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8 10:48:44 출처:cri
편집:李仙玉

[이광 편-4] 자손의 불운과 행운

(사진설명: 이광장군의 발자국이 찍힌 곳)

제4회 자손의 불운과 행운을 지켜보다 

비장군 이광의 순탄치 않은 운명은 전염이라도 되듯 그의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광의 삼남 이감은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흉노의 현왕(左賢王)과 결전을 벌여 좌현왕의 군기와 전고(戰鼓)를 노획하고 많은 흉노군사를 죽여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으며 부친의 직무를 이어 받아 랑중령(郞中令)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감은 부친 이광이 죽은 것은 위청이 부친을 동쪽으로 보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대장군의 저택에 달려가 위청을 구타했다. 위청은 이 사건을 덮어두었으나 어떻게 하다 보니 곽거병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젊은 혈기의 곽거병은 황제의 중용도 받던 차에 이감이 감히 자신의 외숙부를 구타했다는 것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황제를 동반해 사냥하러 가는 길에 이감을 사살했다.

이광의 장남 이당호(李當戶)는 이광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그에게는 이릉(李陵)이라는 유복자가 있었다. 성인이 된 이릉은 조부처럼 명궁이자 용맹한 장군이었다. 한무제는 그를 주천(酒泉)의 둔전(屯田)에 파견해 변경을 지키면서 궁수를 훈련시키게 했다.

한 번은 황실성원인 이사(貮師) 장군 이광리(李廣利)가 3만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기련산(祁連山)에서 흉노의 우현왕(右賢王)과 결전을 벌이면서 흉노의 군사를 분산시키고자 이릉에게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연(居延)에서 북쪽으로 1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서 흉노의 군사를 유인하게 했다.

이릉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달성했다. 하지만 임무를 마치고 거연으로 돌아오는데 문제가 생겼다. 귀환길에 이릉의 대오가 선우의 8만명 대군에 겹겹으로 포위된 것이다. 이릉의 부하 5천명은 화살을 전부 다 썼고 병사들도 태반이 목숨을 잃었으나 사살된 흉노의 군사는 1만 명으로 여전히 중과부적이었다. 이릉과 군사들은 싸우면서 퇴각해 8일만에 거연의 북쪽 1백 킬로미터 거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때 흉노가 좁은 길을 차단했고 이릉은 군량도 떨어졌으며 구원병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흉노는 이릉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이릉은 하늘을 우러러 한탄했다.

“돌아가서 폐하를 뵐 면목이 없구나.”

이릉은 흉노에게 항복했다. 적군의 공격으로 흩어졌다가 한나라로 돌아온 이릉의 부하는 고작 4백 명 정도였다.

한무제는 이릉이 군사를 다 잃고 흉노에 항복했으며 선우의 부마가 되어 존귀함을 누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릉의 모친과 아내, 자녀들을 전부 죽이라는 어명을 내렸다. 비장군 이광이 이 일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장군의 명예를 잃었구나!”라고 탄식했을 것이다.

큰 무공을 세웠지만 제후로 책봉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장군 이광, 부친의 억울함을 호소하다 허무하게 죽은 삼남 이감, 최선을 다 해 싸우다가 마지막에 적군에 항복한 장손 이릉…이런 이씨 가문의 이야기는 벌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하는데 후세에 이르면서 오히려 점점 더 유명해져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또 이광과 이릉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시와 그림도 부지기수이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이씨가문에서 후세에 큰 인물이 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씨가문의 족보에 의하면 남북조(南北朝) 이후 이씨 가문은 번창일로를 달려 흉노에서 이어진 이릉의 자손은 탁발선비(拓跋鮮卑)족의 비조가 되어 북위(北魏)를 세웠고 이광의 제16대 자손인 이고(李暠)는 서량국(西凉國)을 세웠으며 이광의 제23대 자손인 이연(李淵)은 중국 역사상 번창과 개방, 관용의 왕조인 당(唐)나라를 세웠다.

비운의 비장군 이광이 먼 훗날 이씨가문 자손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예상했더라면 어떤 심경이었을까?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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