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6 10:49:22 출처:cri
편집:李仙玉

[이광 편-2] 다시 영광의 자리에

(사진설명: 별돌 조각으로보는 이광)

제2회 실패를 딛고 다시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다

세월이 흘러 유철이 성인이 되었다. 무력을 숭상하는 이 젊은 황제는 국가의 무력이 날로 강해지고 백성이 풍족하며 나라가 부강한 것을 보고 빈번하게 국경을 범하는 흉노를 더는 봐주지 않고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한나라의 장수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위위의 신분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된 이광은 마읍(馬邑) 전투에 참가했으나 오랫동안 변경을 지키기만 해서 방어에만 능하고 공격에 약한데다 또 운도 따르지 않아 사막에서 방향을 잃고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광의 액운은 이제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광은 또 몇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광의 군대가 안문관(雁門關)을 나서자 수 만 명에 달하는 흉노 군사와 조우하게 되었다. 십 배가 넘는 흉노의 기마병을 당하지 못한 이광의 군사는 전군이 섬멸되었다.

이광의 명성이 너무 높아 선우가 직접 명령을 내렸다.

“이광을 생포해서 나에게 보내라.”

중상을 입은 이광은 흉노 군사에 겹겹으로 포위되었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생포되었다. 흉노인들은 이광의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두 말 사이에 그물을 걸고 그 위에 이광을 눕혔다. 정신을 차린 이광은 여전이 두 눈을 감고 계속 정신을 잃은 척 하며 도주의 기회를 기다렸다. 그렇게 십여 리를 가다가 이광은 바로 옆에 한 흉노병이 좋은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몸을 일으켜 그 말 잔등에 올라 흉노병을 밀어 떨어뜨리고 채찍을 휘둘러 단 숨에 수십 리를 달렸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리벙벙해 있던 흉노의 군사는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이광을 추격했다. 이광은 말 잔등에 달려 있는 흉노병의 화살을 쏘면서 말을 달려 끝내 아군 진지로 돌아왔다.

이광의 이 경력은 더욱 전기적 색채를 가졌다. 흉노 병사들은 이로 인해 이광을 신인(神人)이라 여겨 그에게 ‘비장군(飛將軍)’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한나라의 조정에서 이광의 이 경력은 엄청난 수치였다. 한나라의 장군이 나라를 위해 순국하지 않고 흉노에 생포되었으니 말이다. 한나라의 군법에 의하면 부하를 다 잃고 적군에 생포된 장군은 참수형을 받아야 했다. 후에 이씨 가문에서 돈으로 목숨을 사서야 이광은 겨우 죽음을 면했지만 신분은 서민으로 떨어졌다.

이광의 증조부는 바로 연(燕)나라 태자 단(丹)을 격파한 진(秦)나라의 대장군 이신(李信)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대에 이르러 장군이 서민으로 전락되었으니 매일 집에서 한가하게 보내는 이광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이광이 서민이 된 후 그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고 다만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손자 관강(灌强)만이 늘 그를 찾아와 함께 사냥하러 가군 했다. 어느 날 황혼 때 이광은 수종을 데리고 시골에 내려가서 관강과 술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패릉정(覇陵亭)을 지나게 되었다. 술이 취한 패릉 현위(縣尉)가 이광을 보고 호통쳤다.

“이렇게 늦었는데 여기서 어슬렁거리다니. 도둑놈이 아니냐? 당장 잡아라!”

이광의 수종이 말했다.

“이 분은 과거의 이광 장군이십니다.”

“현재의 장군이라 해도 야밤에 도처로 다니면 안 된다! 하물며 과거의 장군은 더욱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 현위는 이광을 집으로 돌려 보내지 않고 정자에서 하루 밤을 묵게 했다.

현위로부터 도둑으로 몰린 이광은 너무 수치스러워웠고 자신의 인격을 모욕한 현위가 너무 미웠다. 이광은 속으로 이렇게 맹세했다.

“내가 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 언젠가 나를 모욕한 이 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변경의 정세가 돌변했다. 흉노인들이 요서(遼西)를 공격해 요서 태수(太守)를 사살하고 한안국(韓安國) 장군을 격파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한무제는 갑자기 명장 이광을 생각하고 그를 우북평(右北平) 태수로 임명했다.

패릉 현위의 일을 잊지 못한 이광이 한무제에게 조건을 걸었다.

“패릉 현위를 저에게 주십시오.”

이광의 요구를 들어준 무제는 즉시 사람을 패릉 현위에게 보내 이광 장군을 찾아가게 했다.

패릉 현위는 전전긍긍하며 이광을 따라 우북평에 이르렀다. 현위가 군영에 이르자 이광이 물었다.

“내가 왜 도둑인가? 나의 어디가 도둑 같은가?”

패릉 현위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장군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 제가 장군님을 못 알아보았습니다요! 장군께서는 마음이 너그러운 군자이시니 부디 저를 관대하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이광이 화를 내며 말했다.

“자자손손 무장을 지낸 우리 가문에서 이렇게 큰 수모를 당한 사람이 없다. 내가 너를 봐주면 너의 모욕을 달게 받는 것과 같다. 이런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끌고 나가 목을 베라!”

자신의 군사를 목숨처럼 아끼는 이광 장군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모욕은 조금이라도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사람에게 생명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말았다.

비장군 이광은 일당백의 영웅이었고 특히 활에 능해 흉노인들은 이광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이광이 우북평 태수를 맡은 후 흉노인들은 감히 변경을 범하지 못해 백성들은 줄곧 평화롭게 살았다. 아마도 이것이 명장의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일 것이다.

이광 장군은 헛된 명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의 무예는 확실히 높았다. 한 번은 그가 사냥하러 나갔다가 어둠 속에서 숲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로 보고 활을 당겼는데 화살이 바위에 꽂혔다. 이광 장군의 뛰어난 위력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광은 이 사건이 후에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사기(史記)>에 기록되었고 당(唐) 나라 시인 노륜(盧綸)이 이 사건으로 <새하곡(塞下曲)>이라는 시를 지을 줄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캄캄한 숲 속 풀이 바람에 흔들려(林暗草驚風)

장군은 어둠 속에서 활을 당겼네(將軍夜引弓).

동틀 무렵 흰 깃의 화살 찾으니(平明尋白羽)

바위 모서리에 깊숙이 박혔네(沒在石中).

노륜의 이 짧은 시를 통해 이광 장군의 미명은 더욱 만고에 길이 전해지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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