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7 10:57:43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이정 편: 제4회 전설의 무신이 되다

(사진설명: 무신 탁탑천왕이 된 이정)

제4회 전설의 무신이 되다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이정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었다. 상서우복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을 말한다. 신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정은 오히려 더욱 신중을 기해 소심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그는 항상 말주변이 없는 듯이 침묵하고 말을 아꼈다.

이정은 또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는 발의 통증을 이유로 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장기간 휴양만 윤허하고 그의 퇴임을 수락하지 않았다. 황제는 또 살찐 땅과 호화로운 저택, 많은 금은보화를 하사하고 영수목(靈壽木)으로 만든 지팡이도 선물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황제는 사나흘에 한 번씩 이정의 저택을 찾아가 나라와 군사의 대사를 논의했다.

정관(貞觀) 9년(635년), 서북의 소국인 토욕혼(吐谷渾)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당 나라를 침공하는 무모한 전쟁을 일으켰다. 이세민이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정이 군사를 통솔하면 아주 좋을 것이나 그는 연로하고 걷는 것도 불편해하니 짐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소.”

이세민의 신변에는 당연하게 황제의 속마음을 읽는 총명한 신하가 적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곧장 이정을 찾아가 황제의 의사를 전했다. 이정은 그 신하보다도 더 총명해서 채찍을 보기도 전에 스스로 달리는 늙은 소와 같이 즉시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찾아갔다.

“서북변경에 전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내 비록 올해 65살의 노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전장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정이 출정하려 한다는 것을 안 이세민은 심히 기뻐 그를 서해도(西海道)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고 천 명의 명장을 인솔하게 했다.

군마는 눈 덮인 벌판을 달리고 장병들은 야외에서 먹고 자며 출전했다. 당나라 군사는 고산(庫山)에서 토욕혼의 군사와 조우해 첫 승전고를 울렸다. 당나라 장병들이 승리를 경축하는데 척후병이 와서 보고했다.

“복윤카간(伏允可汗)이 서쪽으로 철수하면서 우리의 군마가 사료가 없어 더는 싸우지 못하게 하려고 철수하는 길에 풀밭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장군들이 입을 모았다.

“마초를 해결하지 못하면 적군을 계속 추격할 수 없습니다.”

이 때 후군집(侯君集) 장군이 나섰다.

“군신이 산산이 흩어져 도주하는 이때 그들을 멸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지금 쫓아가 그들을 멸하지 않으면 이제 기필코 우환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정이 결단을 내렸다.

“후장군의 말에 일리가 있소. 적을 살려두어 우환으로 남길 수 없소. 지금 당장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쫓아가 적군을 깡그리 전멸합시다!”

이정은 즉시 자신은 설만균(薛萬均), 이대량(李大亮)과 함께 북쪽 길로 적군을 추격하고 후군집과 이도종(李道宗)은 남쪽 길로 동시에 서쪽으로 추격해 토욕혼 대군을 전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싸움은 아주 힘들었다. 북로군(北路軍)은 만두산(饅頭山)과 우심퇴(牛心堆), 적수원(赤水源)에서 각기 토욕혼 군사와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노획한 소와 양을 군량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2천 리(里, 1리=0.5km)가 넘는 먼 길을 달려 사막 깊숙이 들어가 복윤카간과 결전을 벌인 남로군(南路軍)도 갈증이 나면 말 피를 마시고 허기가 지면 생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2개월간 이어진 전투의 끝에 복윤카간이 죽고 그의 아들 모용(慕容)이 부하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귀순했다.

그로부터 청해(靑海)는 당나라의 국토가 되었다.

이정은 또 한 번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 때 출전의 기회를 놓친 이주(利州) 자사(刺史)가 광주(廣州) 자사와 공모해서 역모를 꾸민다고 이정을 모함했다.

당태종이 사람을 파견해 사실을 확인한 후 이정을 모함한 자들을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지만 이정은 하늘을 나는 솔개(戾天飛鳶)처럼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望峰息心). 이정은 또 그때부터 두문불출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심신을 다스리며 천수를 누렸다. 그 때까지도 이정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던 미인이 여전히 곁을 지키니 이정의 노후는 과연 부족함이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당나라 최고의 무신이 세운 불후의 공적을 잊지 않고 이정을 위국공(衛國公)에 책봉했으며 그의 화상도 이십사공신(二十四功臣) 중 한 명으로 능연각(凌煙閣)에 오르게 했다.

정관(貞觀) 23년(649년) 이정은 천수를 다하고 79세에 평안하게 두 눈을 감았다. 당태종은 이정을 자신의 무덤인 소릉(昭陵)의 옆에 부장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또 서한(西漢)의 명장들인 위청(衛靑)가 곽거병(霍去病)의 무덤을 본떠서 이정의 무덤 앞에 궐문을 축조하고 봉분의 모양은 돌궐의 연연산(燕然山)과 토욕혼의 적석산(積石山)을 모방하게 했다.

불후의 무공을 세운 이정은 사후 가끔 영험을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이정을 위해 사당을 세웠고 그러면서 이정은 점점 신격화되어 신선도교(神仙道敎) 중 유일한 무신인 탁탑 이천왕(托塔李天王)이 되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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