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7 09:25:21 출처:cri
편집:李仙玉

[제갈량 편-3] 북벌의 실패

(사진설명: 제갈량의 동상)

제3회 북벌의 실패

제갈량은 태자 유선(劉禪)을 보위에 올렸다. 역사적으로 유비는 선주(先主), 유선을 후주(後主)라 부른다. 유선이 사절을 오 나라에 파견해 손권과 강화를 맺고 오 나라와의 동맹을 회복하려 준비하는데 위 나라의 진군(陳群)과 허지(許芝), 제갈장(諸葛璋)의 서신을 보내왔다. 그들은 서신에서 상황을 잘 판단해 위 나라의 복속국이 될 것을 유선과 제갈량에게 권고했다. 이렇게 되면 한 나라는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한 나라 군주는 부귀를 누릴 수 있으며 더욱이 두 나라 간의 전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갈량은 일일이 답장을 보내 역신의 파렴치한 간언을 반박했다. 제갈량은 한(漢) 나라가 비록 약소국이지만 정도(正道)를 이어 가는 한(漢) 왕조의 정통이라며 향후 죄를 지은 한(漢) 나라의 역적을 토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갈량은 위 나라의 복속국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동시에 사람을 오 나라에 파견해 두 나라간의 동맹을 회복하고자 했다.

밤이 되었다. 제갈량은 잠들지 못하고 승상저택의 정원을 거닐었다. 밤 하늘에 가득한 별무리와 눈부신 은하수를 바라보는 제갈량의 머리 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현재 한 왕실의 국토는 위 나라의 1/9에 그친다. 그러니 중국 통일은 고사하고 위 나라와 대치하는 것도 힘들어 언젠가는 위 나라에 먹힐 것이다. 하지만 선 황제의 지우지은(知遇之恩)에 보답하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 왕실의 정권을 유지할 것이다. 아, 다섯 명의 장군 중 조운 한 명만 남았고 그마저도 노쇠해졌다. 익주는 땅이 넓지 않지만 인재가 적어 안팎의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내가 혼자 담당해야 한다. 나무 한 그루로는 큰 집을 지을 수 없다. 한신(韓信)과 같은 인재가 나타나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나는 문무(文武) 두 분야의 일을 모두 내 어깨에 짊어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인재를 발견하고 후계자를 키우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날 내가 쓰러지고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해 제갈량의 나이 48살이었다. 그 나이에 벌서 이런 위기감을 느낀 제갈량은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었다.

제갈량은 1년의 시간에 남방 토착민 정권의 반란을 평정해 군사적으로 뒷걱정을 해소했을 뿐만 아니라 남방을 군량 징집의 새로운 곡창으로 만들었다. 익주에서는 도강언(都江堰) 수리시설의 혜택으로 물난리가 나지 않고 또 전쟁도 발생하지 않아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누렸으며 국고도 두둑해져 북벌에 물질적 기반을 닦았다.

226년, 조비가 병사하자 제갈량은 북벌을 준비했다. 한중(漢中) 출정을 떠나기에 앞서 제갈량은 황제에게 소를 올렸다. 그 소가 바로 후세에 길이 전해지며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출사표(出師表)>이다. 제갈량은 <출사표>에서 출정의 여건을 진술하고 중원을 평정하고 한(漢) 왕실을 회복할 의지를 밝혔다.

군대가 한중에 이르자 북벌의 코스를 선택해야 했다. 위연(魏延) 장군이 먼저 제안했다.

“자오곡(子午谷)을 통해 직접 장안(長安)까지 가야 합니다. 이는 지름길이니 우리 군대는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관중(關中)을 공격해 중원을 겨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반은 성공입니다.”

제갈량은 마음 속으로 위연 장군의 제안을 검토했다.

“이 노선을 선택하면 단 한 번의 전투로 관중을 점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 나라가 두 눈을 뻔히 뜨고 8백 리 진천(秦川) 벌을 우리에게 내주겠는가? 그들은 반드시 대군을 풀어 반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중을 지킬 수 있겠는가? 드넓은 벌판인 관중에는 수비할 수 있는 천연 요새도 없으니 우리는 결국 관중을 다시 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남는 것은 덧없는 기쁨뿐일 것이다. 아, 내가 중원을 평정하고 한 왕실을 회복하겠다고 한 말은 민심을 격려하고 사기를 진작하는 그냥 구호에 불과하구나. 지금 우리는 이렇게 큰 일을 성사시킬 큰 힘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제갈량이 입을 열었다.

“그 노선은 너무 모험적이오. 오히려 기산(祁山)을 통해 롱우(隴右)를 취하고 다시 관중을 공격해 기회를 봐서 중원으로 진입하는 것이 더 안정적이오. 승전이 확실해야 실수가 없는 법이오.”

제갈량의 고충을 알리 없는 위연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보수적이지 않으십니까? 싸움이라면 당연히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제갈량은 속마음을 말 할 수 없어 둘러댔다.

“단술에 배 부르려 하지 마시오. 우리가 롱서(隴西)를 취하면 국토를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롱산(隴山)이라는 천혜의 요새도 가지게 되어 군대를 파견해 롱산의 험한 길목만 지키면 소수의 병력으로 위 나라 군사의 공격을 막을 수 있소. 그러면 롱산 서쪽의 넓은 땅은 모두 우리의 국토가 되게 되오.”

사실 이 것이야말로 제갈량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제갈량이 작은 대가로 큰 일을 성사시키고 공격을 최선의 수비로 삼은 목적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한 나라가 위 나라에 먹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 정세가 이렇게 불리하니 이 세상 최고의 군사(軍師) 제갈량도 세상을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시기와 운명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鄧芝)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기곡(箕谷)을 점령하고 사곡(斜谷)으로부터 북으로 나아가 미성(郿城)을 공격할 태세를 보여 위 나라 군대를 미혹시키게 하고 자신은 몸소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기산을 통해 롱우를 점령했다.

한편, 유비가 죽은 후 한(漢) 나라에서 2년 동안 아무 상황도 발생하지 않자 위 나라는 촉한(蜀漢)에 인물이 없다고 판단해 더는 한(漢) 나라를 주시하지 않고 오직 오 나라를 어떻게 멸할 것인가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밖에 한 나라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롱서의 남안(南安)과 천수(天水), 안정(安定) 등 세 개의 군을 항복시켰다. 그보다도 한 나라의 더 큰 수확은 롱서의 명장인 강유(姜維)가 한 나라에 항복한 것이다.

그 바람에 관중이 들썩했다.

위 나라 대장군 조진(曺眞)은 조운의 미혹전술에 걸려 미성으로 갔기에 위명제(魏明帝)는 대장군 장합(張郃)을 보내 제갈량의 군대를 막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장합이 군사를 거느리고 요충지인 가정(街亭)에 이르자 제갈량은 급히 마속(馬謖)을 보내 가정을 지키게 했다.

제갈량은 마량(馬良)과 친분이 아주 두터웠다. 과거 마량이 유비를 따라 동정을 떠날 때 제갈량은 그 길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임을 알면서도 마량을 막을 수 없었다. 그 때 마량은 동정을 떠나기에 앞서 제갈량에게 자신의 친동생인 마속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관건적인 시각에 제갈량은 또 마속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속은 조괄(趙括)처럼 병서는 통독했지만 탁상공론에만 능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에 이른 마속은 제갈량의 배치도 따르지 않고 부장(副將)인 왕평(王平)의 권고도 듣지 않고 성을 버리고 산 위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결과 장합이 수원을 끊어버리자 한(漢) 나라 군사는 싸우기도 전에 우왕좌왕하다가 가정을 잃었다.

가정을 수비하지 못하자 한 나라 군사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고 제갈량은 롱우를 취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제갈량은 이미 손안에 넣은 세 개의 군을 버리고 한중(漢中)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은 “마속은 사실보다 말을 과장해서 하니 큰 재목이 아니다”라고 하던 유비의 임종 전 말을 생각하고 사람을 잘못 써서 북벌의 공든 탑이 무너지게 한 자신을 통탄했다.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머리를 베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해 자신의 벼슬을 3등급이나 낮추는 소를 올렸다.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제갈량의 이 언행으로 인해 한 나라 군사와 백성들은 또 다시 감동을 받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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