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1 09:33:59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두보 편: 제4회 명시를 남기고 가다

(사진설명: 두보초당의 일각)

제4회 명시를 남기고 가다

‘세상에 둘도 없는 절세의 가인이(絶代有佳人) 인적 없는 아늑한 골짜기에 홀로 산다네(幽居在空谷).’자신의 상황을 빌어 쓴 시 <가인(佳人)>을 읊으며 성도(成都) 완화계(浣花溪) 기슭의 세 칸짜리 초가집을 바라보는 두보의 마음 속에 즐거움이 차 올랐다.

“끝내 몸 둘 곳이 있어 더는 도처로 떠돌아 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두보는 지난 1년 남짓한 동안 이어진 악몽 같은 유랑민 생활을 떠올렸다. 건원(乾元) 2년(759년), 벼슬을 받고 화주(華州)에 갔으나 관중(關中)의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여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길을 찾아 롱산(隴山)을 넘어 서쪽의 진주(秦州)로 갔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 곳에서 풀 뿌리를 캐고 나무 껍질을 벗겨 먹거리를 장만했으나 아이들이 아사할 뻔 했다. 그 후 1년 동안 험난한 촉도(蜀道)를 걸어서 성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바람을 피해 몸을 둘 세 칸짜리 초가집을 가지게 되었다. 성도에서 절도사(節度使)로 있던 두보의 벗 엄무(嚴武)가 두보를 위해 초가집을 지어주고 그에게 검교공부(檢校工部) 원외랑(員外郞)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이로 인해 역사적으로 두보는 두공부(杜工部)라 불리기도 한다.

두보는 성도에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살면서 많은 시를 창작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시작은 초가집이 바람에 부서짐을 노래한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이다. 두보의 숭고한 이상과 드넓은 흉금을 보여주는 이 시는 천 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하지만 이 시와 함께 액운이 또 다시 두보를 찾아왔다.

엄무가 업무 보고차 장안으로 돌아간 사이에 엄무의 보좌가 역모를 일으켜 성도에 대란이 일어났다. 후원자를 잃은 두보는 가족을 거느리고 재주(梓州)와 랑주(閬州)로 갈수밖에 없었다. 그 때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일으킨 두목 중 한 명인 사조의(史朝義)가 패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부하들이 분분히 항복하고 북방의 잃어버린 땅을 거의 다 수복했다는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기쁨에 넘친 두보는 붓을 들어 천고의 칠언율시(七言律詩) <문관군수하남하북(聞官軍收河南河北)>를 썼다. 이 시는 두보의 시작 중 유일한 쾌시(快詩)이다. 쾌시란 이름 그대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짓는 즐겁고 흥분한 마음을 토로하는 시를 말한다. 즐거움이 휩쓸고 지나간 후 두보는 그럼에도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먼 길을 걸어 고향으로 갈 여비가 없었고 7,8년 동안 이어진 전란과 기아로 도적이 성행해 사회 질서가 잡히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엄무가 다시 성도윤(成都尹)이 되었으며 두보도 다시 성도로 돌아와 여전히 공부 원외랑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1년 후 엄무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두보는 팽주(彭州) 자사(刺史)로 있는 고적(高適)을 찾아 또 성도를 떠났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다고 두보가 팽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적도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악양(岳陽)과 장사(長沙), 형주(衡州)를 오가며 보낸 두보의 노후는 질환과 가난으로 점철됐다. 두보의 칠언율시 <등고(登高)>가 두보의 비참한 노후를 가장 잘 보여준다.

바람 세차고 하늘 높은데 원숭이 울음소리 처량하고(風急天高猿嘯哀)

맑은 물가 새하얀 모래톱엔 새들이 빙빙 나네(渚淸沙白鳥飛回)

끝없이 늘어선 나무에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無邊落木蕭蕭下)

그침 없는 장강은 세차게 흘러서 오는구나(不盡長江滾滾來)

만 리 타향 슬픈 가을 항상 나그네 신세(萬里悲秋常作客)

한평생 병 많은 몸 이끌고 홀로 누대에 오르네(百年多病獨登臺)

갖은 고난과 한스러움에 귀밑머리 서리가 성성한데(艱難苦恨繁霜)

늙고 쇠약한 몸에 탁주잔마저 멈추었다네(倒新停濁酒杯)

당대종(唐代宗) 대력(大歷) 5년(770년), 두보는 상강(湘江)의 여객선에서 몸져누웠다. 거기다가 갑자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두보는 닷새 동안 배에 발이 묶였다. 뇌양(耒陽) 섭현(聂縣)의 현령이 몸소 배를 몰아 두보를 구출했을 때 그는 피골이 상접했다. 섭현지사는 즉시 온갖 안주를 푸짐하게 마련하고 술도 덥혀 두보를 대접했다. 풍성한 잔칫상을 마주한 두보는 게눈 감추듯 음식물을 먹고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한 끼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두보는 복통을 호소하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 해 그의 나이 59살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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