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3 09:39:31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한유 편: 제2회 제자를 가르치고 인재를 발굴하다

(사진설명: 한유의 석상)

제2회 제자를 가르치고 인재를 발굴하다

…처음에는(始者) 삼대와 양한의 글이 아니면 감히 보지 않았고(非三代兩漢之書不敢觀) 성인의 사상이 아니면 감히 마음에 두지도 않았습니다(非聖人之志不敢存). 집에 있을 때는 자신조차 잊은 듯 했고(處若忘) 행동하면 잃어버린 듯 하며(行若遺) 조용할 때는 생각하는 것 같고(儼乎其若思) 멍할 때는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습니다(茫乎其若迷). 마음에서 취하여 손으로 집중해서 써 내려갈 때(當其取於心而注於水也) 진부한 말을 힘써 제거하였는데(惟陳言之務去) 이리 저리 맞지 않아 어려웠습니다(戞戞乎其難哉)…

한유는 <답이익서(答李翊書)>를 다 쓰고 나서 제자인 이고(李翺)에게 말했다.

“근래 배움을 구하고자 하는 서신이 많구나. 내가 시작한 고문운동(古文運動)의 영향이 작지 않은 듯 하다! 답장을 보내는 기회에 나의 문학적 생각을 알려야지. 완벽한 이론이 있고 감복할만한 고문작품만 있다면 한(漢)나라 후반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형식이 부미(浮靡)하고 내용이 텅 빈 문풍(文風)을 돌려세울 수 있을 것이다.”

“스승님, 스승님은 문하생도 많고 또 도와주는 벗과 동료들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문장으로 도를 밝힌다는 유자후(柳子厚)선생의‘문이명도(文以明道)’와 문장에 도를 싣는다는 스승님의‘문이재도(文以載道)’가 이론적으로 서로 연동하면서 풍격이 건전한 고문을 성원해서 우리의 고문운동이 벌써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 때 한유는 몇 번에 걸쳐 국자감(國子監) 사문박사(四門博士)를 맡았고 후에는 또 국자감 제주(祭酒)로도 있었다. 국자감 사문박사와 제주는 오늘날의 대학교 교수와 총장직에 맞먹는 직위이다. 거기다가 한유는 뛰어난 많은 글을 쓴 유명한 문장가다 보니 많은 청년 학도들이 찾아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로 고문운동은 형식이 경직되고 내용이 텅 빈 변려문(騈儷文)을 대신했고 한유가 제창한 형식이 자유롭고 언어가 간결하며 풍격이 웅혼한 산문은 당시의 새로운 흐름이 되었다. 이로써 한유는 중국의 문학사에서 뛰어난 기여를 했고 소동파(蘇東坡)로부터 “보통 사람으로서 백대의 스승이 되고(匹夫而爲百世師) 한 마디 말이 천하의 법도가 되었으며(一言而爲天下法)” “문장으로 팔 대에 걸쳐 부진했던 쇠약한 기운을 일으키고(文起八代之衰) 도로는 천하의 가라앉음을 구제했다(而道濟天下之溺)”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유의 제자 이고가 금방 자리를 뜨자 문장가 황보식(皇甫湜)이 걸어 들어와 호들갑을 떨었다.

“퇴지, 악부시(樂府詩)를 쓴 그 이하(李賀)가 옛 사람이 아니라 왕손(王孫)이라네! 이제 막 열 살이라나. 이하의 부친 이진숙(李晉肅)은 변경에서 작은 벼슬을 하고 말이네. 우리 얼른 가서 이 보석을 발굴하세!”

“이하가 이 시대의 소년이라면 지금 바로 찾으러 가세! 청년인재를 찾아내서 키워주는 것이 나의 책임이거늘.”

한유와 황보식이 높고 넓은 고헌(高軒)마차를 타고 이부(李府)에 이르자 이진숙이 두 손님을 거실로 안내해서 방문의사를 물었다. 두 사람의 답을 들은 이진숙은 거실 앞쪽의 마당을 향해 소리쳤다.

“하야, 얼른 이리 오거라! 손님께서 너를 찾으신다!”

열두세 살이 됨직한 사내아이가 마당에서 뛰어오자 한유와 황보식은 깜짝 놀랐다.이하의 얼굴에 앳된 티가 팍팍 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린 애가 경성을 뒤흔든 시인이라니? 한유가 입을 열었다.

“나는 국자감의 한유이오. 공자가 시를 아주 잘 쓴다고 들었소. 특히 악부시에 능하다고 들어서 오늘 특별히 찾아왔는데 지금 눈앞의 정경으로 시 한 수 지을 수 있겠소?”

“아아, 선생께서 바로 그 유명한 문장의 대가 한박사시군요! 좋습니다. 그럼 <고헌과(高軒過)>라는 제목으로 악부시를 읊어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하는 두 손님을 쳐다보더니 소리 높이 읊었다.

화려한 옷자락 비취무늬로 짜서 푸르기는 파와도 같고(華織翠靑如蔥)

금 고리가 고삐에 묵직히 매달려 흔들리며 영롱하네(金環壓搖玲瓏)

말 발굽 소리 은은히 들리다가 점점 높아지더니(馬蹄隱耳聲隆隆)

문에 들어와 말 내리니 의로운 기개 무지개 같구나(入門下馬氣如虹)

이를 이르기를 동경의 재자요(云是東京才子)

문장의 대가라고 말하네(文章巨公)

이십팔 수 모든 별이 그들 가슴 속에 있는데(二十八宿羅心胸)

만물의 정기가 번쩍이며 그 속을 꿰뚫었구나(九精照耀貫當中)

궁궐에서 부를 지으니 명성이 하늘에 닿고(殿前作賦聲摩空)

필력은 조화의 신이 보필하여 하늘도 공이 없어라(筆補造化天無功)

굵은 눈썹의 서객 가을 쑥대를 한탄하는데(龐眉書客感秋蓬)

죽어가는 풀에도 꽃 바람 불어올 줄 누가 알았으랴(誰知死草生華風)

나 이제 날개 접었으나 하늘 나는 기러기에 붙으면(我今垂翅附冥鴻)

먼 훗날 뱀이 용 되는 일 부끄럽지 않으리라(他日不羞蛇作龍)

그 자리에서 시를 읊은 이하는 또 붓을 들어 용이 춤추는 듯 한 글씨로 <고헌과>라는 제목의 시를 종이에 썼다. 한유와 황보식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과연 소년 천재, 신동이구나!”

이렇게 감탄한 한유는 마음 속으로 이하와 같은 인재를 발견한 것을 행운으로 생각했다.

“너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내가 폐하께 소를 올려 전례를 깨고 진사(進士) 시험을 보게 할 것이다. 너는 필히 과거에 급제할 것이다!”

후에 일부 선비들이 이하 부친의 성명 중 진(晉)자가 진사 진(進)자와 동음이기 때문에 이하는 진사과거시험을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진사에 급제하는 과거시험을 보라고 이하를 권고한 한유도 잘못을 저질렀다고 떠들었다. 그로 인해 한유는 며칠 동안 속을 앓았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괜찮으나 이하가 과거시험에 참가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아쉽다. 이하와 같은 천재는 한림원(翰林院)이나 국자감에 들어가야 하는데 출세 수단인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니 그가 달리 어떻게 그런 기회를 찾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한유는 인재를 사랑하는 마음에 <휘변(諱辯)>이라는 글을 썼다. 한유는 글에서 고전을 인용해 피휘(避諱)에 대한 예법(禮法)의 요구를 천명하면서 이하가 도대체 어느 예법을 어겼느냐며, 부친의 성명이 진숙(晉肅)이라고 해서 그 아들이 과거시험을 볼 수 없다고 한다면 부친의 성명에 어질‘인(仁)’자가 들어가면 그 아들은 사람‘인(人)’이 될 수 없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한유의 이 <휘변>은 천고의 명문장이 되었으며 후에 <고문관지(古文觀止)>에 입선되기도 했다. 청(淸)나라 때 펴낸 <고문관지>는 선진(先秦)시기부터 명(明)나라 후반까지 동안의 가장 우수한 문장 222편을 수록한 산문집이다. 하지만 이하는 평생 진사과거시험에 참가할 수 없어 봉례랑(奉禮郞)과 같은 작은 벼슬만 하다가 26살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한유는 확실히 안목이 있었다. 이하의 인생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200여 수의 시 중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오래도록 전해지는 명시가 아주 많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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