쉬웠지(分手易前期)

그대와 함께 늙어 저무는 시기(及爾同衰暮)

이별해도 좋은 시간 다시는 없네(非復別離時)

한 동이 술이라고 말하지 마라(勿言一樽酒)

내일은 다시 권하기 어려우리(明日難重持)

꿈속에서도 그대 만나는 길 찾지 못하면(夢中不識路)

우리 서로 어떻게 이 그리움 달랠까(何以慰想思)

후세에 많은 명구들이 모두 이 독창적인 시에서 나왔다. 남조(南朝)의 평론가 종영(鍾嵘)은 심약의 시는 처량한 시구로 한 사람의 한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박학다식한 심약은 문학적으로 ‘영명체’풍격의 시를 써서 강동(江東)에서 독보적인 대가로 인정된 외 사학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20대부터 사서에 몰두한 심약은 수십 년 동안 <진서(晉書)> 110권과 <제기(齊紀)>, <양무기(梁武紀)> 등 역사서를 펴냈다. 후에 그는 또 어명에 따라 1년 안에 <송서(宋書)> 편찬을 마쳤다. 사서의 편찬에서 심약의 성과는 확실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편찬한 <송서>는 모두 실전되었지만 그의 <송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이십사정사(二十四正史) 중 하나가 된 것만 봐도 사학에서 거둔 그의 눈부신 성과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 시기의 사학자 채동번(蔡東藩)은 심약의 <송서(宋書)>가 ‘숨기고 드러내지 않은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심약이 송(宋)과 제(齊), 양(梁) 세 왕조에서 벼슬을 했고 양무제(梁武帝)도 한 때 송나라에서 벼슬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송효무제(宋孝武帝) 때부터 송명제(宋明帝) 때까지의 역사사실을 <송서>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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