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현장법사의 동상)
제4회 아름답고 고요한 극락의 길
“홍복사(弘福寺) 스님이 고양(高陽) 공주와 내통해서 폐하께서 그 스님의 허리를 잘라 버리신다네.”
“변기(變機)라는 그 스님은 준수하게 잘 생기고 학문도 두터운데 어떻게 하다 스님이 되었다오? 공주가 그를 죽음에로 내몰았군.”
“이제 금방 서른을 넘겼고 그도 남자이니 어찌 고양공주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겠소?”
“변기는 현장법사의 제자인데 현장법사의 명성도 그 때문에 다 더럽혀졌네!”
“이게 바로 출가인들이 하는 짓이야, 불교를 믿으면 바보야!”
변기의 허리가 잘리는 그 날 장안(長安)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날카로운 여론으로 인해 현장법사도 온 몸에 상처를 입었으며 심지어 온갖 시련을 다 겪고 칼 바람을 헤쳐 나온 태종(太宗)제도 화가 나서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현장법사는 새로 지은 대자은사(大慈恩寺)에서 주지스님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궐해 황제를 모시라는 태종제의 어명이 내려왔다. 현장법사는 즉시 황궁을 향해 출발했다.
변기의 죽음은 불교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현장법사는 자신이 황제의 신변에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공격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출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태종(太宗)제는 재상 방현령(房玄齡)이 금방 유명을 달리하고 방현령의 며느리인 고양공주가 이런 스캔들을 내는 바람에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현장법사가 불전을 전하면서 그의 심령을 위로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현장법사는 취미궁(翠微宮)에서 태종제를 모시는 한편 희안전(喜安殿)에서 불전을 번역하게 되었다. 하지만 1개월이 지나자 현명한 군주 당태종이 붕어했다.
변기와 당태종이라는, 현장법사의 생명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선후로 세상을 떠나자 반백에 가까운 현장법사는 생명의 무상함을 느끼고 불전의 번역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현장법사는 서명사(西明寺)나 오화사(五華寺)에 머물든 옥화궁(玉華宮)에서 기거하든 항상 밤에 낮을 이어 불전 번역에만 몰두했다.
당고종(唐高宗) 인덕(麟德) 원년(664년), 장명등(長明燈)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현장법사의 생명은 옥화궁에서 한 송이 연꽃으로 변해 서쪽 하늘로 날아 갔다. 후세 사람들은 현장법사가 남긴 도합 75부에 1,335권에 달하는 불전을 신경(新經)이라 부른다.
현장법사의 생명의 나무는 무성하고 그 나무에는 탐스러운 열매들이 가득 달렸다. 첫 번째 단계인 27년 동안 현장법사는 배우고 여행하며 지식의 축적과 인품의 형성을 완료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계의 19년 동안 그는 불전을 얻기 위해 만 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하며 만인이 우러르는 고승이 되었다. 마지막 19년 동안 현장법사는 불전 번역에 모든 심혈을 쏟아 풍성한 결과물을 얻고 자신의 삶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 그의 지혜는 영원히 자손만대를 비추고 그의 레전드 스토리는 지금까지 전해진다.
번역/편집: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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