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2 09:53:08 출처:cri
편집:李仙玉

[사마천 편-1] 역사학자 진실에 울고 웃다

(사진설명: 사마천의 동상)

중국 역사학자의 비조 사마천

고대 중국의 위대한 사학자이자 문학가, 사상가인 사마천(司馬遷)은 ‘사성(史聖)’이라 불리기도 한다. 중국 문명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기여는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사서이자 후세 중국 사서의 모범이 된, 사건 중심으로부터 인물 중심으로 전환한 최초의 사서 <사기(史記)>를 편찬한 것이다.

문학적 가치도 높아 문장에 힘도 있고 함축성도 있으며 간결한 언어로 씌어진 사마천의 <사기>는 ‘사학가의 절창(絶唱)’이라 불리며 세월과 함께 길이 길이 전해지는 위대한 서사시이다.

<사기>의 영향으로 사학저서가 점점 더 많아져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 사학은 끝내 경학(經學)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사마천과 <사기>의 공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의 비조 사마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역사학자 진실에 울고 웃다 

멱라강(汨羅江)의 강물은 여전히 그렇게 맑고 유유히 흘렀다. 사마천은 굴원(屈原)이 강물에 몸을 던졌던 바위에 올라서서 <회사(懷沙)>를 읊으며 시인의 그 때의 심경을 생각했다.

탕임금과 우임금은 먼 옛날 이야기(湯禹久遠兮)

너무 아득하여 흠모할 수가 없네(邈而不可慕)

원망하고 분한 마음 가라 앉히고(懲違改忿兮)

맺힌 마음 달래며 스스로 힘을 쓰노라(抑心而自强)

시름에 겨워도 내 마음 변하지 않으리니(離愍而不遷兮)

내 뜻이 후세에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노라(願志之有像)

길을 재촉해 북쪽으로 향하는데(進路北次兮)

해는 뉘엿뉘엿 어둑해지려 하네(日昧昧其將暮)

시름을 참고 슬픔을 즐기며(舒憂虞哀兮)

죽음으로 그 끝을 맞이하리라(限之以大故)

굴원이 멱라강에 몸을 던지기 전에 바로 이 바위 위에 서서 절망에 빠진 가슴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사부(辭賦)를 짓는 것으로 슬픔을 토로하고 죽는 것만이 아픔에서 해탈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다고 생각하니 사마천은 저도 모르게 슬픔이 차올라 통곡했다. 사마천의 맑은 눈물은 굴원의 몸을 받아 안은 적이 있는 멱라강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도련님, 울지 마세요. 옛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을 누가 보면 도련님도 미쳤다고 할 거에요!”

사마천의 시동 안(安)이 주인을 위로하면서 그를 잡아 당겨 바위에서 내려오게 했다.

“나도 미쳤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설마 굴원이 미쳤다는 거야?”

고집스러운 성격의 사마천은 글귀를 따지며 안을 꾸짖었다.

“어디 제가 말한 거예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도련님의 문우도 그러셨잖아요? 굴 대부님이 미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꺼번에 질문 몇 백 개를 하냐구요? 또 질문도 모두 이상하고 무질서해서 마치 미치광이가 지껄이는 얼토당토않은 허튼소리 같다구요.”

안의 말에 사마천은 길게 탄식했다.

“그래서 굴 대부님께서 어부에게 ‘세상은 온통 혼탁하고 더러운데 나만 깨끗하고, 사람들은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다’고 말씀하셨구나. 초(楚)나라에서 가장 총명하고 가장 깨어 있은 사람이 당시의 백성들로부터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고 후세 사람들도 이렇게 보니 너무 슬프구나!”

그 때 사마천은 22살이었고 벌써 만 권의 책을 읽었다. 그는 또 20 살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며 만 리 길을 걸은 지 벌써 2년째였다. 감성이 풍부한 사마천은 책을 읽든 여행을 하든 모두 쉽게 감동을 받아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이날도 굴원이 투신한 곳에 이르니 사마천의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고 세상 사람들이 굴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에 그는 또 마음 깊이 탄식하며 분노했다.

주인과 시종 두 사람은 또 길을 떠났다. 그러면서 사마천과 안은 여로에서 보고 들은 견문을 담론했다. 안은 주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우리가 맹상군(孟嘗君)의 봉지에 갔을 때 그 곳의 민풍이 사납고 매일 주먹다짐과 절도, 살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현지의 한 사람이 ‘맹상군이 강호 협객을 좋아해서 사람을 많이 불러 들였고 심지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막지 않아서 설성(薛城)의 인구가 6만 가구로까지 확 불어났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설성의 민풍이 험악해져서 자자손손 전해내려 온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도련님은 생각에 잠겨 묵묵히 머리만 끄덕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 맹상군을 어떻게 보세요?”

사마천은 계명구도(鷄鳴狗盜)와 풍훤매의(馮諼買義)의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리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맹상군이 빈객을 양성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똑 같이 대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진정한 현인과 의인들은 계명구도를 일삼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로 생각해서 맹상군에게 의탁하지 않았고 그러기 때문에 설성은 악행을 감싸주는 그런 곳이 된 것이다.”

이때의 사마천은 쉽게 감동하는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매사를 깊이 있게 사색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또 언제나 절대로 남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하고 참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안이 또 물었다.

“도련님은 모든 일에서 그렇게 진지하잖아요. 대량(大梁)의 폐허를 돌아볼 때 심지어 이문(夷門)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는데 그게 무슨 가치가 있어요?”

“고서를 보니 신릉군(信陵君)은 인재를 존경하여 몸소 은사(隱士) 후영(侯嬴)을 찾아가서 모셔오고 또 그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다. 당시 후영은 대량(大梁)의 이문(夷門)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그러니 대량의 폐허를 돌아보면서 이문이 어느 성문인지를 몰라서야 되겠느냐? 현지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서야 이문이 원래 동문(東門)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다. 이문은 대량 사람들의 호칭이기도 하는데 이런 작은 일도 확실히 하지 않으면 후에 어떻게 사서(史書)를 쓰겠느냐? 역사서적은 후세의 사람들이 읽게 되기 때문에 진실성과 신뢰가 가장 중요하니라. 후에 책을 쓰지 않을 것이라면 내가 왜 2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겠느냐? 설마 너는 내가 노는 데만 열중해 산수를 즐기는 줄 알았느냐?”

“도련님이 단순히 산수를 즐기는 것이 아님은 물론 알고 있죠. 돌아다니는 중에 언제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옛날 이야기들을 묻는 것을 보고 알았죠. 도련님은 글을 쓰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요. 단지 이문과 같은 사소한 것까지 그렇게 알아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서요. 이문을 책에 쓸 것도 아니잖아요?”

사마천이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틀렸다. 당연히 이문을 쓸 것이다. 내가 이문을 책에 써넣으면 후세 사람들은 고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그리고 내가 쓴 책도 세부적인 것의 진실함으로 인해 후세 사람들의 신뢰를 더 얻게 될 것이다.”

사마천이 이렇게 치밀하게 학문에 임했기 때문에 그의 <사기>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실록(實錄)성이 가장 강한 사서로 여겨진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글을 솔직하게 쓰고(其文直) 사실을 정확하게 적었으며(其事核) 헛되이 꾸미지도 않고(不虛美) 악함을 숨기지도 않은(不隱惡) 역사가의 극치이다(是史家極則)”라고 사마천의 <사기>를 평가했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은 사마천의 문장이 혹은 거센 파도처럼 거리낌 없고 웅장하며 혹은 호수의 물결처럼 깊고 함축성이 있으며 또 혹은 짙은 봄빛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우며 혹은 천군만마처럼 기세가 좋은 등 무궁한 변화를 보인다고 인정한다. 사마천은 젊었을 때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젊었을 때 많은 곳을 여행하면 세상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고 두터운 저력을 키우며 그로부터 입만 열면 명문장이 나오게 된다는 것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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