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4 08:36:36 출처:cri
편집:李仙玉

[조조 편-1] 관도의 대승과 招賢令

(사진설명: 조조의 석상)

난세의 효웅 조조

조조(曹操)는 자신을 모욕하는 글을 쓴 진림(陳琳)을 사로 잡은 후 그의 죄를 물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중용했다. <삼국연의(三國演義)>는 조조를 간신으로 그렸다. 그렇다면 진실한 조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역사 속의 조조는 동한(東漢) 후반의 인물로 고대 중국의 걸출한 정치가이자 군사가이며 문학가이다. 정치가와 군사가로서 조조는 난세에 북방을 통일했으며 대장군과 승상에 이어 위왕(魏王)으로 봉해졌고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 문학가로서 조조는 고악부(古樂府)를 빌어 시사(時事)를 쓴 첫 사람이며 오언시(五言詩)가 주를 이루는 건안(建安) 문학의 대표작가이기도 하다.

조조는 성격이 단순하지 않고 인격이 다양하며 특히 교활하고 의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아들인 조비(曹丕)가 위(魏)나라를 세워 한(漢)나라를 교체한 것으로 인해 ‘역적’이라는 악명을 짊어진다. 그럼에도 조조는 문무를 겸한 인재이고 특히 중국문화에 뛰어난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난세의 효웅 조조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관도의 대승 그리고 招賢令 

난세가 되면 곳곳에서 영웅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동한 후반에 여러 영웅들이 나면서 군벌들 간에 혼전이 벌어졌다. 관도(官渡)에서 벌어진 조조와 원소(袁紹) 군대간의 결전에서 조조는 2만의 병력으로 원소의 10만 대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관도지전(官渡之戰)은 중국의 전쟁사상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긴 대표적인 작전이 되었다.

<위원소격예주문(爲袁紹檄豫州文)>을 쓴 진림(陳琳)이 조조 앞에 끌려왔다. 조조는 선비의 기운이 다분한 진림이 포승으로 결박을 당했음에도 여전히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

“네가 원소를 위해 격문(檄文)을 썼지. 격문이니 좋은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안다. 그리고 나의 10대 죄를 열거한 것도 좋은데 왜 나의 조상을 모욕했느냐? 네가 독한 말만 골라서 쓴 격문을 보고 내가 너무 놀라 식은 땀을 흘리는 바람에 깨질 듯 아프던 머리가 스스로 나아진 줄 아느냐?”

진림도 죽음이 두려웠으나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떳떳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시위에 올려졌으니 쏘지 않을 수 없지요.”

조조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대답을 잘 했다. 참으로 인재는 인재구나. 그냥 선비에 불과한 저자를 죽여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하물며 그는 두통을 고칠 정도로 글을 잘 쓰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각자 할 일을 한 건데. 너를 용서하겠다. 너는 내 곁에서 문서(文書)로 일하거라! 아침 저녁으로 너의 명 문장을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진림은 이렇게 목숨을 살렸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진림의 유명한 악부시(樂府詩) 시집인 <음마장성굴행(飮馬長城窟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조조는 그 후에도 두통병이 발작하면 진림의 글을 가져다 읽었으며 그 때마다 잠시나마 빠개질 듯한 두통을 잊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침대에 누운 조조는 또 두통을 느꼈다. 두통이 시작되자 조조는 또 다시 진림이 쓴 격문을 떠올렸다.

“사공(司空) 조조의 조부 중상시(中常侍) 조등(中常侍曹騰)은 좌관(左悺) 서황(徐璜)과 함께 마귀처럼 요사스런 짓거리를 하고 도철(饕餮)처럼 탐욕스럽게 수탈을 일삼는 횡포를 부렸으며 질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에게 모질게 행패를 부렸다. 조조의 아비 조숭(曺嵩)은 재산을 나누어주고 권세가의 양자가 되었고 뇌물을 주고 벼슬을 샀다. 권문세가에 금과 은을 수레로 나르고 보물은 가마로 실어 날라 바쳐 삼공의 자리를 도둑질하여 올라간 다음 요직에 있던 중요한 인물을 모조리 내쫓았다…”

조조는 등골에 땀을 흘리며 두통도 잊었다.

“아, 진림의 말은 참으로 듣기 거북하다. 하지만 나의 조부 조등은 환관이 아니었단 말인가? 또 나의 부친은 환관의 양자가 아니란 말인가? 부친의 태위(太蔚) 관직은 만 금으로 산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누가 자신의 출신을 선택할 수 있고 누가 환관을 조부로 삼으려 하겠는가? 가문을 중히 여기는 이 시대에 원소의 가문은 4대 째 삼공(三公)인데 나는 심지어 진짜 성씨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친부의 성씨가 하후(夏侯)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진위를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나의 조상은 한(漢)나라 개국 공신이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승상 조삼(曺參)이라고 할 수 밖에. 나의 이 조상은 원소의 조상에 못지 않다. 하지만 원소의 가문이 아무리 고귀하고 혁혁해도 오늘 원소는 나에게 패하지 않았는가. 그는 홧김에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도 참 안 됐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조조는 마음이 한결 개운해졌다. 하지만 원소가 원래는 뜻이 같은 절친이자 어릴 때 장난 치던 친구였으며 함께 벼슬하고 함께 연합군을 무어 맹진(孟津)에서 합류해 동탁(童卓)을 성토하기도 했다는 생각을 하니 또 감개무량해졌다.

“아, 정말로 세월은 무상하고 과거는 돌이키지 못하겠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조조가 원소를 이긴 원인을 생각하니 몇 몇 사람이 그의 머리 속으로 들어와 조조는 과거를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고향에서 가산을 다 털어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았다. 그리고 6년 동안 청주(靑州)의 황건군(黃巾軍)을 격파하고 항복한 정예군사들로 청주군을 구성했다. 청주군은 나 자신의 군대라 할 수 있었다. 후에 모사(謀士)인 모개(毛)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하 되기를 거부하는 자에게 호령하고 농사를 짓고 군비를 축적하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이 심히 전략적 의의를 가진다고 판단해서 건원(建安) 원년(196년)에 낙양(洛陽)으로 천자를 만나러 갔다. 그 때 낙양의 왕궁은 이미 동탁에 의해 소각되고 천자와 신하들은 폐허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허현(許縣)으로 데리고 왔으니 천도한 셈이다. 이렇게 먹을 것 입을 것이 있게 된 천자는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나를 대장군(大將軍), 무평후(武平侯)에 책봉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천자의 보호신이 되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크게 성공하기 까지 모개는 큰 공을 세웠다!

천자의 명을 받든 것으로 인해 나는 민심을 얻어 많은 백성들이 분분히 나에게 복속했다. 물론 그로써 나는 또 많은 땅을 얻게 되었다. 나는 조지(祗)의 제안에 따라 주군(州郡)별로 전관(田官)을 두어 둔전(屯田)을 일으켜 군량문제를 해결했다. 그 때 농민들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 밭이 황폐해졌다. 나는 유민(流民)들을 불러 오고 인구를 이주시켜 둔전을 일궜으며 민력(民力)을 동원해 관개용 수리시설을 건설해 농업생산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후에 다년간의 전쟁을 통해 나는 부친을 살해한 서주(徐州)의 도겸(陶謙)을 죽이고 나의 라이벌들인 여포(呂布)와 진궁(陳宮)을 격파했으며 장수(張)와 그의 부하들을 귀순시켰다. 아쉽다면 서주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원소에게로 도망 간 유비(劉備)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후에 나는 허도(許都)를 공격하러 오는 원소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관도에 주둔했다.

아, 쌍방의 전력 차이는 엄청났다. 원소의 군대는 수십 리 진지에 높은 둑을 쌓고 위에서 아래로 활을 쏘며 공격했다. 후에는 또 땅굴을 파고 지하로부터 나를 기습하려 했다. 나는 투석(投石) 기로 활의 공격에 맞섰고 참호를 깊게 파서 땅굴에 대처했다. 그렇게 수개월간 대치하다 보니 군량이 소진되어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그런데 고집 불통 원소가 모사인 허유(許攸)의 기습작전 계책을 받아 들이지 않아 허유가 나를 찾아왔다. 정말로 하늘이 나를 도와준 거다! 원소가 하북(河北)에서 수송해온 만 섬의 군량이 모두 오소(烏巢)에 있다는 정보를 허유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오소를 급습해 원소의 군량을 소각해버리기만 하면 원소의 군대는 스스로 무너지게 될 상황이었다.

나는 원소의 군영 급습을 막고자 다수의 정예군사를 군영에 남겨두고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오소를 향해 출발했다. 과연 원소는 내가 오소를 향해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대군으로 나의 군영을 포위했다. 하지만 포위공격이 금방 시작되자 오소의 군량이 모두 소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소의 군사는 즉시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대장들인 장합(張)과 고람(高覽)이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했다. 원소는 정세가 기운 것을 보고 군사를 버리고 홀로 하북으로 도주했다가 곧 피를 토하며 죽었다.

관도대전 후 나는 원소의 서신을 정리하다가 나의 장병들 중에 원소와 서신왕래를 한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서신을 다 태워버리고 이렇게 말했다.

당시 원소의 대군이 우리를 포위하고 적군과 아군간 병력차이가 현저해서 나도 승산이 없었소. 하물며 그대들이야 더 하지 않겠소? 그대들이 자신들의 살길을 찾은 것을 나는 이해하고 또 양해하오.

내가 이렇게 하니 양다리를 걸치던 그 사람들이 나를 우러르고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후에 그들이 생사를 불문하고 나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지.

다시 돌이켜 보면 나는 진심을 가지고 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 들인 것으로 인해 성공했다. 인재가 가장 중요하다. 승패는 인재를 어떻게 등용하냐에 달려 있다. 빨리 <초현령(招賢令)>을 발표해야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조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서 금방 잠이 들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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