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6 08:26:02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이청조 편: 제3회 이별과 재회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이청조)

제3회 이별과 재회

‘권세는 손 델 만큼 뜨겁지만 마음은 서늘하네(炙手可熱心可寒)’라는 이청조의 말이 적중했다. 이청조의 시아버지 조정지(趙挺之)의 벼슬길에 변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법당(舊法黨)을 제거한 지 1년이 지나자 채경(蔡京)과 조정지 동맹이 결렬되어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된 정적(政敵)이 되었다. 숭령(崇寧) 4년(1105년) 봄, 조정지는 질환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반 년 후 채경이 수상(首相)을 그만두면서 조정지는 다시 벼슬길에 올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겸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임명되었다. 조정지는 구법당과 화해하고 금지령을 해제했으며 이청조를 다시 조씨 가문으로 데려오게 했다.

풍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채경이 복직했으며 조정지는 이번에 정말로 질환에 걸려 벼슬을 내려놓았고 금방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채경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조정지의 가문을 멸하려고 조정지의 세 아들과 가족을 모두 하옥시켰다. 조씨 가문의 세 며느리가 각자 친정의 인맥을 통해 조씨 가문의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조정지의 무고한 세 아들은 끝내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벼슬을 잃고 서민으로 전락되었으며 원적(原籍)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경성의 번화함을 이별하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동경을 멀리 떠났다.

청주(靑州) 본가에 돌아온 조명성과 이청조 내외는 과거 도연명(陶淵明)이 시골에 은둔하던 그 때를 연상하며 본가의 대청(大廳)을 ‘귀래당(歸來堂)’이라 불렀다. 다년간 벼슬을 한 조정지는 고향에 적지 않은 자산을 마련해 조명성과 이청조는 청주에서 그들의 생애 중 가장 아름다운 10년을 보냈다. 조명성의 거작인 <금석록(金石錄)>이 바로 청주에서 지어졌으며 이청조도 이 때 <사론(詞論)>을 비롯한 저서들을 펴냈다. 이청조는 사와 시는 서로 다르다는‘사별시일가(詞別是一家)’의 견해를 제출하고 사(詞)와 시(詩)의 다른 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사는 바로 가사(歌詞)라고 강조하면서 그러기 때문에 사는 반드시 음률에 어울리고 함축적이며 우아하고 완곡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에 사람들은 이청조의 작품이 완약파(婉約派) 의 대표라고 인정하며 그녀에게 완약파의 비조 지위를 부여했다.

정적(政敵)이 많은 채경은 동경을 멀리 떠난 조씨네 형제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그로 인해 조명성은 래주(萊州)에서 벼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조씨 가문으로 말하면 세 형제가 관직을 회복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으나 이청조는 또 한 번 남편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시어머니 곽(郭)씨가 ‘며느리는 남아서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는 구실로 이청조가 조명성을 따라 부임지로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결혼 20년이 되도록 이청조가 조씨네 가문에 후손 한 명 보태지 못했기 때문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곽씨는 뜻이 같고 서로 존경하며 금슬이 좋은 셋째 아들 내외를 보고 차마 자손을 보기 위해 첩을 들이라고 아들에게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이 기회에 아들내외를 떨어져 있게 하면 아들이 그 참에 타지에서 첩을 들여 아들을 보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청조는 또 한 번 직녀가 되어 그리움의 고통을 맛보았다.

남편이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첩을 들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청조는 커다란 돌이 누르는 듯 가슴이 답답하고 예리한 바늘이 찌르는 듯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이번 이별에서 남편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에는 슬픔이 더해졌다. <봉황대상억취소(鳳凰臺上憶吹簫)>가 바로 이청조의 그런 부득이함과 슬픔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시는 여전히 그토록 정교하고 그토록 신기하며 또 그토록 깊은 정과 절묘한 운치를 자랑한다.

사자 향로에 향불 식고(香冷金猊)

이불은 뒤집어져 붉은 물결인 듯(被紅娘)

일어나 머리 빗는 것도 내키지 않네(起來梳頭)

화장대에 먼지 쌓이고(任寶塵滿)

해가 발 고리 위에 걸려도(日上簾鉤)

이별의 아픔이 떠오를까 두려워(生怕離懷別苦)

몇 마디 말을 하려다 마네(多少事欲說還休)

내가 점점 야위어 가는 것은(新來瘦)

술을 마시느라 생긴 병 때문도(非干病酒)

슬픈 가을의 탓도 아니지(不是悲秋)

그래 그만 둬야지(休休)!

갈 사람은 가는 거지(這回去也)

천만 번 이별곡을 불러도(千萬遍<陽關>)

가는 사람 붙잡지 못하니(也則難留)

그리운 사람 멀리 떠나고(念武陵人遠)

나만 홀로 빈 집에 남아(煙鎖秦樓)

문 앞을 흐르는 물만(惟有樓前流水)

종일 먼 곳만 바라보는 나를 그리네(應念我終日凝眸)

멀리 바라보는 곳에(凝眸處)

오늘부터 하나 더하네(從今又添)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슬픔을(一段新愁).

하지만 이 새로운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이고 그리움의 슬픔이며 이별의 슬픔이었다.

후에 조명성이 첩을 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데다 장남을 따라 광주(廣州)로 가게 된 곽씨는 더는 조명성과 이청조를 헤어져 있게 할 구실이 없어지자 이청조가 래주로 조명성을 찾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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