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4 09:47:27 출처:cri
편집:李仙玉

[조식 편-4] 비운의 삶을 마감하다

(사진설명: 그림 <낙신부도>의 일각)

제4회 비운의 삶을 마감하다

황초(黃初) 4년(223년), 황제 조비는 <감견부(感甄賦)>로 인해 안절부절못하고 밤낮으로 불안에 빠져 있었다. “아득한 강물에 빼 띄우고 돌아갈 길 잊으나(浮長川而忘反) 생각은 연이어 그리움만 더하고(思綿綿而增慕) 밤은 깊었는데 잠들지 못하고(夜耿耿而不寐) 엉킨 서리에 젖어 새벽에 이르노라(沾繁霜而至曙)…” <감견부>를 읽으며 조비는 견씨에 대한 조식의 깊은 사랑을 증오해 더는 그를 견성왕으로 둘 수가 없어서 옹구왕(雍丘王)으로 고쳐 책봉했다. 그러면서 조비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너 재주가 있으면 이번에는 <감옹부(感雍賦)>를 써보지 그래!”

그 해 5월 조식과 다른 형제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경성에 이르렀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군권을 장악한 셋째 형, 즉 임성왕(任城王) 조창(曺彰)이 연회석상에서 급사했다.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하며 건장하고 용맹하던 형이 갑자기 쓰러져 숨이 끊어지고 다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만 있던 조식과 동생들은 모두 너무 슬퍼 비오 듯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또 생명의 짧음과 삶의 무상함, 혈육간의 애틋한 정을 느꼈다.

7월, 여러 제후왕들은 모두 각자의 임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때 조식은 백마왕(白馬王) 조표(曺彪)와 동행하고자 제출했으나 감국사자(監國使者) 관균(灌均)은 이런 작은 요구까지 매정하게 거절했다. 조식은 형을 잃은 슬픔과 자신의 어려운 처지, 억누를 길 없는 분노에 붓을 휘둘러 그 유명한 <어권성작(於圈城作)>을 썼다.

후에 <어권성작>은 <증백마왕표(增白馬王彪)>라는 이름으로 중국 최초의 총 한문시집이자 당(唐)나라 때 과거시험의 교과서 역할을 한 <문선(文選)>에 입선되었다. 일곱 개 장과 서문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작자는 침통하고 복잡한 자신의 심경을 서서히 점진적으로 펼쳐냈다. 그 중 경물묘사와 감정토로가 어우러진 제4장을 보고 가자.

머뭇거린다 한들 어찌 머물 수 있으며(踟躕亦何留)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은 끝이 없도다(相思無終極)

불어오는 가을 바람 서늘하고(秋風發微凉)

매미는 내 곁에서 울어댄다(寒鳴我側)

들판은 어찌 이리도 소슬한지(原野何蕭條)

밝은 해는 갑자기 서산으로 기우는구나(白日忽西匿)

새도 둥지 찾아 높은 나무로 향하며(歸鳥赴喬林)

푸드득푸드득 날개를 치는구나(翩翩羽翼)

홀로 난 짐승도 무리 찾아 달리고(孤禽走索群)

입에 들은 풀도 황급하여 먹지를 못하는 구나(銜草不遑食)

이러한 일 들에 슬픔이 차올라(感物傷我懷)

마음을 어루만지며 크게 한숨 짓노라(撫心長太息)

조식은 7장으로 된 긴 시를 백마왕 조표에게 준 후 그와 아쉽게 헤어졌다. 그러다가 조식은 자신이 깜박하고 황제에게 소(疏)를 올리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몇몇 수종을 데리고 다시 돌아섰다.

조식은 자신의 큰 누이 청하(淸河) 장공주(長公主)를 만나 말했다.

“제가 쓴 소를 폐하께 대신 올려주세요! 폐하께서 만약 저를 만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직접 만나 뵙고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장공주가 물었다.

“너 도대체 폐하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냐?”

“폐하께서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시행하시고 조정은 명문가의 세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권력이 이런 명문가의 수중에 장악될 것이며 이는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자신의 혈육을 범인 대하 듯 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형제들을 왕으로 책봉했지만 일말의 자유도 주지 않아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임지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혈육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성씨의 명문가에만 의지하니 이는 무슨 이치란 말입니까?”

장공주도 조식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황제가 조식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조식이 말해봤자 헛수고라는 것을 아는 장공주는 조식의 말에는 응대 하지 않고 그저 소를 황제에게 전해주겠다고만 말했다.

하지만 장공주가 조식의 소를 올리기도 전에 관균이 벌써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조식의 알현을 거절하고 임지로 돌아갈 것을 조식에게 명했다. 관균이 자신을 더는 물러설 여지가 없는 궁지로 몰아 넣자 조식은 미친 듯이 달려 나가 눈 깜짝 사이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줄 안 태후가 황제를 찾아가 욕설을 퍼부었다.

“이 매정한 놈아, 네가 형이기는 한 거냐? 내 식을 살려내! 식을 찾아 오지 않으면 네 앞에서 죽어 버리겠다!”

그 바람에 조비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조식을 찾게 했다. 조비도 조식이 자결했을 까봐 두려웠다. 조비는 조식이 죽을 만큼 미웠지만 일단 조식이 죽으면 자신이 동생을 살해한 악명을 뒤집어 쓰고 그 악명이 자신을 죽음에로 몰아 넣을 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조식이 돌아왔다. 난발의 조식은 도끼를 메고 맨발 바람으로 단폐(丹陛) 아래 꿇어 앉아 사죄했다. 황제 조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태후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조비는 황제의 위엄을 살려 퍼런 얼굴로 조식과 말도 섞지 않았고 조식이 신발을 신고 관을 쓰게 하지 않았다. 조식은 바닥에 엎드려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었다. 울적해진 태후가 조비를 쏘아보자 조비는 어쩔 수 없어 어명을 내렸다.

“옹구왕에게 왕의 의상을 올려라!”

그리고 조비는 조식을 동아왕(東阿王)으로 고쳐 책봉했다.

조식이 동아에 이르러 어산(魚山)에 오르니 주변의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 없고 동쪽으로는 망망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죄인처럼 여기 저기 쫓겨 다니며 정해진 거처도 없고 할 일도 없는 자신을 생각하자 조식은 죽기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탄식했다.

“이 곳이 심히 좋구나. 죽어서 이 곳에 묻혀야 하겠다!”

그로부터 조식은 매일 왕부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거문고를 뜯고 시를 읊으며 후세 사람들에 의해 천재의 작품이라 평가되는 적지 않은 서예작품과 그림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 회화의 윤리적 교화(敎化) 역할과 회화예술의 특징을 언급한 <화찬서(畵贊序)>를 쓰기도 했다. <화찬서>는 중국 최초로 시가(詩歌)의 윤리적 교화 역할을 천명한 <모시서(毛詩序)>와 함께 거론되며 조비의 <전론·논문(典論·論文)>과도 비견된다. 중국의 회화역사상 최초의 회화 평론인 <화찬서>는 처음으로 회화예술의 특징을 논하기도 했다. <화찬서>와 <전론·논문>은 이론적으로 모두 예술 자각(自覺)의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황초 7년(226년), 위문제 조비가 붕어하고 견씨의 아들인 태자 조예(曺叡)가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위명제(魏明帝)이다. 조식은 사상성과 예술성이 모두 뛰어난 글을 써서 황제였던 둘째 형을 추모했다. 당시 조식의 문학적 명성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은 조식을 동정했고 따라서 형이 죽으면 동생이 그 뒤를 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런 열광적인 성원이 다시 한 번 조식에게 피해로 돌아왔다. 그로 인해 위명제가 조식을 가장 경계해야 할 적수로 여기게 된 것이다.

당시 35살의 한창 나이인 조식은 여전히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조식은 위명제에게 소를 올려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위명제는 조식을 칭찬만 하고 중용하지 않았으며 후에는 조식을 진왕(陳王)으로 고쳐 책봉하고 식읍(食邑) 3천 5백 가구를 내렸다. 조식은 여러 번 황제와 독대해서 나랏일을 논의하고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를 바랐지만 위명제는 번마다 응대하지 않았고 조식의 소원은 번마다 유야무야 끝났다.

자신이 여전히 중용되지 못하자 음률에 정통한 조식은 매일 왕부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거문고 악보를 연구했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서 낙담하고 실의에 빠진 조식의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아아, 이 굴러다니는 쑥이여(嗟此轉蓬)

세상살이 어찌 이리도 외로운가(居世何獨然)

뿌리에서 멀리 떨어져 떠나가니(長去本根逝)

아침저녁으로 편히 쉴 날 없구나(宿夜無休閑)

동으로 서로 얼마나 많은 굽은 길 걷고(東西經七陌)

남으로 북으로 얼마나 많은 밭을 넘었는가(南北越九阡)

홀연 불어오는 회오리 바람에(卒遇回風起)

푸른 하늘 구름 사이로 날려 올라가니(吹我入雲間)

하늘 끝에 이른 줄 알았는데(自謂終天路)

웬걸 또 다시 끝없는 심연에 빠졌구나(忽然下泉)

다시 한 번 폭풍에 휘감겨(驚飇接我出)

애초의 그 벌판에 던져지니(故歸彼中田)

남으로 가려다가 또 북으로 향하고(當南而更北)

동으로 가려는데 또 서쪽으로 밀려가는구나(謂東而反西)

이리 저리 흩날리며 갈 곳을 몰라(宕宕當何依)

홀연 사라졌다가 또 다시 나타나는구나(忽亡而復存)

이 세상의 호수와 소택지를 모두 날아 넘고(飄飄周八澤)

이 땅의 모든 산에도 다 오르며(連翩歷五山)

떠돌이 삶의 아픔을 다 겪었으니(流轉無恒處)

그 누가 이 쓰디쓴 아픔을 알소냐(誰知吾苦艱)

숲 속의 한 포기 풀이 되어(願爲中林草)

가을날 들불을 따라 연기로 사라지고 싶구나(秋隨野火燔)

들불이 아픔을 안겨 준다 해도(糜灭岂不痛)

기꺼이 뿌리와 생사를 함께 하리라(願與根連)

천재적인 시인은 인생의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그는 원래 아무런 구속도 없는 자유자재의 시선(詩仙)이었고 그의 성격도 벼슬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비 부자가 자신을 지나치게 경계한 원인으로 그는 이쪽 저쪽 굴러 다니는 쑥과 같은 아픔과 부평초 같은 슬픔을 뼛속 깊이 느꼈다. 재고팔두(才高八斗)의 시인인 그는 이로부터 슬픈 시와 음악 속에서 여생을 보내고 41세를 일기로 끊어진 거문고 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의 눈부신 문장을 극찬하는 동시에 실의에 빠진 그의 인생에 분노와 아픔을 느끼기도 한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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