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4 09:46:08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이백 편: 제3회 귀양길에 오른 천재시인

(사진설명: 이백의 석상)

제3회 귀양길에 오른 천재시인

누군가 시(詩)는 사람의 마음을 깨워 시를 짓고 시를 읽어야 범속하고 들뜬 고달픔 속에서 깨어나 참된 자신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많은 황금을 하사해 이백을 돌려 보낸 당현종은 참으로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당나라 조정에 한가한 문인 한 명이 줄어든 대신 중국역사에 전무후무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한 명이 올랐기 때문이다.

이백은 장안을 떠나면서 벗이 차린 송별연에서 시 <행로난(行路難)>을 썼다.

금 항아리 좋은 술은 한 말에 수천 금(金樽淸酒斗十千)

옥 쟁반 좋은 안주 일만 냥의 값이어라(玉盤珍羞値萬錢)

술잔 멈추고 젓가락 내던져 먹지 못하고(停杯投箸不能食)

칼 뽑아 사방을 둘러보니 가슴만 답답하도다(拔劍四顧心茫然)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물길 막고(欲渡黃河氷塞川)

태항산에 오르려니 온 산이 눈으로 덮였네(將登太行雪滿山)

한가히 돌아와 푸른 개울에 낚싯대 드리우다(閑來垂釣碧溪上)

홀연히 다시 배에 올라 이윤의 꿈이나 꿔볼까(忽復乘舟夢日邊)

세상살이 어려워라 세상살이 어려워(行路難, 行路難)

갈림길 많은데 지금 나는 어디인가(多岐路, 今安在)

바람 타고 물결 깨트리는 그런 때가 오리니(長風波浪會有時)

구름 끝에 돛을 올려 푸른 바다 건너리(直掛雲帆濟滄海)!

당시 이백은 분노로 불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윤(伊尹)처럼 발탁되어 다시 벼슬길에 올라 큰 뜻을 펼치는 것을 꿈꾸었다. 시의 마지막에는 또 격앙된 정서로 미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이백은 망연자실한 기분을 안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보이는 것은 출렁이는 물결과 하얀 산 같은 파도, 숲을 이룬 돛배였다. 걱정은 강물처럼 길고 이별의 슬픔은 황하처럼 드넓었다. 이백이 대량(大梁)에 이르러 황폐해진 고대의 양원(梁園)을 보니 ‘양원이 좋다고는 하지만(梁園雖好) 이 곳이 고향은 아니다(不是故鄕)’는 속담이 생각나 더욱 감개가 무량했다.

이백은 술잔을 기울이며 취기를 빌어 양원의 무너진 담벽에 230자에 달하는 <양원음(梁園吟)>을 휘갈겼다.

황하에 배 띄워 장안에서 멀리 나와(我簿黃河去京闕)

돛을 달고 나아가려는데 물결이 산처럼 다가오네(掛席欲進波連山)

하늘 높고 물은 넓어 멀리 갈 수 없어(天長水闊厭遠涉)

옛 사적 찾아 평대에나 나가 보련다(訪古始及平臺間)

평대의 나그네 되니 근심 걱정 많아(平臺爲客思多)

술을 들며 양원가를 지어본다(對酒遂作梁園歌)

큰 물결 드넓어 장안 일 모르겠고(洪波浩蕩迷舊國)

길이 멀어 서쪽에는 어이 갈 수 있을까(路遠西歸安可得)

인생이 천명을 알면 어찌 수심에 잠길 겨를이 있을까(人生達命暇愁)

아름다운 술 마시며 높은 누대에 오르리(且飮美酒登高樓)

소금으로 안주 삼아 술 들어 마실지니(持鹽把酒但飮之)

백이숙제처럼 고결한 것만 일삼지 말아라(莫學夷齊事高潔)

옛날 신릉군은 호걸이요 귀인이었지만(昔人豪貴信陵君)

지금 신릉군의 무덤엔 사람들이 밭갈이 하고 있다네(今人耕種信陵墳)

춤추던 그림자와 노랫소리 맑은 못에 흩어지고(無影歌聲散綠池)

공연히 변수만 남아 동쪽 바다로 흘러가는구나(空餘水東流海)

이 일 읊으니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吟此事淚滿衣)

황금으로 술을 사며 다시 돌아갈 수 없구나(黃金買醉未能歸)

가행체(歌行體)의 이 장시는 먼저 장안을 떠난 시인의 우울한 정서를 표현한다. 이어 과거를 그리고 오늘을 가슴 아파하는 슬픔과 걱정을 의기소침하게 토로하고 나서 갑자기 격앙된 정서로 천고의 풍류인물들도 모두 티끌로 사라진 현실을 빌어 업적을 쌓으려는 행위를 부정하고 돈이 있으면 술잔을 들며 그 돈을 다 뿌려야 한다고 높이 외친다.

그렇다고 이백이 이로부터 계속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해졌을까? 물론 아니다. 시의 말미에서 이백은 불 같은 열정으로 미래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추구와 기대를 불태웠다.

노래하고 또 노래하니(歌且謠)

뜻은 멀고도 멀도다(意方遠)

동산에 높이 누웠다가 때 맞춰 일어나(東山高臥時起來)

천하를 다스리려 하니 아직 늦지 않았도다(欲濟蒼生未應慢)

이백은 높은 산에 은둔했다가 다시 발탁된 사안(謝安)처럼 언젠가는 다시 재기해 천하와 백성을 위해 큰 일을 하려는 자신의 포부를 반드시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믿었다.

시를 다 지은 이백은 표연히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의 멋진 모습은 정원을 유람하던 한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녀는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 재상을 담임했던 종초객(宗楚客)의 손녀인 종씨(宗氏)였다. 종씨는 멋진 풍채의 이백의 뒷모습이 정원의 모퉁이로 사라지자 담벽에 다가가서 <양원음>을 감상하며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 구절을 소리 내서 읊었다.

옥반에 버들과 매화는 그대 위해 내어놓고(玉盤楊梅爲君設)

오나라 소금은 꽃 같아 백설보다 희구나(吳鹽如花皎白雪)

소금으로 안주 삼아 술 들어 마실지니(持鹽把酒但飮之)

백이숙제처럼 고결한 것만 일삼지 말아라(莫學夷齊事高潔)

옛날 신릉군은 호걸이요 귀인이었지만(昔人豪貴信陵君)

지금 신릉군의 무덤엔 사람들이 밭갈이 하고 있다네(今人耕種信陵墳)

성은 비어 푸른 산에 달만 비추고(荒城虛照碧山月)

고목은 모두 창오의 구름 속에 들었구나(古木盡入蒼梧雲)

이 때 갑자기 한 정원사가 물통에 물을 담아가지고 다가왔다. 종씨가 놀라서 물었다.

“뭘 하시려고 그러세요?”

“이 글자들을 지우려고 그럽니다.”

“지우지 마세요. 이 담벽을 제가 사겠습니다.”

이백은 종씨가 천금으로 담벽을 샀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명의 지기(知己)를 만났다는 기쁨에 몸소 찾아가서 사의를 표시했다. 종씨 가문의 남녀노소가 이백을 반갑게 맞이했고 첫눈에 서로 정이 든 이백과 종씨는 평생을 기약했다.

종씨는 미모와 재능도 갖추고 또 이백처럼 도교를 신앙하며 신선이 되는 도를 수련하고 있었다. 결혼 후 이백과 종씨는 서로 존경하며 금슬이 좋게 아기자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백의 마음은 종씨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백은 여전히 벼슬을 해야 할지 아니면 초야에 묻혀 평생을 보낼지 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다 전 재상의 손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것은 그가 풍채가 늠름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명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지만 그의 마음 속 한 귀퉁이에는 여전히 그런 권세를 빌어 벼슬길에 오르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원에서 옷소매를 날리고 걸음을 옮기며 검무를 출 때 하늘의 태양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 옥으로 된 용이 하늘을 나는 듯, 천둥이 우는 듯, 강물이 세차게 흐르는 듯 할 때면 그의 마음도 바람을 따라 솟아 오르는 대붕처럼 푸른 하늘을 날아 구만리 상공까지 치솟았다.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의 마음이 또 꿈틀거리며 포부를 펼치려는 열정에 불을 달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이별하고 영왕(永王) 이린(李璘)을 찾아가 그의 막좌(幕佐)가 되었다.

이백의 붓은 대당의 산수를 다 거쳐가 그가 ‘붓으로 글을 쓰면 비바람이 놀라고(筆落驚風雨) 시를 지으면 귀신이 울고 갔다(詩成泣鬼神).’ 하지만 이백은 천재시인이었지만 훌륭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골육상잔이 황실의 본질임을 꿰뚫어 보지 못했고 안사의 난 이후의 정치 향방도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백은 영왕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왕이 군사를 일으킨 목적은 난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위에 오르기 위한 것이었다. 영왕이 역모를 꾀하는 것을 안 이백은 두려웠다. 그는 어둠을 빌어 몰래 영왕의 군대를 떠나 강서(江西)의 팽택(彭澤)으로 도주해 몸을 숨겼다. 하지만 때는 벌써 늦었다. 영왕이 황권 탈취에 실패하자 이백도 그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백이 곧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소식은 종씨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동원해 이백을 구하려고 했으나 역모죄는 쉽게 사면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자신의 힘으로 이백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종씨는 슬픔에 잠겨 자리에 누웠다가 끝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두 눈을 감았다.

죽는 길밖에 없다고 여긴 이백의 생명에 귀인이 나타났다. 과거 이백은 병주(幷州)를 유람하다가 곽자의(郭子儀)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만나기 전부터 서로를 아꼈고 우연하게 만나자 금방 절친이 되었다. 당시 곽자의는 부장(副將)에 지나지 않았고 또 상관에게 밉보였는데 이백이 나서서 곽자의가 처벌을 받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

어제의 부장이 오늘날은 새로 태어난 당 왕조의 대원수(大元帥)가 되었다. 이백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안 곽자의는 자신의 관직으로 이백의 목숨을 바꾸겠다고 나섰다. 곽자의가 있어야 자신의 강산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숙종(肅宗)제는 이백의 죄를 면해줄 수밖에 없었다. 숙종제는 이백의 사형을 면하는 대신 오늘날의 귀주(貴州) 동재(桐梓)를 말하는 야랑으로 유배를 보내라고 명했다.

‘야랑은 만 리 길 밖에 있고(夜郞萬里道) 서쪽으로 가려니 사람이 늙네(西上令人老).’설마 우리의 천재시인이 머나먼 오지의 오몽산(烏蒙山)에서 삶을 마쳐야 할 것인가? 무기한 유배형을 받은 지라 이백도 자신이 살아서 그 땅을 떠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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