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1 08:31:55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송자 편: 제4회 거작을 남기고 눈을 감다

제4회 거작을 남기고 눈을 감다

“광주(廣州)여 내가 또 왔노라. 참으로 인생은 천지간을 떠도는 나그네신세로구나. 여러 곳을 총망하게 오가며 임직하는 사이 세월은 흘러 나도 벌써 늙었구나.”

송자(宋慈)는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네 번이나 제점형옥관(提點刑獄官)을 지내며 광동(廣東)과 강서(江西), 상주(常州), 호남(湖南) 등 많은 지역에서 임관하다가 오늘 다시 광주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로 오게 되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마다 감투는 점점 더 커졌지만 나이도 점점 더 많아져 송자는 노년에 접어 들었다. 그리하여 송자는 세월의 무상함과 인생의 모년(暮年)을 한탄한 것이었다.

송자는 9년 전에 광주에서 광동 제점형옥관으로 있을 때 일을 떠올렸다.

“그 때 관아에 미제사건이 산처럼 쌓여 나는 부임하자 마자 침식도 잊고 밤에 낮을 이어 사건을 해결했지. 8개월의 조사를 거쳐 2백 여 건의 미제사건을 해결해 백 여명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흉악한 살인범 수십 명이 벌을 받게 했다. 또 뇌물을 받고 법을 어기며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 옥리(獄吏)들도 벌했다. 억울함을 풀어주고 흉악함을 제거하여 민심을 얻었으며 백성들은 나를 송청천(宋靑天)이라 불렀지.”

지금 송자의 나이 62살이었다. 벼슬길에 올라 이날까지 송자는 단 하루도 관아에 나가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단 하루도 자신의 저서 편찬을 멈춘 날이 없었다. 그 저서가 바로 세계 최초의 법의학 저서로 인정되는 <세원집록(洗寃集彔)>이다.

송자는 이 저서편찬을 위해 십여 년 전부터 자료를 수집했다. 그는 저서에 검시와 연관된 선현들의 이야기와 경험을 기록하고 자신이 다년간 쌓은 실천경험과 소감도 모두 써넣었다. 송자는 광주에 온 후에도 매일 저녁이면 글을 썼다. 그러는 사이 송자의 수염이 어느새 하얗게 세어버렸다.

어느 날, 밤중이 될 때까지 글을 쓰던 송자는 창 밖에서 우수수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슬픈 감정이 송자의 가슴 속으로 솟아 올랐다. 그는 갑자기 기억 깊은 곳에 고이 잠들어 있던 한 벗을 떠올렸다. 그의 사색은 머나먼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31살 되던 해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절강(浙江)의 부임지로 가기 전에 광주에서 절도추관(節度推官)을 맡고 계시던 부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당시의 건양지현(建陽知縣) 유잠부(劉潛夫)을 알게 되었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유명한 시를 많이 쓴 잠부는 나와 처음부터 의기투합했다. 그 때 우리는 얼마나 젊었던가? 우리는 항상 시국을 안타까워하고 슬픈 시를 쓰면서 안일함만 추구하는 조정, 간신이 판을 치는 조정에 분노했다.

그런데 잠부가 시로 조정을 비방했다는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파면되어 십 년 세월을 힘들게 보낼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우리도 그로부터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 다행히 그는 최근에 다시 폐하의 신임을 얻어 공부상서(工部尙書)가 되었다. 그와 다시 만나 우의를 다지며 이 저서를 그에게 부탁한다면 내 생에 유감이 없을 텐데

수탉이 홰를 치는 소리에 송자는 추억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아픈 허리를 두드리고 기침을 하면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송자와 시인 유잠부는 서로를 아끼는 지기였고 평생 서로를 그리워했다. 노후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유잠부는 송자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그를 위해 묘지명을 썼다. 후세 사람들도 유잠부가 쓴 송자의 묘지명으로 인해 이 위대한 법의학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송사(宋史)>는 송자의 삶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송자가 노후에 쓴 거작 <세원집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면서 중국의 문명사에서 소중한 부가 되고 그로 인해 송자도 법의학의 아버지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

순우(淳祐) 6년(1246년), 화창한 날씨의 봄이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난 송자는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아, 오늘 학궁(學宮) 개강식이 있는데 많은 학도들을 위해서라도 의식진행을 맡은 내가 못 가면 안 되지.”

송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죽 한 그릇을 먹고 가마를 타고 학궁으로 갔다. 그는 억지로 몸을 지탱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개강식을 사회했다. 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송자는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그 길로 침상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송자는 다시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 해 그의 나이 64살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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