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5 09:48:07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한유 편: 제4회 큰 공덕으로 길이 이름을 남기다

(사진설명: 한유 기념관 일각)

제4회 큰 공덕으로 길이 이름을 남기다

아침에 조정에 한 마디 상주했다가(一封朝奏九重天)

저녁에 조주로 귀양을 가니 가는 길 팔 천 리로다(夕貶潮州路八千)

팔 개월 동안 백성을 위해 네 가지 좋은 일 하니(八月爲民興四利)

그 땅의 강산은 모두가 성이 한씨로다(一片江山盡姓韓)

이 시의 첫 두 구절은 한유가 쓴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조주(潮州)인들이 쓴 것이다. 이 두 구절에서 한유가 조주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조주인들이 천 년이 넘도록 길이길이 한유를 기린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주에서 8개월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한유는 네 가지 좋은 일을 했다.

첫째,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농업과 양잠업을 발전시켰다. 조주인들은 지금까지도 한유가 홍수를 다스린 전설을 전해온다. 한유가 조주자사로 부임한 후 수재가 나서 밭이 물에 잠겼다. 한유는 말을 타고 성북(城北)에 이르러 홍수가 북산(北山)에서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지형과 물의 흐름을 자세히 관찰하고 나서 부하에게 말했다.

“내 말이 지나간 자리에 대나무를 꽂아두었다가 그 자리에 언제를 쌓으라.”

백성들은 대나무를 꽂은 자리에 언제를 쌓기 위해 밀려들었다. 그런데 꽂아두었던 대나무는 대숲으로 변하고 대나무를 꽂았던 그 땅은 언덕으로 변해 홍수를 막았다. 그로부터 그 산은 죽간산(竹竿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 전설은 한유가 대나무를 심어 홍수재해를 막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악어에 제사를 지내고 악어를 쫓아냈다. 전한데 의하면 당시 조양계(潮陽溪)에는 악어가 많아 늘 사람을 해쳤다. 한유는 성북의 조양계 기슭에 제단을 쌓고 <제악문(祭鰐文)>을 썼다. 사람들은 먼저 돼지 한 마리와 양 한 마리를 공물로 강에 던진 다음 <제악문>을 읽고 악어에게 선포했다.

“사흘 안에 같은 종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거라. 사흘이 부족하면 닷새 안에 가고, 닷새도 부족하면 이레 안에 가고, 이레에도 안 가면 엄하게 응징한다!”

이와 동시에 한유는 독 있는 화살과 예리한 무기로 악어를 잡게 했다. 결과 조양계의 악어는 모두 남양으로 도주했다. 그로부터 <제악문>은 천고의 명 문장이 되어 후에 <고문관지(古文觀止)>에도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셋째, 교육과 교화를 중시했다. 한유는 자신의 봉록으로 학교를 차렸으며 현지의 인재인 조덕(趙德)을 현위(縣尉)로 발탁해 조주의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그 공으로 조주는 교육이 앞서가는 곳이 되었으며 조주에서는 많인 인재가 났다.

넷째, 노예제를 폐지하고 노예를 석방했다. 당시 경성(京城)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 연해에 위치한 조주에는 아직도 노예제가 유지되어 노예를 팔고 샀다. 한유는 노예를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사면령을 발표해 조주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조주인들은 한유의 은덕을 잊지 않고 악계(惡溪)를 한강(韓江)으로, 문필산(文筆山)을 한산(韓山)으로 고쳤으며 심지어 한유가 심은 적이 있는 한 나무마저 한목(韓木)이라 고쳐 불렀다. 백성들은 좌천된 관리의 억울함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쌓은 그의 공적만을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제왕의 이름으로 산과 물의 명칭을 고친 사례가 없다. 유독 조주의 산수와 나무만이 한유의 성씨로 개명했으니 한유가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는 이 땅과 이 땅 사람들이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우매한 황제 당헌종(唐憲宗)이 환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 뒤를 이은 당목종(唐穆宗)은 곧 한유를 다시 경성으로 불러 들여 국자감(國子監) 제주(祭酒)로 임명했으며 이어 병부시랑(兵部侍郞)을 맡게 했다. 한유는 군사실력도 대단했다. 그는 홀로 반군을 찾아가 군사를 위로하고 반란을 평정했다. 그는 자신의 높은 명성과 뛰어난 지략으로 반군 두령을 설득해 반군을 조정에 귀순시켰다. 그리하여 소동파(蘇東坡)는 ‘문장으로 팔 대에 걸쳐 부진했던 쇠약한 기운을 일으키고(文起八代之衰) 도로는 천하의 가라앉음을 구제했다(而道濟天下之溺)’고 쓰고 나서 ‘충성심은 임금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忠犯人主之怒) 용맹은 삼군의 장수를 빼앗을 수 있었다(而勇奪三軍之帥)’고 썼던 것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바로 불지사리 건으로 황제에게 직언을 한 일과 홀몸으로 반란을 평정한 일을 말한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다. 56살의 한유는 노쇠했다. 한유가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조카 십이랑(十二郞)이 죽자 그는 천고의 제일 제문(祭文)으로 인정되는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을 썼는데 그때 벌써 ‘눈이 침침하고(而視茫茫) 머리가 희끗희끗하고(而發蒼蒼) 치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而齒牙動搖)’고 쇠락한 느낌을 적었다. 이제 회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유는 온갖 질환의 고통을 받았다. 그는 건강을 찾고 장수하기 위해 매일 유황을 먹인 수탉 한 마리를 먹었는데 그 유황닭으로 인해 한유는 오히려 더 빨리 노쇠해졌다.

한유의 허약한 체질과 온갖 질병으로 인해 첩실 중 한 명이 집을 나갔다. 슬픔에 빠진 한유는 체면이 구겨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침상에 누워 자신의 과거 잘못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종친인 이실(李實)이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 법을 어겼는데 그가 경조윤(京兆尹)으로 임명되었을 때 나는 왜 아부하는 글을 써서 그를 칭송했지? 그의 권력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던가? 후에 이실이 통주(通州)로 좌천되었을 때 나는 재차 글을 써서 그의 악행을 널리 알려 화풀이를 했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나의 어려운 점을 어찌 알겠는가? 그들은 다만 나를 바람을 보고 노를 젓고 아첨을 일삼으며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대신 돌을 던지는 후안무치의 소인배로 보지 않겠는가? 참으로 후회되는구나!”

길게 탄식하고 나서 한유는 탁상에 작은 산처럼 쌓여 있는 금은보화를 바라보며 또 다른 일을 떠올렸다.

“그 날 솔직하고 의를 중히 여기는 문하생 유예(劉乂)가 탁상에 쌓여 있는 황금과 백은을 보더니 한 무더기나 집어 가져가면서 이렇게 웃지 않았는가? ‘이건 모두 죽은 사람에게 아부하여 얻은 돈이니 나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약을 올린 것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 것으로 소문이 자자하자 돈 많은 사람들이 분분히 나를 찾아와 묘지명을 써달라고 했다. 묘지명은 죽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인데 죽은 사람의 좋은 말을 한들 어떤가?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재물을 탐내고 죽은 사람에게 아부한다고 비난한다. 아아, 이것도 내 잘못이구나!”

한유는 이제라도 손실을 줄이려고 생각했다. 그는 기력만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과거의 문장 중에서 사교적인 문장을 삭제했다. 그는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되는 아부하는 글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유황닭 한 마리를 먹은 한유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몽롱한 가운데 과거 화산(華山)을 등반하던 때로 돌아간 듯 느꼈다. 예로부터 화산에 오르는 길은 한 갈래뿐이고 또 ‘산에 오르기는 쉽지만 내려오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때 한유는 천길 나락의 정상인 창룡령(蒼龍嶺)에 올라 서 있었다. 발아래 펼쳐진 끝없는 심연을 보는 순간 고소공포증이 유발된 한유는 두 다리가 나른해지며 절망에 빠졌다. 당시 한유는 정상에서 대성통곡했고 그 소식을 들은 화음현령(華陰縣令)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구했다. 하지만 이번에 한유는 가슴이 답답해서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 다리를 뻗치는 바람에 천길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다.

문장의 대가 한유는 이렇게 유명을 달리했다. 그 때 그의 나이 57살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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