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5 09:17:22 출처:cri
편집:李仙玉

[제갈량 편-1] 천하 삼분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제갈량)

최고의 軍師 제갈량

<삼국연의(三國演義)>에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두 사람 중 한 명을 얻으면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 수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복룡이 바로 제갈량(諸葛亮)이고 이 홍보를 통해 제갈량은 순조롭게 유비(劉備)를 만난다.

제갈량이 있었기에 유비는 영웅들이 천하를 다투는 한(漢)나라 후반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위(魏)나라, 오(吳)나라와 삼족정립(三足鼎立)의 구도를 형성했다. 제갈량은 산을 내릴 때 벌써 세상을 셋으로 나누는 이 구상을 제출했다.

고대 중국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사가, 발명가인 제갈량은 한(漢) 나라의 정권 유지에 평생을 바친,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한 몸 다 바친, 충성의 본보기, 지혜의 화신이다.

최고의 군사(軍師) 제갈량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천하 삼분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의로 제갈량을 얻은 유비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해진 거처도 없이 여기 저기 숨어 다니던 유비는 제갈량의 전략에 의해 유표(劉表)를 찾아 형주(荊州)로 가서 자신의 3천 군사를 거느리고 번성(樊城)에 자리를 잡은 후 성공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병중에 있던 유표는 자신의 차남인 유종(劉琮)을 유난히 아껴 형주목(荊州牧)의 지위를 유종에게 물려주려 했다. 이에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가 자신의 앞날을 걱정해 수차 제갈량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 때마다 제갈량은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관계가 친밀한 사람을 이간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집안 일에 참견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기는 자신의 가든을 유람하라고 제갈량을 초청했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제갈량을 높은 누각에 오르게 한 후 술을 마시는 동안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치우게 했다. 유기는 높은 누각에 자신과 제갈량 두 사람만 남자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위로 하늘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땅에 닿지 못합니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저의 귀에만 들어올 것입니다. 이러면 말씀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제갈량은 더는 묵언할 수 없어서 대답했다.

“진헌공(晉獻公)이 장남 대신 어린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 했는데 진 나라에 남은 세자 신생(申生)은 비참하게 살해당하고 외국으로 망명한 총명한 중이(重耳)는 살았다고 사서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

제갈량의 말에 유기는 몰래 형주를 떠날 계획을 세웠다. 그 때 마침 강하(江夏) 태수(太守) 황조(黃祖)가 병사했다. 그 참에 유기는 자신이 강하태수로 가겠다고 유표에게 말했다. 유표는 유기가 강하로 가면 그의 동생인 유종이 형주목을 이어 받는데 이롭다고 생각해서 유기를 강하태수로 파견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제갈량은 몰래 웃었다. 이렇게 되면 유비에게 이용 가능한 군사세력이 한 갈래 더 있게 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표가 세상을 뜬 후 형주목을 이어 받은 유종은 조조(曹操)의 공격 목표가 형주라는 소식을 듣고 간담이 서늘해져서 모친 채(蔡)씨와 외삼촌 채모(蔡瑁)의 제언에 따라 형주를 선물로 조조에게 넘기고 항복하기로 했다.

이 놀라운 소식을 들은 번성의 유비는 백성들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다가 장판파(長坂坡)에서 조조의 대군과 조우했다. 다행히 용맹한 조운(趙雲)의 호위로 유비는 조조 군대의 추격에서 벗어나 강하로 유기를 찾아갔다.

유비와 유기의 군사를 다 합쳐도 만 명이 되지 않는 병력으로 조조의 수십만 대군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안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했다.

“상황이 급박하니 제가 강동(江東)으로 가서 손권(孫權)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삼강구(三江口)에서 수군(水軍)을 훈련하던 주유(周瑜)는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해 함께 조조의 남진(南進) 대군에 맞서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띄우며 노숙(魯肅)에게 물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어떤 사람이오? 능력이 대단한데. 장소(張昭)처럼 항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어려웠을 텐데 말이오.”

노숙이 대답했다.

“제갈공명은 랑야(琅邪) 양도(陽都) 출신인데 원래는 남양(南陽)의 융중(隆中)에 은둔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로 장군을 닮았습니다. 몸집도 우람지고 기개가 비범하며 외모도 출중하고 또 음률에도 정통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양보음(梁甫吟)>을 읊으면서 자신을 관중(管仲)과 낙의(樂毅)에 비유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망령이 들었다고 그를 비웃었고 몇 사람만 그에게 감복했을 따름입니다. 한 번은 몇 몇 지기들이 모여 환담을 하는데 그가 ‘자네들이 후에 벼슬을 하게 된다면 자사(刺史)나 군수(郡守)까지 할 수 있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지기들이 ‘그럼 자네는?’라고 물으니 그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는데 서원직(徐元直)이 ‘스스로를 관중과 낙의에 비유하는 저 사람은 당연히 벼슬이 승상(丞相)에 이를 것이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유현덕(劉賢德)이 삼고초려의 예의로 그를 군사로 모셨으니 이제 유비가 뜻을 이루면 그를 승상으로 모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갈공명은 올해 27살입니다.”

주유가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멋지고 호방하며 높은 벼슬을 할 큰 뜻을 가진 제갈공명이 추녀를 아내로 삼았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찌 된 일이오?”

노숙이 놀라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소. 말해보시오. 어떻게 된 일이오?”

손책과 주유가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여인인 대교(大喬)와 소교(小 喬)를 각자의 아내로 맞이한 것을 아는 노숙은 주유가 추녀와 결혼한 제갈공명을 하찮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제갈공명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유능한 남자를 남편으로 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하라는 속담이 있는데 외모만 보고 아내를 맞이하는 남자보다 능력을 보고 남편을 찾는 여자의 안목이 더 높다고 말입니다. 제갈공명은 남자는 식견이 짧아서 다수가 외모만 보고 얼굴만 예쁜 바보를 아내로 맞이하고는 뽐내는데 그런 미녀가 어떻게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겠는가? 또 그런 미녀가 현명한 아내가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제갈공명과 친분이 있는 면남(沔南)의 명사(名士) 황승언(黃承彦)이 ‘자네가 아내로 삼을 여인을 고르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에게 못 생긴 딸이 있네. 머리카락은 노랗고 피부는 검으나 학문이 있고 이치를 아네. 내가 보기에 자네와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떤가?’라고 물었습니다. 황승언의 재능을 잘 아는 제갈공명이 즉시 그의 청혼을 받아 들여 황승언은 자신의 딸을 제갈공명에게 시집 보냈습니다.”

“제갈공명이 식견은 높으나 좀 지나치군. 나는 외모도 아름답고 이치도 아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니 내가 그보다 한 수 위가 아니겠는가?”

노숙은 그제서야 주유와 제갈량은 모두 용모가 영준하고 풍채가 좋으며 안목이 독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를 아끼고 존중한 주유와 제갈량은 진심으로 협력하여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이용하고 화공(火攻)법으로 끝내 소수의 군사로 수십만에 달하는 조조의 대군을 격파해 천하 삼분의 구도를 초보적으로 형성했다. 따라서 적벽(赤壁) 대전도 고대 중국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긴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사서에 기록되었으며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적벽대전을 거친 후에야 유비는 형주와 남군(南郡)이라는 본거지를 차지했고 제갈량은 자신의 전략적 계획의 실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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