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2 09:23:16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악비 편: 제2회 북벌을 시작하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악비)

제2회 북벌을 시작하다 

송(宋)나라 황제 조구(趙構)를 남쪽의 바다 끝까지 뒤쫓아가려던 금(金) 나라의 속셈은 중원의 많은 지사(志士)들의 노력으로 궁극적으로 수포로 돌아가 금의 군사는 남침의 발길을 멈추었다. 하지만 송나라 황제는 강남의 좁은 땅에 안주해 금에 대항하고 북벌을 통해 잃어버린 땅을 찾으려는 생각도 없이 간신인 진회(秦檜)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국치(國恥)를 씻고 중원(中原)를 다시 찾으려는 악비(岳飛)를 중심으로 하는 주전파(主戰派)의 애국행동은 여전히 계속됐다.

악비는 2백 여 회에 걸친 전투에서 연전연승의 승전고를 울렸고 악가군(岳家軍)은 싸울수록 용맹하여 그 규모가 10만에 달했다. 청수정(淸水亭) 대전 후 악비는 건강성(建康城) 남쪽으로 30리(里, 1리=0.5km) 거리의 우두산(牛頭山)에 주둔했다. 그날 밤, 달빛도 없고 별빛도 어두웠다. 악비는 백 명의 군사를 적군의 군영으로 파견했다. 검은 옷을 입은 악가군의 군사는 그림자처럼 적군의 군영에 숨어 들어 고의로 사람을 구타하고 술에 취한 척하며 혼잡을 조성했다. 금의 군사가 서로 싸우며 군영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악비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금의 군사는 정안진(靖安鎭)으로 퇴각했다가 거기서 다시 강을 건너 북쪽의 선화진(宣化鎭)으로 가려고 했다. 패전으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적군이 철수하려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내린 듯 악가군이 눈앞에 나타나 금의 군사는 손쓸 사이도 없이 참패를 당했다. 이 전투에서 악가군은 적군 1천 여명의 목을 베고 3백을 생포했으며 금의 군사의 강남의 마지막 거점을 공격하고 건강성을 되찾았다.

눈병이 심해서 의흥(宜興)으로 돌아가 휴양하던 악비는 외삼촌이 ‘굶어 죽을지언정 약탈하지 않고 얼어 죽을지언정 집을 허물지 않는다’는 악가군의 군기를 어기고 백성에게 해를 끼친 일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돌아가 외삼촌을 응징함으로써 군기를 바로 세우려고 작심했다. 그런데 악비에게 잡히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안 악비의 외삼촌이 도주하는 길에 자신의 뒤를 쫓는 악비에게 화살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악비가 민첩하게 몸을 날려 피하자 화살은 악비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악비는 곧 외삼촌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모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으나 그 모친의 작은 동생에 대해서도 전혀 사정을 보지 않은 악비였기에 악가군은 천하무적의 철의 군대가 되었던 것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악비는 소흥(紹興) 3년(1133년) 이성(李成)과 장용(張用)이 거느린 금의 군사를 소멸한 후 두 번째로 송고종(宋高宗)을 알현했다. 고종제는 어필로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네 글자를 군기에 써서 전투에서 영광을 보여주고 사기를 진작하는데 쓰라고 악비에게 하사했다. 악가군의 군호(軍號)도 ‘신무부군(神武副軍)’에서 ‘신무후군(神武後軍)’으로 바뀌었다. 이로부터 ‘정충악비’가 씌어진 군기는 악가군의 진중에 높이 걸려 악가군이 이르는 곳마다 적군은 도처로 흩어져 도망쳤고 악가군은 그 명성을 온 세상에 떨쳤다.

소흥 4년(1134년), 악비는 첫 번째 북벌(北伐)에서 양양부(襄陽府)와 당주(唐州), 신양군(信陽郡)을 성공적으로 수복했고 두 번째 북벌에서는 도진 눈병과 모친 요씨(姚氏)의 병사로 인해 시일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주(商州)를 수복하고 순주(順州)의 의양현(依陽縣)과 영녕현(永寧縣), 복창현(福昌縣)을 공격하는 무공을 세웠다. 첩보를 받은 재상 이강(李綱)은 답신에서 “이는 10년간 종래로 없었던 승리의 소식입니다. 대단히 기쁩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후원도, 군량도 없이 적진 깊숙이 들어간 악비는 마음이 급한데다 과로로 눈병이 심해져 빛을 볼 수 없어 낮이면 막사의 창문을 빈틈 없이 막아야 할 정도에 이르렀다. 악가군은 악주(鄂州)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력이 떨어져 눈앞이 캄캄해진 악비는 마음도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송고종이 간신 진회(秦檜)를 등용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강을 사이 두고 송과 금이 각자 강북과 강남을 다스릴 것을 주장하는 진회는 “강남 사람은 강남에 속하고 강북 사람은 강북에 속해야 한다”고 허튼소리를 치면서 강남으로 도주한 서북인과 하북인들은 모두 원적지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군사통솔가인 악비는 진회의 주장에 너무도 화가 났다.

“진회, 네 놈은 참으로 극악무도하구나! 과거시험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네가 조정의 군사력이 서북과 하북에서 왔다는 것을 모를 리 있겠느냐? 용감하고 힘이 센 서북인과 하북인들의 전투력이 가장 강한데 네가 강북의 사람은 모두 강북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가장 우수한 병력을 모두 적에게 돌려주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이는 군력의 뿌리를 뽑고 스스로 우리 군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니 너는 간신이라는 이름에 전혀 억울하지 않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 밤인지 낮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악비는 침상에서 뒤척이며 빼앗긴 산천과 잡혀간 두 황제, 나라를 잃은 백성을 생각하고 잃어버린 땅을 찾으려 하나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황제가 진회의 꾀임에 들어 적과 손을 잡으려 하니 의분으로 가슴이 터질 듯 했다. 창 밖에서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니 악비의 가슴에도 피눈물이 흘렀다. 악비는 비분을 참지 못해 수많은 중국인을 감동시킨 천고의 절창 <만강홍·노발충관(滿江紅·怒髮衝冠)>을 읊었다.

강개하여 노한 머리털이 치솟아 관을 찌르는데(怒髮衝冠)

난간에 기대서니 세차게 내리던 비 그치는구나(欄處瀟瀟雨歇)

눈을 들어(擡望眼)

하늘을 우러러 길게 울부짖으니(仰天長嘯)

사나이 장렬한 마음 격하게 솟구치누나(壯懷激烈)

나이 삼십에 세운 공명 보잘 것 없으나(三十功名塵與土)

팔천 리 길을 구름과 달빛 아래 전전했노라(八千里路雲和月).

젊음을 헛되이 보내고(莫等閑)

백발이 되고 나서(白了少年頭)

부질없이 슬퍼하지 말아야 하리(空悲切).

정강의 치욕을(靖康恥)

아직 씻지 못했으니(猶未雪)

이 신하의 한은(臣子恨)

어느 때나 없어질꼬(何時滅)?

병거를 몰고 달려가서(駕長車)

하란산의 관문을 깨부수리라(踏破賀蘭山缺)

장쾌히 오랑캐의 살로 주린 배를 채우고(壯志飢餐胡虜肉)

담소하면서 흉노의 피로 마른 목을 축이리라(笑談渴飮匈奴血)

앞장 서 싸워 옛 산하를 모두 되찾은 후에(待從頭收拾舊山河)

천자를 배알하리로다(朝天闕).

악비의 눈병이 심각한 것을 안 조정은 특별히 어의(御醫) 황보지상(皇甫知常)을 악주(鄂州)로 급파해 악비의 눈병을 치료하게 했다. 악비는 눈병이 좀 호전되자 세 번째로 되는 소규모 북벌을 시작해 용감한 장군들인 왕귀(王貴)와 우고(牛皋)에 힘입어 북벌의 승리를 거두고 많은 군마와 군량을 얻었다. 세 번째 북벌에서 왕귀와 우고는 승진을 거듭했지만 5백 명의 포로를 살해한 통제(統制) 구성(寇成)은 치하는 고사하고 악비의 탄핵을 받았다. 이로부터 포로 우대로 적군을 와해하는 악비의 인간성 있는 전략을 엿볼 수 있다.

(다음 회에 계속)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