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29 09:03:34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소동파 편: 제4회 마지막 상경 길에 세상을 뜨다

(사진설명: 소동파의 석상)

제4회 마지막 상경 길에 세상을 뜨다

과연 벼슬길은 부침의 반복이었다! 신종(神宗)제가 붕어하고 7살 난 철종(哲宗)이 보위에 올라 고태후(高太后)가 나랏일을 보았다. 고태후는 신법을 폐지하고 사마광(司馬光)을 수상(首相)으로 두었으며 소동파도 경성으로 불러들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해 전문 황제의 조서(詔書)를 꾸미게 했다.

어느 날, 금방 조서를 다 썼는데 고태후가 말을 꺼냈다.

“고 학사(學士), 경이 경성으로 돌아와 궁을 드나들고 3품 벼슬을 받아 조정의 중용을 받게 된 것이 누구의 은혜인지 아시오?”

소동파가 공손하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아직 연소하시니 소인은 당연히 태후마마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틀렸소. 경을 중용하라고 한 것은 신종(神宗) 황제요. 신종황제는 임종에 신 황제가 아직 어리니 경의 가르침을 받게 하라고 하셨소. 경의 품성과 문장은 이 세상에서 으뜸이라고.”

큰 감동을 받은 소동파는 풀썩 꿇어 앉아 선 황제의 유상(遺像)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는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소동파는 저녁식사 때 국물만 몇 숟가락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에요? 오늘 저녁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돈육찜을 만들었는데도 못 드시고?”

아내의 물음에 소동파가 대답했다.

“조정이 신법을 폐지하기는 했지만 또 소인배들을 중용하고 있소. 그들도 여혜경(呂惠卿) 따위들처럼 사리사욕을 채우고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소. 그들의 머리 속에는 근본 나랏일이 없소. 아아, 신법당(新法黨)이든 구법당(舊法黨)이든 모두 한통속이오.”

“그런 일에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이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안 되겠소. 저녁에 폐하께 올릴 소를 써서 간언해야겠소.”

“제발 부탁이에요. 이제 일 좀 그만 만들어요. 설마 당신 신법당에게 그렇게 당하고 이번에는 또 구법당의 모함도 받으려고 그래요?”

소동파는 아내의 권고도 듣지 않고 신법을 바로잡는 과정이 너무 지나치다고, 그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황제가 말했다.

“왕형공(王荊公)이 세상을 떴소. 경이 그를 위해 칙서를 쓰시오!”

소동파는 깜짝 놀랐다. 왕안석(王安石)이 죽다니? 사적인 친분이 두터운 문우(文友)가? 날카롭게 맞서던 정적(政敵)이? 소동파는 지난해 경성으로 올라오면서 특별히 강령(江寧)에 가서 임천(林泉)에 은둔한 절친 왕안석을 만났다. 각자 아들을 잃은 두 사람은 만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으나 대화의 주요 내용은 역시 나랏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당파 싸움에 열성을 올리는 소인배들로 들끓는 조정을 걱정했다. 그런데 지금 왕안석이 세상을 떠났다. 나무랄 데 없는 그의 인품과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그의 문필을 생각하니 소동파는 격정이 끓어 넘쳐 붓을 들어 천 자가 넘는 칙서를 써내려 갔다.

소동파는 왕안석을 이렇게 평가했다.

아름다운 글은 이 세상에서 으뜸이고

훌륭한 품행은 옛 사람과 나란히 한다.

소동파의 이런 평가에서는 왕안석의 위대한 인격과 절묘한 문장을 볼 수 있고 또 소동파의 넓은 흉금과 단정한 품행도 읽을 수 있다.

신법의 좋은 점은 남기고 폐단만 버려야 한다는 소동파의 견해는 구법당의 불만을 자아내서 소동파는 또 다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포위 공격을 받았다. 조정에 남아 있어 보았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소동파는 또 16년 전의 부임지 항주지주(杭州知州)로 가겠다고 자처하는 소를 올려 황제의 윤허를 받았다.

소동파가 3년간 항주지주로 있으면서 남긴 가장 큰 업적은 서호(西湖)를 정비하고 소제(蘇堤)를 쌓은 것이다. 소동파의 이 업적은 당시 백성에게도 복을 마련했으며 그 복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그 후 고태후는 또 다시 소동파를 경성으로 불러 들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맡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동파와 함께 25년 동안 어려운 인생길을 함께 걸은 두 번째 아내 왕윤지(王閏之)가 세상을 뜨고 고태후도 붕어했다.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제가 음험한 소인배 장돈(章惇)을 재상으로 두면서 소동파의 재난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온 세상에 이름이 자자한 소동파의 재능을 시기한 장돈은 먼저 소동파를 영남(嶺南)의 영주(英州)로 좌천시키고 이어 또 혜주(惠州)를 거쳐 마지막에는 해남(海南) 담주(儋州)로 귀양을 보냈다. 장돈은 소동파가 천애지각에 버려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격이 활달한 소동파는 담주에서 아들 소과(蘇過)와 함께 자체의 힘으로 토담집을 짓고 약재를 캐서 질환을 치료하고 토착민들과 벗하고 책을 쓰는 즐거움을 누리며 잘만 살았다. 그는 또 ‘남쪽 황무지 구사일생 귀양살이 원망치 않으리니(九死南荒吾不恨) 이번 여행의 기이한 절경 평생에 으뜸이어라(玆遊奇絶冠平生)’는 시를 쓰기도 했다. 소동파는 귀양을 여행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소탈함과 활달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철종제가 붕어하자 어린 황제에게 아들이 없는 관계로 동생 조길(趙佶)이 보위에 올랐다. 신 황제가 내린 대사령으로 소동파는 광서(廣西) 염주(廉州)의 벼슬을 받았다가 또 호남(湖南) 영주(永州)를 거쳐 조봉랑(朝奉郞)의 관직을 받고 다시 경성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상경길에 소동파가 상주(常州)에 이르렀을 때는 송휘종(宋徽宗)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元年, 1101년)의 한여름이었다. 절친 미불(米芾)이 찾아와 더위를 피해 배를 타고 산수를 즐기자고 했다.

강 양안의 경치는 그림 같았으나 배는 찜통이었다. 옷깃을 열어젖힌 소동파는 뱃머리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쏘이며 두 발을 시원한 강물 속으로 뻗쳤다. 순간 더위가 가신 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날 저녁 소동파는 밤새 구토와 설사에 시달리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으며 이틀 후 유명을 달리했다. 소동파의 복직을 축하하기 위해 미불이 차린 잔치에서 소동파는 입맛이 없고 술을 넘기기도 힘들었으나 여전히 호방하게 술잔을 거절하지 않으며 목숨을 걸고 미불의 환대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일대의 대문호 소동파, 송사(宋詞) 호방사파(豪放詞派)의 창시자 소동파는 이렇게 호방한 음주로 생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 해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