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4 10:10:12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이세민 편: 제4회 민심을 얻은 황제

(사진설명: 이세민의 능묘 일각)

제4회 민심을 얻은 황제

장손순덕(長孫順德) 장군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움을 받고자 한 사람의 비단 다섯 필을 받았다. 하지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자 뇌물을 준 그 사람은 홧김에 장손순덕 장군을 고발했다. 그로 인해 장손순덕 장군이 뇌물을 받은 스캔들이 태종제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태종제는 장손순덕을 불러 대신들 앞에서 이렇게 물었다.

“장군 집에 비단이 부족하다고 들었소. 여인들의 옷을 만들 비단이 없소? 짐의 장손황후가 아껴 쓰며 남긴 비단 50필이 있는데 장군에게 하사하리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 장손순덕이 머리를 조아려 사은을 표하고 물러갔다.

마주(馬周)가 참지 못하고 아뢰었다.

“장손순덕은 우리 대당 관리들의 청렴한 명성에 해를 끼쳤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를 엄하게 응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선물을 내리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의 탐욕을 조장하시는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응징으로는 탐욕을 해소할 수 없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장사를 하는 사람은 있어도 밑지는 장사를 하는 사람은 없다’는 속담이 있지 않소?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 해도 이익이 있는 한 탐욕은 불에 타버린 풀처럼 봄바람이 불면 또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소. 짐은 대신들이 모두 수치심을 갖추어 횡령이란 자신의 여인이 다른 사내의 꾀임에 들어 도주한 것처럼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소. 짐이 뇌물의 열 배가 되는 비단을 장손순덕에게 하사했으니 그가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워할 것이오. 그가 만약 수치심이 없다면 짐승에 불과할 터이니 엄하게 응징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과연 수치스럽게 생각한 장손순덕은 집으로 돌아가자 잘못을 인정하고 이제부터는 황금 산을 준다 해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소를 태종제에게 올렸다.

태종제가 장손순덕의 상소문을 대신들에게 말해주자 최인사(崔仁師)가 이렇게 아뢰었다.

“흠차대신(欽差大臣) 최인사 아룁니다. 소신 산동(山東) 청주(靑州)의 역모 사건 심리를 마쳤습니다. 지방에서 구속한 2천 여명의 용의자 중 10명만 진범이고 나머지는 모두 혐의만 있기에 소신은 그들을 모두 석방시켰습니다.”

태종제가 물었다.

“그 10명의 진범 중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는 없소?”

대리사경(大理寺卿)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머리 숙여 죄를 인정했습니다.”

태종제가 말했다.

“좋은 사람 한 명도 억울하게 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 한 사람도 놓치지 않았으니 이 사건 심리를 잘 했소. 최인사, 그대는 어떻게 한 거요? 그 진범들이 번복할까 두렵지 않소?”

최인사가 아뢰었다.

“사건을 심리할 때 대당의 법률을 기준으로 해야지 자신의 이해관계와 득실을 따져서는 안됩니다. 진범을 놓아주었다면 그 책임은 소신이 지겠습니다. 그 2천명을 위해서라면 벼슬을 잃고 목숨도 잃는다 해도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경, 옳은 말이오! 관리라면 법률과 인의(仁義)를 위해 책임져야 할 것이오.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으니 우리는 법을 집행함에 반드시 느슨하고 간단해야 하오. 역모는 사형을 받을 큰 죄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위해 2천 명의 목숨을 억울하게 빼앗는다면 언제 나라를 잘 다스려 죄를 짓는 사람이 없는 형조불용(刑措不用)의 경지에 이르겠소? 법률제도의 최고 경지는 바로 형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지 않소!”

대리사경이 아뢰었다.

“폐하, 영명하십니다! 재작년에 전국에 390명의 사형수가 있었는데 폐하께서 어지신 마음으로 그들에게 1년 말미를 주시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만나게 하셨습니다. 1년 후에 다시 돌아와 형을 받으라고 하셨지요. 결과 사형수들은 폐하께서 내리신 1년의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내면서 폐하의 인자한 마음을 깊이 느끼고 생명의 소중함도 깊이 깨달아 모두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두 약속의 중요성을 알고 성실한 사람이 되고자 1년 뒤에 한 명도 빠짐이 없이 모두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폐하께서는 사형수들이 성실성을 갖추었다면 좋은 사람이 될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의 죽을 죄를 사면하시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새 생명을 얻은 그들 중 한 명도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고 진정한 양민(良民)이 되었습니다.”

방현령이 이어서 아뢰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면서 수양제(隋煬帝)가 남긴 궁녀 삼천 명을 집으로 돌려 보내시고 자유롭게 혼인하도록 하신 것 만 봐도 폐하의 어진 마음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어진 군주는 지금까지 폐하께서 처음이십니다.”

신하들의 말에 태종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전 왕조의 궁녀든 감방의 사형수든 그들도 모두 인간임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군주는 당연하게 법에 의해 나라를 다스려야 하지만 인간을 근본으로 해야 하오. 인간을 근본으로 한다는 것은 바로 백성을 근본으로 해야 민심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오.”

태종제의 인성화된 국정운영은 확실히 민심을 얻었다. 백거이(白居易)가 <칠덕무(七德舞)>에서 쓴 “원망하는 여인 삼천 명을 풀어 주어 궁전 밖으로 내보내시고(怨女三千放出宮) 형기가 되어 옥으로 돌아온 사형수 사백 명은 사면하셨네(死囚四百來歸獄)”라는 구절은 바로 백성을 보살피는 태종제를 칭송한 것이다.

위징(魏征)의 아들이 입궁해서 위징이 위중하다고 아뢰었다. 태종제는 급히 환관을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았다. 위씨가문의 문 앞에는 태종제의 어명으로 약을 가지고 온 환관들로 차 있었다. 태종제는 또 중랑장(中郞將) 이안엄(李安儼)을 파견해 위씨 저택에 머물면서 수시로 위징의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태종제는 또 위징의 저택에 대청이 없는 것을 알고 자신의 전각을 지으려던 건자재를 내주어 닷새 만에 대청을 짓게 했다. 하지만 위징의 병세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태자(太子)와 같이 병문안을 간 태종제가 말했다.

“짐은 형산(衡山) 공주를 경의 아들 숙옥(叔玉)에게 시집보내겠소.”

태종제는 이어 눈물을 흘리며 위징의 손을 잡고 물었다.

“경은 무슨 할 말이 있으시오?”

위징이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과부는 씨실이 없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나라가 망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위징의 말에 태종제는 슬픈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태종제는 위징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날이 밝자 위징이 밤새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태종제는 몸소 조문을 가서 슬프게 울었다. 조정도 닷새 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태종제는 몸소 위징의 비문을 썼으며 9품 이상의 문무대신은 모두 조문을 가라는 어명을 내렸다. 태종제는 위징을 자신과 장손황후가 묻힐 소릉(昭陵)에 묻게 했다.

태종제는 또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以銅爲鏡)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可以正衣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以史爲鏡) 천하의 흥망을 알 수 있으며(可以知興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以人爲鏡)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可以知得失) 위징이 갔으니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구려!”

태종제에 의해 능연각(凌煙閣)에 화상이 걸린 24명의 공신 중 위징의 순위는 방현령의 앞에 속한 네 번째였다. 이로부터 태종제의 마음 속에서 위징의 위치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제는 갑자기 자신이 몸소 쓴 위징의 묘비를 바꾸어 버리고 원래 위징의 장남 숙옥에게 형산공주를 시집을 보내기로 했던 약속도 철회했다.

태종제가 이렇게 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위징은 생전에 태종제에게 비밀리에 중서시랑(中書侍郞) 두정륜(杜正倫)과 이부상서(吏部尙書) 후군집(侯君集)을 재상으로 천거했다. 하지만 후에 두정륜은 잘못을 저질러 파면되고 후군집은 태자 이승건(李承乾)과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태종제는 위징도 태자와 한 통속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것은 위징은 자신이 황제에게 올린 200여 회의 간언을 정리해서 임종 전에 태종제에게 보이지 않고 직접 사관기거랑(史官起居郞) 저수량(褚遂良)에게 넘겼다.

결과 태종제는 난폭한 수단으로 저수량을 핍박해 사관의 기록을 보았다. 위징의 간언 기록을 본 태종제는 화가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위징, 너는 사서에 미명을 남기고 짐에게는 오명을 남기는구나. 이게 양신(良臣)으로서 할 짓이냐? 중서령(中書令) 마주(馬周)도 마찬가지로 짐에게 바른 간언을 많이 했지만 임종에 앞서 짐 앞에서 그 상소문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런데 짐이 대당 최고의 양신이라고 인정하고 사돈까지 맺으려 한 네가 이렇게 하다니, 위징, 너는 인간도 아니구나.”

하지만 사실 위징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태종제가 잘못을 저질렀다. 태종제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은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는 형과 동생을 죽였지만 그러면서 역사에 오명을 남길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또 장손황후와 위징도 죽어 더는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이 없자 그는 천하를 거스르며 강제로 제왕의 기거주(起居注)를 보았으며 자신이 싫어하는 역사사실을 삭제하라고 사관에게 명령하는 우를 범했다.

가장 현명한 중국 황제라 인정되는 당태종이 남긴 진정한 유감은 보위에 오르기 위해 형과 동생을 죽인 사실이 아니라 황제가 보아서는 안 되는 기거주를 보아 사실을 기록하는 중국 사관(史官)의 실록(實錄) 전통을 파괴한 것이다. 이 사건은 마치 용맹하면서도 지혜롭고 준수하면서도 우아한 그의 얼굴에 묻어 있는 쉬파리처럼 영원히 떼어 버릴 수 없는 당태종의 오점으로 남았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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