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대업을 마치고 삶을 마감하다
한화제(漢和帝) 영원(永元) 4년, 즉 92년에 반초는 이이치이(以夷治夷)의 전략으로 다국가 군대를 거느리고 구자국과 고묵국, 온숙(溫宿)국 등 가장 완고한 세 나라를 해결했다. 그로써 서역의 50여개 도시 국가 중 한나라에 복속되지 않은 나라는 언기국과 위수(危須)국, 위리(尉犁)국 3개국만 남았다. 이 작은 세 나라들이 감히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서역도호부 진목을 살해하는데 동참한 원인으로 반초가 그들을 참수할까 두려워서였다.
그 해, 조정은 큰 공을 세운 반초를 도호(都護)로, 서간을 장사(長史)로 임명했다. 황명을 전한 사마 요광(姚光)이 반초를 몰래 불러 낮은 소리로 말했다.
“큰 불상사가 있으니 부디 너무 상심하지 말게!”
놀란 반초가 머리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자네 형 반고가 두헌(竇憲)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했네.”
요광은 반초가 눈물을 머금고 말이 없자 계속 말했다.
“대장군 두헌은 권력을 휘둘러 화를 자초한 것이지만 자네 형은 소인배의 모함으로 하옥되어 재앙을 입었네.”
반초가 물었다.
“<한서(漢書)>는 다 편찬했는가요?”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천문지(天文志)>가 남아서 자네 누이동생 조대가(曺大家)가 계속한다고 들었네.”
“잘 됐군요. <한서>가 마감되면 저희 형님께서는 유감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초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자고로 황실의 가족관계는 아주 복잡했다. 반고의 고모 할머니가 바로 서한(西漢) 때의 유명한 재녀 반첩여(班婕妤)이다. 반첩여는 한성제(漢成帝)의 후궁이었는데 황제의 총애를 잃자 <원가행(怨歌行)>을 써서 불만을 토로했다. 그로부터 가을철의 부채라는 의미의‘추선(秋扇)’으로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자나 철이 지나 쓸모 없이 된 물건을 비유하는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 후 당(唐)나라 때 “옥같이 고왔던 얼굴 까마귀만 못하나니(玉顔不及寒鴉色) 까마귀는 그래도 소양궁의 그림자를 보고 오거늘(猶帶召陽日影來)”라는 시구가 유명해지게 했다. 반씨 가문은 황실의 친척이지만 가노(家奴)의 권력 남용으로 인해 화를 입었고 그 바람에 사마천(司馬遷)의 버금으로 가는 사학(史學)의 대가 반고도 옥중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또 반고가 집필하던 방대한 저서인 <한서>는 재녀인 그의 누이동생 반소(班昭)가 계속해서야 편찬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1년이 지나자 반초는 사신을 보내 언기국과 위수국, 위리국 왕들에게 “3국을 귀순시키고자 도호가 곧 방문하게 되는데 잘못을 바로잡고 영접대신을 보내면 왕과 제후로 봉할 것이다. 이에 각국 왕들에게 채색 비단 5백필을 내린다”는 내용을 통보하게 했다. 언기국 왕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위울에서 반초를 맞이한 후 선물을 바쳤다. 하지만 언기국으로 돌아가자 바람으로 언기국으로 진입하는 다리를 철거했다. 반초가 다른 통로로 언기국에 진입하자 언기국 왕은 크게 놀라 산중으로 도주해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끝까지 버티려고 했다. 언기국의 좌후(左侯)가 몰래 사람을 반초에게 보내 상황을 알렸다. 반초는 언기국 왕을 미혹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신의 목을 베고 3명의 왕과 대신들을 위한 잔치를 마련했다. 언기국 왕과 위리국 왕은 잔치에 왔으나 위수국 왕이 오지 않았으며 언기국 재상은 몰래 도주했다.
잔치가 시작되자 반초는 근엄한 얼굴로 힐문했다.
“그대들이 과거 도호부를 공격하고 도호를 살해할 때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이하여 빠진 자가 있는가?”
말을 마친 반초는 사람을 보내 언기국 재상과 위수국 왕을 잡아와 잔치에 참가하러 온 언기국 왕과 위리국 왕까지 함께 그들이 진목 도호를 살해한 옛 성에 압송해다가 참수함으로써 일벌백계했다. 그리고 세 왕의 수급을 낙양으로 보낸 동시에 반초는 세 나라에 새 왕을 세웠다. 그로부터 서역의 50여개 도시 국가 전부가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반초는 한나라 군사 1천 명에 의지하고 이이치이(以夷治夷)의 전략으로 천군만마를 동원해 서역의 도시 국가 전부를 한나라에 복속시켰다. 그로부터 서역의 남쪽 코스와 북쪽 코스의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어 실크로드가 원활하게 통했다. 반초는 한나라의 문명을 서역에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에까지 전했다. 이런 소식이 낙양에 전해지자 한나라 조정에서 반초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95년, 한화제(漢和帝)는 반초를 정원후(定遠侯)로 봉하고 그에게 식읍(食邑) 1천 가구를 내렸다.
반초가 서역에서 50여개의 도시 국가를 관리하는 사이에 세월은 살같이 흘러 반초는 노인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고향을 그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정원후에 책봉된 후 또 5년이 지나 반초는 작은 아들 반용(班勇)을 입공(入貢) 사신들과 함께 낙양으로 보내며 자신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리게 했다. 반초는 상소문에서 “신은 감히 고향 주천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 않고(臣不敢望到酒泉郡) 다만 살아서 옥문관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但愿生入玉門關)”라고 썼다. 그토록 완곡하고 그토록 슬픈 반초의 글은 나이 들어 고향을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반초의 마음을 그대로 종이 위에 옮겼다.
하지만 한화제는 이렇게 생각했다.
“반초는 수십 년간 서역을 관리하며 서역에서 명성을 떨쳤다. 누가 그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 그가 귀국하면 서역이 또 다시 흉노의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서역에 있으니 그가 서역에서 생을 마감하게 하자!”
한화제의 그런 속마음으로 인해 반초가 상소문을 올린 지 3년이 지나도록 조정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다행히 반초에게는 반소라는 재녀 누이동생이 있었다. 오라버니 반고가 쓰던 <한서>를 계속해서 마감한 그녀는 부친과 오라버니 생전의 소망을 달성했다. 재능이 남다른 그녀는 낙양에서 이름이 자자해 문장을 좋아하는 등(鄧) 황후가 그녀를 궁에 불러 들여 후궁들을 가르치게 했다. 사별한 그녀의 남편 성씨가 조(曺)씨라 사람들은 그녀를 조대가(曺大家)라 불렀다. 반소는 평생을 서역에 바친 둘째 오라버니 반초가 고희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조정에서 여전히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자 슬프고 분한 마음이 앞섰다. 반초가 쓴 “신은 감히 고향 주천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살아서 옥문관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라는 글귀를 생각할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반소는 상소문에서 ‘옛날에 열 다섯 살에 군복무를 시작하고(古者十五受兵) 나이 쉰이면 군복무를 면한다(六十還之)’는 이치도 설명하고 ‘주문왕(周文王)이 영대(靈臺)를 축조하다가 발견한 유골을 위해 새로 장례를 지내고 전자방(田子方)이 위문후(魏文侯)에게 늙은 말을 잘 대해주라고 권고한’ 고사도 인용하며 반초를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반소의 상소문을 본 한화제는 심히 감동되고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즉시 신임 서역도호를 임명해 반초를 대신하게 했다. 반소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학식으로 황제를 감동시켜 끝내 반초의 귀향을 성사시켰다.
반초는 40살에 서역으로 가서 71살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양의 풍물은 그토록 다정하고 고향의 소리는 그토록 듣기 좋았다. 반초는 젊었을 때의 일도 모두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고향에서 옛 사람들을 만나 술을 나누며 어릴 때의 재미나는 일도 이야기하며 행복하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옛 사람들은 다수가 벌써 세상을 떠났고 자신도 오랜 과로로 쓰러져 고향 땅을 다시 밟은 지 한 달 만에 반초는 돌연히 세상을 하직했다. 과연 반초는 살아도 서역, 죽어도 서역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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