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5 10:48:44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이정 편: 제2회 큰 공으로 인정을 받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이정)

제2회 큰 공으로 인정을 받다

당시 양(梁)나라의 세력범위는 오늘날의 호북(湖北)과 호남(湖南), 강서(江西)일대를 망라했고 국도는 강릉(江陵)에 두었다. 8월 장마철이 되자 강물은 화난 용처럼 사천(四川)의 삼협(三峽)을 벗어나 노호하며 동쪽으로 흘렀다. 이정이 오늘날의 중경(重慶)을 말하는 기주(夔州)에 군사를 주둔했다는 것을 안 양나라 임금 소선(蕭銑)은 장마철이기에 이정이 사천을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해 양나라의 군사를 자귀(秭歸)로부터 이릉(夷陵)에 이르는 지역에 분산해 주둔시켰다. 거기다가 양나라의 군사는 휴식정비 중이어서 무방비 상태였다.

하지만 이정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출병하려면 적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향하고 적이 방어하지 않은 곳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9월 초사흘, 이정은 이릉으로 출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수하 장군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이 때 삼협을 벗어난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이릉에 이르기도 전에 배가 좌초하고 우리 모두 죽어 있을 것입니다.”

“며칠 늦게 공격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장마 후 출병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잘못 출병하면 물고기 밥이 되는데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정이 입을 열었다.

“전쟁에서는 신속함이 첫째입니다. 기회는 한 번 잃으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지금 소선은 우리가 군사를 집결하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만약 이 때 선박을 이용하면 순식간에 백 리를 달려 이릉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적수는 손 쓸 사이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상책입니다. 설령 소선이 우리의 공격을 알아차리고 급히 군사를 집결시킨다 해도 그 때는 벌써 늦어 기필코 패할 것입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이정을 아주 신뢰하고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통솔장군 이효공(李孝恭)이 과감하게 결정했다.

“이총관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날이 밝으면 배에 올라 이릉을 향해 출격합시다!”

날이 밝자 전체 장병들이 배에 올라 나는 듯이 삼협을 벗어나 이릉으로 향했다.

적군이 삼협을 벗어나 곧 이릉에 이른다는 것을 안 소선은 대경실색했다. 그는 이릉에 주둔한 수만 명의 정예군사 전부를 대장군 문사홍(文士弘)에게 맡겼다.

“반드시 이릉을 지켜야 하오! 이릉이 격파되면 그 뒤에는 적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요새가 없어서 국도가 위험하게 되오!”

오늘날의 의창(宜昌)을 말하는 이릉은 삼협의 출구에 위치한 장강의 마지막 요새였다. 문사홍은 급히 강기슭과 수면에 군사를 배치해 결전을 준비했다.

조군왕(趙郡王) 이효공이 이정에게 말했다.

“양나라 군사가 수로와 육지 두 갈래로 나뉘어 우리 군사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적군 깊숙이 들어온 우리가 속전속결하지 않으면 난국에 빠져 그 결과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이정이 대답했다.

“이릉은 양나라의 마지막 방어선입니다. 이 곳의 전력은 기필코 약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기세 드높게 결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럴 때는 그들과 맞서지 말아야 합니다. 병법에 적의 예봉은 피하고 해이해질 때 공격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적군의 기세가 쇠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젊고 혈기왕성한 이효공은 기세 사납게 막아선 적군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총관은 후방을 지키십시오. 내가 나가서 양나라 군사와 겨루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효공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선박을 몰아 적군과 맞섰다. 이효공의 출전을 막지 못한 이정은 혈기왕성한 장군이 패전해 돌아오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첫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문사홍의 군사들은 기뻐 날뛰며 앞다투어 전리품을 빼앗았다. 이정은 적군의 진지가 혼잡해지고 사기가 쇠진한 것을 보고 즉시 그 기회에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해서 선박 4백척을 노획하고 적군 1만여 명을 사살해 적군의 주력부대를 소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정은 또 정예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강릉(江陵)으로 쳐들어가 양나라 수군(水軍)과의 교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소선은 진지를 포기하고 강릉성으로 도주했다.

또 몇 백 척의 적함을 노획한 이정이 이번에는 부하들이 경악할만한 명령을 내렸다.

“모든 적함의 밧줄을 풀어 배가 모두 강물을 따라 흐르게 하라.”

이정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해하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적진 깊숙이 들어와 비록 승전하기는 했지만 후원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해 있다. 이와 반면에 적군은 우리 주변에 집결하고 있기 때문에 적들의 원군이 사면에서 우리를 포위한다면 우리는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 날개가 달렸다 해도 이 포위망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이 적함들을 강물에 떠내려 보내면 강릉으로 오던 원군은 양나라의 수군이 전부 격파되고 국도도 점령된 줄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 원군의 민심이 흩어져 공격을 멈추고 관망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강릉을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이정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군사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서 급히 적함의 밧줄을 풀었다. 몇 백 척의 적함은 조종사가 없는 유령 선박처럼 수면에 흩어져 하류로 흘러내려 갔다.

이정은 또 각지로 간첩을 파견해 “이정의 군대가 파죽지세로 강물을 따라 내려와 먼저 이릉을 격파하고 또 강릉을 점령했다”는 요언을 퍼뜨리게 했다. 수면으로는 무인 선박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강릉으로 향하던 원군은 모두 양나라의 국도가 정말로 점령된 줄 알고 깜짝 놀라며 각자 자신의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결과 여러 갈래의 원군은 서로 관망하면서 책임을 상대방에게 밀며 누구도 앞장서서 죽기살기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원군의 그런 상황도 모르고 강릉성에 갇힌 소선은 언제면 저 하늘가에 원군의 깃발이 날릴까 싶어 두 눈이 뚫어져라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항복을 권하는 이정의 편지가 달린 화살이 소선의 마음에 박혀 한없는 고통을 자아내기라도 하는 듯 무더기로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안의 식량이 소진되고 병사들이 정변을 일으켰다. 궁지에 빠진 소선은 성 위에 백기를 걸고 성문을 열수밖에 없었다.

군사를 이끌고 입성한 이정은 엄격한 규율로 추호도 백성들을 범하지 않도록 군사를 통제해 민심을 얻었다. 백성의 이익을 지키는 이정의 정책으로 양나라의 다른 도시들도 분분히 성문을 열고 스스로 항복했다. 고금중외에 싸우지 않고 상대의 항복을 받는 것은 항상 최고로 현명한 전략이다!

오천의 정예군사로 양나라를 멸한 이정은 그 공을 인정 받아 오늘날의 원수(元帥)에 해당하는 상주국(上柱國)에 임명되었으며 삼등 공작(公爵)인 영강현공(永康縣公)에 책봉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정은 형주(荊州) 자사(刺史) 벼슬도 받았다.

큰 무공으로 엄청난 부귀를 얻은 이정이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남방의 할거세력을 귀순시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오령(五嶺)을 넘어 남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싸울 필요도 없었다. 남방 각지에 할거한 세력들은 소수의 군사로 양나라를 손쉽게 멸한 이정이 성품도 정직할뿐더러 엄격하게 군사를 다스리며 말한 대로 한다는 것을 알고 분분히 이정에게 사절을 파견해 당나라 귀순 의사를 밝혔다.

이정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전술을 또 한 번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이세민(李世民)이 왕세충(王世充)을 멸한 후 이정은 또 다시 군력을 집중해 단양(丹陽)에서 스스로 황제로 칭한 보공탁(輔公袥)을 제거해 강남(江南)을 기본 평정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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