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 09:55:15 출처:cri
편집:李仙玉

[위청 편-1] 첫 승전고를 울린 노예 장군

불패의 명장 위청

그는 중국 역사에서 출신이 가장 미천하지만 공로는 가장 크고 직위도 가장 높은 장군이다. 노복이 대장군이 되기까지는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흉노와의 싸움에서 백전백승의 불패의 전적을 올린 것은 천재적 군사가로서 그의 실력을 잘 보여준다.

그가 바로 한(漢)나라 때의 유명한 군사가이자 대사마(大司馬)와 대장군을 역임한 위청(衛靑)이다. 그는 첫 출정에서 흉노의 무적의 신화를 깨뜨렸고 그로부터 7전7승의 첩보를 올렸다. 이는 그의 불패기록이 행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전략과 전술 혁신에서 온 것임을 증명한다.

위청은 전략적으로 소극적인 방어보다는 능동적인 공격을 선호하고 전술적으로는 보병 전차를 기마병으로 바꾸어 원정을 통한 기회 포착으로 적군을 섬멸했다. 타고난 군사적 재능으로 나라를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또 명예와 실리에도 담백한 직업군인의 모범이다.

불패의 명장 위청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노예출신의 장군 첫 승전고를 울리다 

흉노의 황제인 선우(單于)는 우(禹)임금의 후손이다. 이는 <사기(史記)>에 기록된 엄연한 사실이다. 하(夏)나라 걸(桀) 왕의 자손이 상(商)나라 탕(湯) 왕에 의해 초원으로 축출된 후 황막한 벌판에서 천 년 동안 시련을 겪으며 하늘이 내린 총아 천지교자(天之驕子)라 자처하는 용맹스럽고 흉포한 군사들을 키운 것이다.

그들은 용맹한 기병과 향전(響箭)을 빌어 진(秦)나라 후반 전란의 기회를 타서 몽염(夢恬)이 수복했던 하투(河套)지역을 다시 탈취했다. 또 수시로 남하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아 한나라의 변경은 조용할 때가 없고 백성들도 평안할 틈이 없었다. 선우 묵돌은 운중군(雲中郡) 백등산(白登山)에서 한고조(漢高祖)를 포위해 하마터면 한나라 개국황제 유방의 목숨을 빼앗을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무제(漢武帝) 때에 이르러 한나라에 두 개의 장군 별이 뜨면서 흉노의 적수가 나타나 동양을 제패하던 흉노의 시대가 저물게 되었다.

기원전 129년 한무제는 네 갈래의 군사를 파견해 흉노를 정벌하게 했다. 한 갈래는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이 인솔해서 상곡군(上谷郡)에서 출발하고 경거장군(輕車將軍) 공손하(公孫賀)가 인솔하는 두 번째 갈래는 운중군에서, 세 번째 갈래는 기장군(騎將軍) 공손오(公孫敖)가 인솔해 대군(代郡)에서, 효기장군(驍騎將軍) 이광(李廣)이 인솔하는 마지막 한 갈래는 안문관(雁門關)에서 출발했다. 네 갈래는 모두 각자 기마병 만 명씩 거느렸다.

위청이 변경을 벗어나니 망망한 초원이 펼쳐지고 인적은 보기 드물었다. 그 순간 위청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흉노는 말 잔등을 집으로 삼고 물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았으며 선우가 인솔하는 기마병은 말을 바람 같이 달리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서 흉노의 군대와 만나려면 운이 따라야 했던 것이다.

노복 출신의 젊은 위청은 이렇게 생각했다.

“출신이 미천한 내가 거기장군이 된 것은 누이 위자부(衛子夫)가 황제의 후궁이기 때문이다. 한나라 조정에서 나는 혼인관계에 의해 벼슬을 하게 된 외척이고 거기다가 노예출신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흉노 출정에 나섰으니 반드시 승리해서 황제의 신뢰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위청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한인(漢人) 몇몇이 말을 타고 짐을 싣고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곳에 와서 피혁을 사는 행상들은 흉노 기마병의 상황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들과 좋은 벗이 되어 흉노의 소식을 탐문해야겠다. 그래야 나는 이 곳에서 봉사와 농아와 벙어리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위청은 이렇게 생각했다.

위청은 원래 사생아에 기마노복이었다. 미천한 출신으로 인해 그는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세상의 비정함도 다 맛보았다. 그로 인해 지금 황제의 외척이 되고 장군이 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겸허하고 다정하게 사람을 대했다.

위청은 금방 행상들과 아무 비밀도 없는 좋은 사이가 되었다. 한 행상이 말했다.

“초원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찾기란 바다에서 바늘 찾기입니다. 아니. 바다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렵지요. 바다의 바늘은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흉노의 기마병은 행방을 알 수 없이 여기 저기 다니니 더 찾기 힘든 게 당연하지요?”

위청이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흉노를 공격할 수 없고 흉노가 변경을 넘어 와서 살인과 약탈을 저지를 때 가서야 그들과 싸울 수 있다는 말이요? 에이, 지금까지 그들이 변경을 넘을 때마다 우리 대군이 그 곳에 이르면 그들은 벌써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 뒤였소!”

이 때 다른 한 행상이 말을 받았다.

“사실 흉노의 선우가 천지와 선조에 제사를 지내는 고정된 장소가 있긴 합니다. 그 곳이 바로 성지(聖地) 용성(龍城)인데 용성에는 군대도 장기 주둔하고 있습니다.”

위청은 귀가 번쩍 띄었다.

“용성? 용성이 어디에 있소? 용성을 공격하면 되겠는데!”

“용성은 여기서 천 리 거리에 있습니다만 기마병으로 기습하면 절대 헛물은 켜지 않을 것이니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위청이 사정했다.

“자네 길을 안내해주게. 절대 자네를 푸대접하지는 않을 터이니.”

그 행상이 주저했다.

“나도 나라를 위해 뭔가 하고 싶지만 다만…”

“다만 뭔가?”

“다만 돈 벌 기회를 잃으면 살길이 없어져서 그럽니다.”

“그렇다면 간단하오. 우리가 이기면 황제의 하사품을 나누어 주겠소.”

위청은 그 행상의 안내로 용성을 공격해서 용성에 주둔해 있던 7백의 흉노 기마병을 파하고 개선했다.

같이 출정했던 다른 세 갈래 군사 중 공손하는 흉노를 찾지 못해 빈손으로 귀환하고 공손오는 흉노에게 패해 군사 3천만 남았으며 흉노의 주력부대를 만난 이광은 군사를 다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부상당한 채 생포되었다. 다행히 이광은 자신의 뛰어난 기마 실력과 활 실력으로 살아서 돌아왔다.

한무제는 위청의 전적에 아주 만족하며 크게 치하했다.

“거기장군이 이번에 적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처럼 용성을 공격하고 7백의 수급을 베었으니 전과가 대단하오! 이는 한나라 개국 이래 흉노와의 싸움에서 거둔 첫 승리요. 누가 흉노병이 무적이라 했소? 우리의 거기장군이 승리하지 않았소? 거기장군을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7백의 식읍(食邑)을 내리겠소.”

위청은 이번에 신병(神兵)이 하늘에서 내린 듯 흉노들이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용성을 급습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작전의 승리는 확실히 큰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위청이 하늘이 내린 총아라고 자처하는 흉노 병의 불패의 신화를 처음으로 깨뜨렸기 때문이며 또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흉노를 무서워하던 한나라 군사를 크게 격려해 한나라 군사의 신심을 진작했기 대문이다. 또 천 리를 달려 능동적으로 적군을 공격한 전략 역시 전법의 혁신이었다. 이와 동시에 흉노와 작전하려면 반드시 보병이 아닌,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마병을 사용해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당(唐)나라의 시인 왕창령(王昌齡)은 <출새(出塞)>에서 이렇게 썼다.

진나라 때 떴던 달 한 나라 때 관문을 비추건만(秦時明月漢時關)

만 리 먼 길 출정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네(萬里長征人未還)

적지 용성으로 쳐들어간 용맹한 장군이 지금도 있다면(但使龍城飛將在)

오랑캐 말들이 음산을 넘어오게 두지 않으련만(不敎胡馬度陰山).

이 시는 바로 위청이 음산을 넘어 용성으로 쳐들어가서 흉노를 파한 작전을 찬양한다. 위청은 확실히 한 나라의 장수였다. 당나라 때 사람들도 한무제가 노후에 위청의 무덤을 음산의 모양으로 다시 쌓은 일을 알고 있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왕창령의 이 시에 나오는 비장(飛將)이 비장군 이광이라고 보는데 사실 이는 확실치 않다. 이광은 종래로 용성에 간 적이 없었고 그가 오랫동안 수비해온 우북평(又北平)은 음산과 수천 리나 떨어져 있는 동북의 요녕(遼寧)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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