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6 10:05:36 출처:cri
편집:李仙玉

[사마천 편-5] 거작을 완성하고 의연하게 사라지다

(사진설명: 사마천의 석상)

제5회 거작을 완성하고 의연하게 사라지다

궁형을 받고 집에 돌아온 사마천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열흘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 열흘 동안 그림에 조예가 깊은 아내 유천랑(柳倩娘)은 남편의 화상을 그렸다. 그녀는 궁형을 받은 후 남편의 외모가 과거와 많이 달라질 것을 알았던 것이다. 구레나룻이 멋진 사마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씨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받은 마음의 상처가 육신의 상처에 비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는 사이에 남편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당부했다.

궁형을 받은 육체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엄청난 생리적인 변화로 인해 사마천의 마음의 상처는 시도 때도 없이 찢어지고 비틀어지며 점점 더 커지고 깊어졌다. 멋지던 그의 구레나룻도 점점 다 탈락되고 저음에 허스키하던 목소리마저 날카로운 고음으로 변해 여인의 목소리 같았다.

어느 날, 사마천은 날이 밝자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서 붓을 날리며 그의 저서를 쓰다가 유씨가 조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라고 해서야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세안 중에 손으로 얼굴을 만지니 수염이 한 대도 남지 않아 마음 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고 등골에서는 식은 땀이 났으며 두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 듯 쏟아졌다. 사마천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홀연 듯 “황명이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그는 급히 홀에 나와 무릎을 꿇고 어지를 받고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사마천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황명을 전하러 왔던 대신은 궁으로 돌아가고 아내 유씨가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보통 형을 받은 사람은 모두 서인(庶人)으로 전락되는데 이번에 폐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당신을 승진시켜주셨는데 왜 이렇게 슬퍼하시는 거예요?”

유씨의 물음에 사마천이 탄식했다.

“당신이 폐하의 속마음을 어찌 알겠소! 중서령(中書令)은 확실히 구경(九卿)에 드는 높은 관직이고 항상 폐하를 따라다니며 황궁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소. 하지만 이는 통상 환관들이 담당하는 직위이오. 그러니 폐하께서 의도적으로 나에게 모욕을 주시려는 것이오!”

유씨는 그제서야 황제의 의도를 알고 분노를 터뜨렸다.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지략을 가진 총명하신 폐하께서 참으로 마음을 쓰셨네요. 폐하의 마음 속에서 신하들은 인간이 아닌가요?”

사마천이 아내의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 참으로 대단하시오! 내가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오. 천문현상을 관찰하고 역법을 제정하고 사서를 편찬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원래 중서령이 태사의 일을 관리하는데 나를 중서령으로 앉혀 봉록을 많이 주면 내가 마음 놓고 사서를 편찬할 수 있고 또 다른 태사들을 관리하니 내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원래 하던 일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소. 폐하께서는 확실히 마음을 쓰셨소!”

그로부터 사마천은 중서령이 되어 태사의 일을 계속했고 늘 한무제를 모셨다. 동방삭(東方朔)은 한무제의 속마음을 가장 잘 알았다. 한무제는 당시 가장 총명한 선비들인 동방삭과 사마천을 한 사람은 내시로 보고 다른 한 사람은 배우(俳優)로 보았다. 한무제가 자신들을 어떻게 보든 동방삭과 사마천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아끼며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사마천은 화가 복이 되어 궁형을 받은 것으로 인해 승진도 하고 한무제의 측근도 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사마천은 또 한번 큰 화를 당하게 되었다.

당시 사마천에게는 임안(任安)이라고 하는, 익주(益州) 자사(刺史)로 있는 벗이 있었다. 머나먼 촉의 땅에서 사마천이 중서령이 되어 한무제의 측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사마천에게 서신을 보내 황제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황제에게 현명한 인재를 추천하는 백락(伯樂)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임안의 서신을 받아 본 사마천은 쓴 웃음만 짓고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기원전 93년, 장안(長安)에서 한무제와 태자가 대결하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태자가 실패해서 자결했고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몇 만 명이 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사마천의 벗인 임안이었다.

임안이 사형수 감방에 갇혔다는 것을 안 사마천은 그의 서신에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역모죄를 지은 임안에게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안 사마천은 이제 답신을 보내지 않으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벗과 결별한다는 마음으로 장문의 서신을 썼다.

<보임안서(報任安書)>라는 제목의 이 서신에서 사마천은 이릉 사건으로 자신이 크나큰 치욕을 받게 된 과정을 서술하고 마음의 고통과 분노를 토로했으며 자신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은 전적으로 황제(黃帝) 때부터 한무제까지 3천 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친이 생전에 다 하지 못했던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사마천은 사상성과 예술성을 다 갖춘 자신의 이 서신이 그에게 멸문지화를 가져다 준 동시에 후세에 중국 서신체(書信體) 산문(散文)의 절창, 이 세상 최고의 산문이 되어 길이 길이 세상에 남을 줄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임안이 죽은 후 옥졸은 임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사마천이 임안에게 보낸 서신을 발견하고 한무제에게 넘겼다. 한무제는 사마천이 서신에서 자신을 어리석고 포악한 군주라고 비판했다고 여겨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사마천을 하옥시키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편 그 때 사마천의 집에서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읽은 첫 사람이 된 동방삭이 흥분을 참지 못했다.

“태사공, 그대의 이 사서는 너무 잘 썼네! 단언하건대 이 사서는 반드시 후세에 영원히 전해질 걸세.”

사마천이 대꾸했다.

“나는 폐하와 한경제(漢景帝)를 사실대로 썼네. 아마 폐하께서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러니 명산에 감추어 후세의 성인 군자들이 열람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네.”

“자네 정말 산중에 감추려는가?”

“1부를 더 필사했네. 1 부는 벌써 명산에 감추었고 이것은 부본인데 수도에 남기겠네.”

두 벗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황명을 받든 호위들이 들이닥쳤다. 사마천이 입을 열었다.

“동방 형, 나는 이제 큰 일을 마쳤으니 마음이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더는 치욕을 받지 않을 걸세. 이번 생은 여기서 헤어지고 우리 다음 생에 다시 만나세!”

사마천은 아내 유씨에게로 돌아서서 말을 이었다.

“나의 해골을 고향으로 가져가고 두 아들도 장안을 멀리 떠나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시오! 이 생에 당신을 너무 고생시켰소. 내 다음 생에 당신의 은혜를 갚으리다!”

그리고 나서 호위를 따라간 사마천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가 감방에서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마감했다고 추측했지만 사람도 돌아오지 않고 시신도 없으니 그냥 추측만 할 뿐이었다.

사마천이 과거의 굴원처럼 위수(謂水) 강기슭에 이르러 울부짖듯 시를 읊고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나서 강물에 뛰어든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씨와 두 아들은 화를 피해 장안을 탈출했으며 두 아들 중 한 명은 동(同)씨, 다른 한 명은 풍(馮)씨로 성씨를 바꾸었다. 그로부터 수 백 년간 이어진 한 왕조 치하에서 사마천의 자손 중 한 사람도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태사가 된 사람은 더욱 없었다고 전해진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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