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9 10:19:38 출처:cri
편집:李仙玉

[채륜 편-1] 말단 내시 장인의 두목이 되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채륜)

위대한 발명가 채륜

내시의 신분으로 고관이 된 것은 채륜(蔡倫)에게 있어서 행운일까 불행이었을까? 궁궐의 암투로 흥기하고 궁궐의 암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채륜, 위대한 발명가 채륜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동한(東漢) 때의 걸출한 발명가인 채륜은 어려서 내시로 입궐해 자신의 총명함과 풍부한 창조력으로 4명의 황제를 보좌하며 점점 더 높은 직위에 올라 용정후(龍亭侯)에 봉해져서 귀족이 된다.

그가 발명한 종이는 고대 중국의 ‘4대 발명’ 중 하나로 인류 문화의 전파와 세계 문명의 진보에서 뛰어난 기여를 했다. 채륜은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의 책 <랭킹 100: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The 100: A Ranking Of The Most Influential Persons In History)>에서 제7위에 올랐고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즈(Time)>가 발표한 ‘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에도 입선되었다.

위대한 발명가 채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말단 내시가 장인의 두목이 되다 

낙양지귀(洛陽紙貴)는 서진(西晉) 시기의 고사에서 유래한 사자성어이다. 책이 잘 팔림을 의미하는 이 사자성어는 좌사(左思)가 저서 <삼도부(三都賦)>를 쓰자 사람들이 다투어 베껴서 낙양의 종이 값이 올랐다는 것을 말한다. 종이가 있었기에 당시 좌사의 <삼도부>는 하루 아침에 유명세를 탔고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한화제(漢和帝)의 등(鄧) 황후가 문장을 좋아했기에 일대의 재녀 반소(班昭)는 낙양에 이름이 자자한 조대가(曺大家)가 되었다. 또 등 황후의 이 취미는 엄청난 발명가를 육성하기도 해서 그 발명가는 인류의 문명사를 바꾼 위대한 인물로 온 세상에 길이 길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쓸모 없는 물건을 유용하게 이용하여 고대 중국의 4대 발명 중 하나인 종이를 발명한 채륜이다.

동한 후궁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오랫동안 한나라 조정을 장악했던 두(竇) 태후가 천수를 다 하면서 한화제는 친정(親政)을 시작하는 동시에 가장 총애하는 귀인(貴人) 등수(鄧綏)를 황후로 세운 것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등 황후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사와 부(辭賦)에 능했으며 문장을 좋아했다. 황후가 되어 한나라의 후궁을 장악한 등 황후는 즉시 재녀 반소를 궁으로 불러 들여 후궁들에게 <여계(女誡)>를 가르치게 했다. 당시 널리 유행되고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여계>는 반소의 대작이다. 애초에 후궁들의 교과서로 편찬되었고 수 천년 동안 이어진 봉건사회의 영향으로 인해 <여계>는 봉건사회 여인들이 지켜야 할 삶의 준칙을 기록한 책이 되었다.  

후궁의 스승이 되면서 반소는 늘 입궐했고 그 기회에 등 황후는 반소와 문학을 담론했다. 등 황후는 아마도 이 목적에서 반소를 후궁의 스승으로 청했을지도 모른다. 반소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류 사학자인 동시에 중국 최초의 여류 사부(辭賦)의 대가이기도 하다. 등 황후는 반소의 <동정부(東征賦)>를 특히 좋아했다. 시와 글을 논하면서 두 여인은 점점 더 의기투합했고 점점 더 심도 있는 화제를 담론했다. 등 황후는 심지어 황실의 서적을 정리할 대담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등 황후와 반소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 것은 오늘의 주인공 채륜의 비하인드 스토리의 배경을 설명하고자 함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채륜과 두(竇) 태후간의 이야기를 더 듣고 가자. 두(竇) 태후가 사망한 후 가장 두려움이 앞선 사람은 채륜이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채륜은 원래 한장제(漢章帝)의 어전에서 황명을 전하는 황문시랑(黃門侍郞)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엄청난 일이 작은 벼슬을 하는 채륜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당시 한장제의 중전이었던 두(竇) 황후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이는 후에 새 황후의 손에 죽을 수도 있음을 말했다. 왜냐하면 당시 모친은 아들에 의해 귀함을 받는 모이자귀(母以子貴)가 성행했기 때문에 자식이 없으면 황후의 자리를 지키기 힘들었던 것이다. 두(竇) 황후는 젊고 총명하고 머리도 좋을 뿐만 아니라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채륜을 총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竇) 황후는 채륜을 불러 놓고 태자(太子)의 생모 송귀인(宋貴人)이 교태를 부리는 미법(媚道)을 썼다고 증명하라고 시켰다. 그 말을 듣자 백지장처럼 하얗게 된 채륜의 얼굴에서 땀이 굴러 떨어졌다. 두(竇) 황후가 그 참에 협박을 가했다.

“너는 이제 나의 계략을 알았으니 나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을 경우 살아서 궁을 나가지 못할 것이다. 또 기밀을 누설해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니 알아서 하거라!”

누구에게나 한 번 밖에 없는 생명,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타고난 본성이었다. 하물며 그 때 채륜은 고작 18살이었다. 채륜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먹거렸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채륜이 증인으로 나서며 두(竇) 황후의 모략이 성공되어 송 귀인은 하는 수 없이 자살하고 태자 유경(劉慶)은 청하(淸河) 왕으로 강등되었다. 송 귀인의 슬픈 죽음을 본 채륜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너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두(竇) 황후의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竇) 황후는 또 채륜을 시켜 황자 유조(劉肇)의 생모 양(梁) 귀인을 모함하는 익명의 서신을 쓰게 했다. 이번에 채륜은 더는 머리를 숙이지 않고 꿇어 앉아 끝까지 버텼다.

“아예 저를 죽여주십시오!”

두(竇) 황후는 큰 공을 세운 채륜을 어여삐 여겨 그를 살려주었다.

“돌아가거라. 내가 더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마.”

대신 두(竇) 황후는 다른 내시를 협박해 양 귀인을 모함했고 양 귀인도 결국 핍박에 의해 자살했다. 두(竇) 황후는 양 귀인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그를 태자로 세웠다. 한장제가 붕어하자 10살의 태자 유조가 즉위해 한화제가 되었고 태후가 된 두(竇) 황후가 수렴청정으로 황권을 자신의 수중에 장악했다. 두(竇) 태후는 채륜을 구경(九卿)과 같은 지위의 중상시(中常侍)로 임명했으며 정사에 간여하게 했다. 그로부터 환관이 정식으로 정사에 간여하기 시작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오면 그 두(竇) 태후가 붕어하고 한화제가 친정했으니 채륜이 두려움에 떨 만도 했다. 이와 동시에 채륜은 한화제의 생모인 양 귀인의 모해 사건에 동참하지 않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 때 그 내시가 양 귀인을 모함하는 익명의 서신을 썼다는 죄명으로 능지처참을 당하는 것을 본 채륜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슬픔을 느꼈다.

“이제 언젠가 청하왕 유경이 재기하면 나도 죽은 목숨이겠구나.”

두려움을 안고 채륜은 한화제와 등 황후에게 더욱 충성하며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면서 황실에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한나라 황궁에는 전문 황실의 용품을 제작하는 상방처(尙方處)가 있었다. 한화제는 채륜이 충성심과 능력도 있고 일도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채륜은 상방령(尙方令)을 겸하여 짐을 위해 칼과 검이랑 만들거라.”

상방령의 직위는 중상시보다 낮았으나 장인들을 직접 관리하며 황제를 위해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자리였다. 중상시보다 상방령이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채륜은 급히 엎드려 사은(謝恩)했다. 채륜은 확실히 총명하고 속이 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륜은 황제를 위해 세상 보검의 샘플이 될만한 정교하고 강한 보검을 만들었다. 물론 한화제는 아주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등 황후가 채륜을 불렀다.

“유생들을 불러 황실의 서적을 정리하려 하는데 죽간으로 된 서적은 너무 무겁고 비단에 쓴 서적은 또 너무 비싸며 일반 원단을 종이로 사용하면 또 품질이 너무 떨어지네. 어떻게 방법을 대서 가격도 저렴하고 무게도 가볍고 품질도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없겠소? 폐하께서 늘 채 상시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하시던데 이 일도 맡아 보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하늘에 올라가 별이라도 따오겠습니다. 머리를 짜내고 이 한 몸 부서진다 해도 반드시 만들어내겠습니다.”

바로 채륜의 이 약속이 낡은 그물과 삼베 등 무용지물을 유용하게 이용해 온 세상이 놀란 진정한 종이를 만든 엄청난 발명을 이루게 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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