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4 09:44:59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한유 편: 제3회 직언을 했다가 좌천되다

(사진설명: 한유의 서예)

제3회 직언을 했다가 좌천되다

원화(元和) 12년(817년), 한유는 재상 배도(裴度)를 따라 회서(淮西)와 채주(蔡州) 평정을 나가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한유는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한유는 여전히 우울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아내 노씨(盧氏)가 물었다.

“또 무슨 일이세요? 지난 번에는 궁중에서 백성의 물자를 싸게 사들이는 ‘궁시(宮市)’를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산양현(山陽縣)으로 좌천되는 바람에 기분이 안 좋았는데 이번에는 승진했잖아요? 그런데도 왜 우울하세요?”

아내의 말에 한유가 탄식조로 대꾸했다.

“폐하께서 나더러 <평회서비(平淮西碑)>를 쓰라고 하셨소. 이는 천고에 길이 남을 좋은 일인데 이로 인해 나의 명성이 크게 피해를 보니 어찌 괴롭지 않겠소?”

노씨가 놀라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세요?”

“이번 평정에서 야밤에 채주에 진입해 오원제(吳元濟)를 생포한 이소(李愬)의 공이 가장 크오. 하지만 재상인 배도(裴度)가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라고 하지 않겠소. 비석이 다 새겨지자 이소의 부인이 궁을 드나들며 사람들에게 비문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배도가 이소의 공을 빼앗았다고 말했소. 결과 폐하께서 내가 쓴 비문을 지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단문창(段文昌)에게 명해 다시 쓰게 하셨소. 품행이 바르고 두려움을 모른다고 소문난 내가 이번에 정말로 개망신을 했소.”

“이번엔 당신이 확실히 잘못했어요.”

“배도는 재상이오. 그가 그렇게 쓰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소?”

억울해 하는 한유를 바라보며 아내 노씨도 할말을 잃었다.

사실 한유는 벌써부터 배도를 그다지 옳게 보지 않았다. 일찍 국자감(國子監) 박사(博士) 때에 한유는 배도가 지방 교육을 중시하지 않고 말할 권리를 억제하는 것을 보고 <자산불훼향교송 (子産不毁鄕校頌)>을 썼다. 글의 첫 머리에 한유는 ‘내가 그리는 옛 사람(我思古人) 첫 번째가 바로 정나라의 자산이로다(伊鄭之僑)’라고 쓰고 말미에는 ‘어허(於虖)!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四海所以不理) 군주에게 현명한 신하가 없기 때문이라(有君無臣)! 그 누가 자산의 재능을 이어받을 것인가(誰其嗣之) 나는 옛 사람을 그리노라(我思古人)’라고 말했다. 한유는 자산을 칭송하고 옛 사람을 그리는 것을 빌어 배도가 재상 자격이 없음을 비유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군주에게 현명한 신하가 없고(有君無臣)’재상의 문제로 그런 상황이 이어졌을까? 원화(元和) 14년(819년), 한유는 직언을 한 것으로 인해 큰 화를 초래했다.

봉상(鳳翔) 법문사(法門寺)의 호국진신탑(護國眞身塔)에는 현장(玄奘) 법사가 천축(天竺)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불지사리가 봉안되어 있었다. 불서(佛書)에 의하면 불지사리는 30년에 한 번씩 공양을 받는다고 하며 불지사리를 공양하면 그 해 풍년이 들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정된다고 한다.

819년, 당헌종(唐憲宗)은 사흘간 황궁에서 불지사리를 공양한 후 여러 사원들에서 윤번으로 공양하기로 결정했다. 현종제는 환관 두영기(杜英奇)에게임고역참(臨皐驛站)에 가서 사리를 맞이한 후 광순문(光順門)으로 입궐하게 하고 자신은 몸소 성루에 올라 사리의 입궐을 지켜보았다.

황제의 거동에 왕실과 귀족, 선비와 농부 등 모두가 너도나도 불지사리를 맞이하고자 다투어 시사(施舍)했다. 돈이 있는 사람은 가산을 탕진하고 돈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며 모두 석가모니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승려와 도사들이 많은 땅을 보유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며 조정의 재정수입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한유는 원래부터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반대했다. 그는 한 때 <원도(原道)> 등 철학서를 써서 불교와 도교를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니 한유의 눈에 불교를 신앙하는 황제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우매한 일에 빠진 것이었다.

한유는 천 자가 넘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썼다. 그는 역사사실을 인용하여 불교가 있기 전에 현명한 군주의 재위 시간이 더 길고 군주도 더 장수했으며, 불교가 전파된 후 불교를 신앙하는 황제는 오히려 더 일찍 죽거나 아니면 나라를 잃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불교는 황제와 백성에게 복지를 마련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한유는 말했다. 한유는 또 이른바 불지는 시신의 일부분이고 썩은 뼈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런 것이 어떻게 궁중에 공양될 수 있냐고 반문하고 나서 사리를 버리거나 태워버려 그 뿌리를 뽑고 미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유의 상소문을 읽은 당헌종이 대로해서 재상을 불러 말했다.

“조정을 비방하는 한유를 끌어내서 목을 쳐라!”

지난번에 한유가 자신의 뜻을 따른 비문을 쓴 것으로 인해 그런지 배도는 이번에는 생각밖에 이렇게 아뢰었다.

“폐하를 거역한 한유는 확실히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을 치면 이제 누가 감히 직언을 하겠습니까?”

“그는 불교를 신앙하는 황제는 단명(短命)한다고 말했소. 빨리 죽으라고 짐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오? 한유의 죄는 사할 수 없소.”

후에 한유의 목숨을 살려주라고 사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헌종제는 그를 살려주었지만 대신 그를 머나먼 오지인 영남(嶺南)으로 좌천시켜 조주(潮州) 자사(刺史)를 맡게 했다.

한유는 아내와 아이들을 이별하고 비분에 차서 추위를 무릅쓰고 조주로 가는 길에 올랐다. 남관(藍關)에 이르니 대지에는 온통 흩날리는 눈뿐이고 말발굽이 눈에 빠져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한유가 머리 돌려 고향을 바라보니 운무가 자욱한 진령(秦嶺)이 눈앞을 막아 서서 고향은 벌써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한유가 태산 같은 걱정과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신선이 되는 도를 닦기 위해 오래 전에 집을 나간 질손 한상(韓湘)이 말 잔등에 앉아 피리를 불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할아버님,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벼슬길에는 인정이 없고 황제 신변에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이제 제가 왜 집을 떠나 명산대천을 돌아다니며 신선이 되는 도를 찾는지 아시겠죠?”

한상의 말에 한유는 시로 대답했다.

아침에 조정에 한 마디 상주했다가(一封朝奏九重天)

저녁에 조주로 귀양을 가니 가는 길 팔 천 리로다(夕貶潮州路八千)

천자를 위하여 일 그르침 막으려는 마음인데(欲爲聖明除弊事)

부디 노쇠한 몸의 여행을 애석히 여기지 않노라(肯將衰朽惜殘年)

구름은 진령에 가로 걸쳐 있어 내 집은 어디에 있는지(雲橫秦嶺家何在)

눈이 남관을 둘러싸서 말이 나아가지 않는구나(雪擁藍關馬不前)

네가 멀리서 온 것은 뜻이 있음을 내 알리라(知汝遠來應有意)

내 유골을 강가에서 주워 모으기 위해서임을(好收吾骨江邊)

한상은 <좌천지남관시질손상(左遷至藍關示姪孫湘)>, ‘좌천 길에 남관에 이르러 질손 상에게’라는 시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제 할 일이 많으실거예요. 저는 할아버님을 조주까지 모셔드리려고 온 것이지 할아버님 유골을 거두러 온 것이 아니에요. 물론 할아버님을 조주까지 모셔다 드린 후 저는 3년 동안 홀로 수련할거예요. 저는 반드시 신선이 되는 도를 닦을거예요.”

질손이 도교에 빠진 것을 본 한유는 긴말을 하지 않고 말을 달려 길을 갔다. 한상도 한유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한유의 이 질손이 바로 전설 속 여덟 신선 중 한 명인 한상자(韓湘子)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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