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4 10:01:11 출처:cri
편집:李仙玉

[위청 편-3] 경사가 겹친 대장군과 부마

(사진설명: 위청 무덤의 일각)

제3회 경사가 겹쳐 대장군과 부마가 되다

복은 겹쳐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위청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런 속담도 깨뜨렸다. 위청에게 복이 겹쳐서 온 것이다.

원삭 5년, 위청에게는 경사가 겹쳤다. 그 해 봄, 하투지역을 탈취하려는 흉노를 크게 타격하기 위해 한무제는 거기장군 위청을 위수로 여러 갈래의 군대를 흉노 정벌에 보냈다. 위청은 3만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고궐에서 출발하고 위청의 지휘를 받는 유격(遊擊)장군 소건과 강노(强弩)장군 이저(李沮), 기(騎)장군 공손하(公孫河), 경거(輕車)장군 이채(李蔡)는 삭방성에서 출발하며, 이식장군과 장차공은 우북평에서 출발해 흉노소멸작전에 나섰다.

위청은 또 다시 비길 데 없이 뛰어난 천재적인 지휘능력을 과시해 먼 거리 습격과 포위 섬멸전을 완벽하게 접목했다. 위청은 흉노의 우현왕이 7백리밖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여러 장군들에게 포위권을 좁히라 명하고 자신이 몸소 기마부대를 거느리고 하루 밤사이에 7백리를 달려 신병(神兵)이 하늘에서 내린 듯 우현왕의 주둔지를 포위했다.

우현왕은 한나라 군대가 아직도 저 멀리 있는 줄 알고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장막에서 애첩과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 주흥이 금방 올랐는데 갑자기 장막 밖에서 함성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병영 곳곳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그제야 우현왕은 자신이 한나라 군대의 포위에 든 것을 알았다. 그는 저항해봤자 늦었다는 것을 알고 급히 애첩과 함께 말에 뛰어 올라 몇 백 명 측근의 엄호하에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위청이 교위 곽성(郭成)에게 추격을 명했으나 우현왕을 생포하지는 못했다.

우현왕은 빠져나갔으나 한나라 군대의 전적은 여전히 눈부셨다. 그들은 십여 명의 소왕(小王)을 생포하고 1만 5천 명의 흉노인을 사로잡았으며 몇 백만 마리의 가축도 얻었다.

첩보가 전해지자 한무제는 격동된 심정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날이 밝자 특사를 전선에 파견했다. 두 손으로 인신(印信)을 받쳐 든 특사는 군중에 이르자 이렇게 선포했다.

“위청을 전국의 군사를 통솔하는 대장군(大將軍)에 봉하고 식읍 6천 가구를 내린다. 위청의 미성년 아들 셋을 모두 후작에 봉해 장남 위항(衛伉)은 의춘후(宜春侯)에, 차남 위불의(衛不疑)는 음안후(陰安侯)에, 삼남 위등(衛登)은 발간후(發干侯)에 봉한다.”

군중에서 장병들이 일제히 높은 목소리로 축하를 표시했다.

“대장군께서는 용맹하십니다! 대장군께서는 용맹하십니다!”

대장군에게 축하를 표시하면서 장군들은 마음 속으로 다소 실망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작전 성공의 공을 대장군 한 사람에게만 돌리다니, 다른 사람들은 장식품인가?

위청도 상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급히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전체 장병들이 목숨 걸고 싸웠기에 한나라 군사가 첩보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신을 대장군에 책봉하시고 또 식읍 6천가구를 내리셨습니다.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았고 아직 어린 소신의 세 아들을 책봉하시면 장병들을 격려할 수 없으니 소신의 세 아들에 대한 책봉은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위청의 상주문을 받은 한무제는 미소를 지었다.

“공에 따라 여러 장군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짐이 어찌 잊었겠는가?”

그리고 나서 한무제는 여러 장군이 세운 공에 근거해 10명의 장군을 제후로 책봉했다.

대장이 된 위청의 저택에는 경사가 겹쳤다. 위청의 옛 상전인 평양(平陽) 공주가 부마와 사별한 지 오래 되어 태후가 제후들 중에서 남편 감을 고르게 했다.

이 때 누군가 평양공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인과 사별한 대장군이 가장 적임자입니다.”

그 말에 평양공주가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는 전에 저의 집의 노복이었는데요.”

가문과 출신을 따지던 한나라였으니 공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사별한 평양공주의 부군은 전 승상 조참(曺參)의 증손인 평양후(平陽侯)였다. 그런데 어떻게 노복 출신의 위청에게 재가한다는 말인가?

누이 집에 놀러 왔던 한무제가 이 일을 알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영웅은 출신을 묻지 않소. 짐이 대장군의 누이와 혼인하고 그를 황후로 책봉할 수 있는데 짐의 누이는 왜 대장군에게 시집을 가서 대장군의 부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오?”

평양 공주는 위청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나이도 젊고 위풍이 당당한 대장군 위청을 좋아하고 있었다.

한무제의 비범한 도량으로 인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문의 혼인이 이루어져 위청은 노예출신으로 장군이 되고 노복이 부마가 되는 인생의 화려한 역전을 실현했다.

이처럼 신분에 천지개벽의 큰 변화가 있음에도 위청은 여전히 변함 없이 차분하고 내성적이고 겸허하고 착한 인품을 유지했다. 위청의 이런 사람됨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만 듣고 가자. 위청이 대장군이 되고 나서 1년 후의 일이다. 위청은 여러 장군들을 거느리고 두 번이나 출새하여 흉노를 타격하고 좋은 전적을 올렸다. 유독 전(前) 장군 조신(趙信)과 우(右) 장군 소건만이 흉노의 주력부대와 조우해 중과부적으로 조신은 8백 명의 군사를 데리고 흉노에 항복했으며 소건은 군사를 다 잃고 홀로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 때 누군가 말했다.

“대장군은 대장군에 책봉된 후 아직 부하 무관을 참수한 적이 없다. 이번에 소건이 군사를 버리고 혼자 도주했으니 대장군은 이 기회에 위망을 세우기 위해 그를 참수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소건은 몇 천명의 기마병으로 몇 만 명에 달하는 선우의 주력대부와 싸워 전군이 섬멸돼도 항복하지 않았다. 만약 어렵게 돌아온 그를 참수한다면 후에 패전 장군의 항복을 격려하는 셈이 아니겠는가?”

대장군이 결정을 내렸다.

“나는 공에 의해 대장군에 봉해졌소. 부하 무관을 참수할 권력은 가지고 있지만 나라밖에서 이 권력을 남용하지는 않겠소. 소건 장군에 대한 처리를 폐하의 결정에 맡기려 하는데 장군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여러 장군들은 대장군의 신분에 황제의 친척이면서도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고 모든 일을 타당하게 처리하는 위청에 더욱 감복했다.

후에 한무제는 과연 소건을 참수하지 않고 그의 가문으로부터 돈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신분을 낮추었다. 이 소건이 바로 후에 굳은 절개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소무(蘇武)의 부친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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