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6 09:29:55 출처:cri
편집:李仙玉

[제갈량 편-2] 漢 왕실의 회복

(사진설명: 제갈량 사당 무후전의 일각)

제2회 한(漢) 왕실의 회복

장송(張松)은 주인을 팔아 익주(益州)의 지도를 유비에게 헌납하고 유장(劉璋)은 유비의 힘을 빌어 장로(張魯)를 격파하려 했다. 그리고 제갈량의 전략적 기획은 바로 익주를 취해 천하를 삼분하는 것이었다. 장로를 격파한 유비는 성도(成都)를 목표로 하고 삼았다. 제갈량은 유비의 뜻에 따라 관우(關羽)를 형주에 남겨두고 자신은 장비(張飛)와 조운(趙雲)을 거느리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슭의 여러 현들을 점령한 후 유비와 합류하여 성도 포위작전을 시작했다. 우둔하고 나약한 유장이 공격에 맞서지 못해 유비는 손쉽게 성도를 손에 넣었다.

그로부터 10년 간 유비는 군사이자 장군인 제갈량더러 성도를 지키면서 군량을 준비하고 군마를 모집하게 했다. 제갈량이 성도를 ‘밤에 문을 걸지 않고 버려진 물건을 줍지 않’는 안정된 사회로 관리하고 군량과 군마를 대량으로 징집하여 유비의 군사는 나날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 때 관우가 손권의 급습으로 죽고 형주를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 조조가 죽고 조비(曺丕)가 황제로 즉위했으며 동한(東漢)이 멸망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러자 제갈량은 즉시 황제로 즉위하라고 유비에게 제안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漢) 나라 정권을 찬탈한 조비는 대역무도한 역신입니다. 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으면 안 되는데 오늘날 천하에는 군주가 없어 민심이 흉흉합니다. 한(漢) 왕실의 자손인 대왕은 당연히 한(漢) 나라를 이어 받으셔야 합니다. 지금은 황제로 즉위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입니다. 하물며 다년간 대왕을 추종하며 온갖 노고를 겪은 사대부들도 입신 출세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도 출세해야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조상과 가족에 미안하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사대부들이 희망을 보지 못하고 관직을 가지지 못하면 신심을 잃고 각자 살길을 찾아 더 좋은 주인을 찾아 갈 수 있기에 더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대왕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유비는 길일을 택해 성도에 도읍을 정하고 한(漢) 나라 황제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사서에 기록된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이다. 황제가 된 유비는 제갈량을 승상으로 봉했고 승상이 된 제갈량이 다른 관리들을 정했다.

유비는 비록 황제로 즉위했지만 관우가 맥성(麥城)에서 전사하고 손권이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선물한 일을 생각하면 슬픔을 참을 수 없었다. 유비가 랑중(阆中)에 주둔한 장비와 합류해서 함께 오 나라를 토벌해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 준비하는데 장비가 역모를 꾸민 부하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마음이 어지러워진 유비는 결과는 생각지도 않고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오 나라 토벌을 떠나려 했다.

이 시각, 제갈량의 마음은 유비보다 더 무거웠다. 그는 ‘만인 대적’의 장군인 관우를 잃은 것보다 한(漢) 나라에 더 심각한 것은 형주라는 이 중요한 전략적 거점을 잃은 것임을 알았다. 그로 인해 향후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중원(中原)을 취하려던 전략적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오 나라와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 한 나라의 생사존망에 직결되는 첫째 가는 대사였는데 오만한 관우가 그 동맹을 무산시켰고 지금 유비가 또 이 중요한 기반을 완전히 박살내려 준비하고 있었다. 한 나라와 오 나라가 한 하늘아래서 살 수 없는 대립 관계가 되면 강대한 위 나라가 그 틈을 타서 한 나라와 오 나라를 각각 격파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유비는 감정적으로 오 나라와 결전을 벌일 생각에만 골몰해 있었다. 유비는 황제였고 관우는 황제의 의형제였지만 제갈량은 아니었다. 그러니 제갈량은 군신간의 의리 때문에 오 나라 토벌작전을 시작하지 말라고 유비에게 간언도 할 수 없었다. 신하의 본분을 지키는 제갈량은 직언한다 해도 마지노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갈량은 한 나라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유비의 군사배치를 그림으로 그려 성도로 보내라고 유비를 수행하는 마량(馬良)에게 몰래 지시하는 외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

오 나라의 육손(陸遜)이 출전하지 않고 군영을 고수하는 바람에 유비의 동정(東征)은 반 년 넘어 지속되었다. 날씨는 덥고 출전은 이루어 지지 않아 군사들만 지쳤다. 유비는 하는 수 없어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 강기슭의 숲 속에 군영을 세웠다. 마량이 유비의 7백리 진영을 그림으로 그려 성도로 보내오자 제갈량은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 나라가 화공(火攻)을 들이대면 한 나라 군은 반드시 전멸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제갈량은 급히 강주(江州)의 후군도독(後軍都督) 조운을 시켜 오 나라의 군사가 익주로 향하는 것을 막게 했다.

조운의 군대가 영안(永安)에 이르기도 전에 화공으로 7백리 진영을 불태운 이릉(夷陵) 대전은 한(漢) 나라 군대의 참패로 막을 내렸다. 유비는 소수의 군사를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백제성(白帝城)으로 퇴각했다. 다행히 조운의 군사가 때마침 도착해 백제성 밖에서 오 나라의 군사를 막았다. 하지만 한(漢) 나라 군사는 거의 전멸되었고 마량도 전사했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북에서 위 나라 군사를 막던 황권(黃權)이 오 나라 군사에 의해 퇴각로가 차단되자 군사를 이끌고 위 나라에 항복했다.

한편 오 나라의 장군 육손은 백제성을 공격하지 않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직접 성도를 취하려 했다. 그런데 육손이 강기슭에 이르자 강가에 돌이 어지럽게 쌓여 있고 공중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육손이 자세히 보니 그 돌들은 자연스럽게 산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의도적으로 쌓은 것이었다. 육손이 의심스러워서 현지인을 찾아 물었다.

현지인이 대답했다.

“이 곳은 어복포(魚腹浦)라고 합니다. 과거 제갈량이 이 곳을 경유하면서 병사들을 시켜 석진(石陣)을 치게 했는데 그 용도는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저 바위의 진영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만 들어서 누구든 감히 들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육손이 언덕에 올라 석진을 내려다 보니 마구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수십 개에 달했고 무더기 사이로는 통로가 사면팔방으로 뻗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돌만 쌓여 있고 다른 것은 없었다.

육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갈량이 신들린 척 석진으로 겁을 주는구나.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 그 따위를 믿을 내가 아니다.”

언덕에서 내려온 육손은 말을 타고 석진 속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폈다. 돌을 쌓아 만든 개개의 석진은 높이가 5자, 너비는 10위(圍, 1위: 한 사람이 두 팔을 벌려 두 손을 마주한 둘레)에 달했으며 무더기 사이에는 바둑판처럼 통로가 얼기설기 했다. 석진의 숫자는 64개에 달했고 석진과 석진 사이의 간격은 전부 5자였다.

육손이 석진 사이를 오가면서 아무리 봐도 그냥 돌무더기라 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석진을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리며 검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해난 육손이 석진을 나오려고 했지만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내가 제갈량의 모략에 빠진 것인가?”

육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 노옹이 마주 걸어오며 웃었다.

“장군은 이 석진을 나가려 하시는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육손이 급히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장께서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따라 오시게.”

노옹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금방 육손을 데리고 석진을 빠져 나왔다.

언덕으로 돌아온 육손이 노옹에게 사의를 표하면서 호기심으로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누구신지요? 어떻게 석진을 아십니까?”

노옹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제갈공명의 장인 황승언일세. 이 석진은 과거 내 사위가 만든 ‘팔진도(八陣圖)’네. 10만의 군사와 비할 수 있지. 금방 장군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길래 반드시 석진에서 죽을 것이라 생각해 들어가서 장군을 데리고 석진을 나왔네.”

육손은 이 팔진도가 제갈량의 새로운 작품으로 과거의 팔괘진(八卦陣)보다 더 현묘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 진법을 배우셨습니까?”

황승언이 대답했다.

“팔진도는 변화가 무쌍하여 배움으로 익힐 수 있는 진법이 아니네.”

그 말에 육손은 급히 말에서 내려 황승언에게 사의를 표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두보(杜甫)는 시 <팔진도>에서 이렇게 썼다.

천하 삼분 전략으로 공을 세우고(功蓋三分國)

팔진도를 만들어 명성을 떨쳤네(名成八陣圖)

흐르는 강물에도 돌은 움직이지 않으니(江流石不轉)

오 나라 공격의 실책만이 한이네(遺恨失呑吳)

이 시는 제갈량이 천하를 삼분하는 전략으로 공을 세웠고 ‘팔진도’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으나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유비의 오 나라 정벌을 막지 못한 것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유비는 백제성 영안궁(永安宮)에서 병상에 누운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제갈량이 영안궁에 이르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유비가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후사를 부탁했다.

“그대의 능력은 조비에 비해서 10배나 높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궁극적으로 통일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태자를 보필할 수 있으면 보필하고 태자의 능력이 안 되면 그대가 대신하오.”

신하에게 나라의 정권을 찬탈하라고 후사를 부탁하는 황제가 있다니? 지혜의 화신인 제갈량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유비의 뜻을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유비는 능력자인 제갈량이 자신의 아들을 대체할까 걱정되어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유비의 말에 제갈량은 눈물을 쏟으며 바닥에 엎드려 맹세했다.

“소신의 충심은 하늘이 알아 줄 것입니다! 소신은 반드시 일편단심으로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 해서 태자를 보필할 것입니다!”

유비는 제갈량이 맹세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너는 승상과 함께 나라 대사를 주재하고 부친을 모시듯 승상을 모셔야 하느니라”라는 유언을 태자에게 남겼다.

한(漢) 나라 황제 유비는 제갈량에게 나약한 태자와 원기를 크게 다친 한 나라를 남기고 붕어했다. 당시의 한 나라는 익주 한 개의 군과 유비가 동정 시 남긴 소수의 군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황제의 붕어 소식을 들은 남방의 토착민들이 너도 나도 들고 일어나 왕으로 자처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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